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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조금씩 잘 해나가다

글/ 해외 대법제자 샤오저우

[밍후이왕] ‘점차적으로 발전하다’를 말하자면 이 이치는 속인 중에서도 모두 아는 것이다. 도리는 알기 쉽지만 조금씩 잘 해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진상전화를 건 예를 들어 말하자면, 몇 년 동안 전화를 걸면서 서서히 형식에 치우치는 경향이 나타났다. 어제 내가 몇 명을 탈퇴시키고 오늘 몇 명을 탈퇴시켰다면서 속으로 기뻐했고 망상까지 했다. 내가 괜찮은 것 같았고 심지어 자신의 능력에 집착했다. 아! 이 사람은 내가 어떻게 말해 탈퇴했고 저 사람은 내가 어떠어떠하게 성공한 것이다. 어느 날 내가 아내와 유사 체험을 나눌 때 아내는 사부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했다. “절을 짓고 신을 모시느라 정말 다망하지만 유위란 한낱 헛된 노릇임을 어찌 알리요”[1] 정말 나에게 ‘방할’한 것이다.

그렇다. 다망하다고 정진하고 착실하게 수련한 것은 아니다. 많은 일에서 조금만 주의하지 않으면 형식에 치우치게 되고 일하는 데 빠지게 되며 일 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기고 바쁜 것을 정진한다고 여길 수 있다. 본인 관념에 부합되지 않고 일 하는 것에 영향 주는 것이면 모두 교란으로 여길 수 있다. 남북조 시기, 양무제가 불법(佛法)을 크게 흥행시키고 많은 절을 지었다. 한 번은 양무제가 달마조사에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 많은 절을 지었는데 내가 공덕을 얼마나 쌓았습니까?” 달마는 “공덕이 없다.”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몇 사람을 탈퇴시켰는가?’는 양무제의 ‘절을 얼마나 지었는가?’와 무슨 구별이 있는가? 물론 3퇴한 사람은 구도 받은 것이다. 이는 절을 지은 것과 전혀 다르다. 내가 말한 것은 우리 자신이 착실하게 수련한 방면을 말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직장일은 수련이 아니지만 속인 중에 반영되어 나온 일체는 모두 수련인의 사상이 체현된 것으로서, 수련 중의 행위는 일 속에서 반영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생활은 수련이 아니지만 당신의 수련 중의 상태는 당신의 언행과 거동, 생활 상태에 반영될 것이다.”[2] 법으로 나를 대조하니 나의 그런 정확하지 않은 상태는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긴 이렇게 간단한 일만이 아니라 그 속엔 환희심, 자만심,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 과시심 심지어 자생생마 경향마저 있었다. 그 밖에 난 늘 탈퇴한 사람은 그렇게 똑똑하게 기억했지만 탈퇴하지 않은 사람은 인상이 없었다. 내가 제고해야 할 점은 바로 성공하지 못한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일하는 과정 중에 자신을 착실하게 수련하는 것이 관건 문제이다. 그럼 이 측면에만 멈춰있어서야 되겠는가? 물론 안 된다. 우리는 계속 자신을 깊이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처음에 1시간 진상전화를 하여 한 명을 탈퇴 시켰는데, 한 동안 지난 후에도 여전히 한 명에 그친다면 그 자체를 우린 생각해봐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3퇴 수량에 집착하지 않지만 그 숫자는 우리가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했는가? 조금씩 잘해가고 있는가를 체현한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서서히 하라는 말을 당신이 듣고 당신은 스승님께서 서서히 하라고 알려주셨으니, 그럼 서서히 하자고 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당신은 자신에게 엄격하게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이 서서히 제고함을 허용한다.”[3]

다시 깊게 찾아보았다. 왜 안일해질까? 왜 느슨해질까? 왜 자신에 대한 요구를 느슨하게 할까? 냉정하게 곰곰이 나에게 물어보았다. 사부님께서 거대한 감당으로 연장하신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것이 아닌가? 혹은 ‘끝난다.’는 말씀을 오래 하셔서 지쳐 내심에서 조금 믿지 않은 것은 아닐까? 약간의 동요가 있는가? 없는가? 나 자신이 제일 똑똑하게 알 것이다. 그건 치명적인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서서히 제고함을 허용한다.”[3] 여기에 극단으로 가지 말고 점차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법리가 있다고 나는 깨달았다. 사부님의 새 설법을 들을 때마다 늘 채찍에 맞은 것 같았지만 몇 걸음 뛰지 못하고 서서히 또 늦추곤 했다. 원인을 캐보면 내가 자신에게 실제에 맞지 않는 목표를 정하여 너무 높고 아득했던 것 같다. 한 동안 지난 후 내가 원하던 것을 견지하지 못하면 정진하려던 자신감이 현실 속에서 무기력하게 조금씩 소진되어 인간 속의 악성 순환에 빠지곤 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것이 어찌 대법 수련자의 표현일 수 있는가? 대법 수련자는 지혜를 완전히 구비하고 있고 그 지혜에는 자아 내외를 장악해야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법리에서 깨달으면 좋지 않은 습관과 관념은 다른 공간에서 모두 실제적인 물질이고 산처럼 높기 때문에 한 걸음에 넘기 아주 어렵다. 특히 대법제자에 대한 구세력의 교란과 파괴 요소는 자신이 법에서 제고하지 않으면 역시 타파할 수 없다.

‘점차적으로 발전한다’는 이 점에 대해 다시 예를 들겠다. 나는 20여 년을 수련한 노제자이지만 연공을 견지한 것은 최근 2년 들어 해냈다. 금방 법을 얻었을 때 법에 대한 이해가 그리 깊지 않았고 연공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후에 사악이 박해하자 연공을 더 느슨히 했다. 지금 나이로 볼 때 나도 중년에 들어섰고 속인 이치에서 말할 때 비교적 안정되게 한 가지 일을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눈에 띄는 모순은 시간이 없는 것이다. 낮에는 일해야 하고 저녁에는 전화진상을 해야 하고 주말이면 나가 진상을 알려야 하며 가정 일도 있고 시간을 내어 법공부도 해야 한다. 그럼 시간을 내려면 잠자는 시간을 내야 한다.

나도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아침에 일어나 연공하려고 결심했지만 온힘을 다 해도 사흘 견지하고 나흘째 되는 날엔 견지하지 못하고 며칠 째 밀린 잠을 다 보충하느라 푹 잤다. 심지어 더 많이 잤다. 자신감도 꺾였고 가족도 나에게 우스갯소리를 했다. “군자는 장원한 포부를 세우지만 소인은 늘 포부를 세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일찍이 말한 적이 있는데, 당신들은 또 언제까지 기다릴 셈인가? 당신들은 또 언제까지 기다릴 셈인가?! 시간이 없다.”[4] 여기까지 배웠을 때 나는 미처 따라가지 못할까봐 정말 약간 당황했다. 특히 후에 신체에 소업이 나타났을 때 정말 제일 큰 결심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연공했다.

이번에 나는 정말 오래 견지했다. 그러나 약 일주일 후 도무지 버티지 못했다. 구체적인 표현은 법공부할 때 줄을 띄어 넘기고 동공을 할 때마저 잘못했으며 운전할 때 흐리멍덩했고 출근해서도 연속 하품을 했다. 아내는 나에게 견지하라고 격려하면서 이 시기를 넘으면 괜찮다고 했다. 나는 대법을 수련하는데 이런 상태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세히 생각한 후 나는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런 억지는 집착이고 극단으로 가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나는 ‘전법륜’에서 사부님께서 벌써 우리에게 계시하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공간에서 우리 몸의 업력을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절반 제거해주셨지만 남은 절반이 그래도 높아 여러 몫으로 나누어 우리에게 넘게 하신 것이다. 나에게 잠을 줄이고 시간을 내는 것은 큰 관이어서 한 걸음에 넘기 아주 어렵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조금씩 넘어야 되는 것이다.

법리에서 깨달은 후 나는 다그쳐 실천했다. 나는 나에게 ‘백일 계획’을 정했다. 처음에 시작할 때 나는 잠자는 시간을 그때 나의 정황에 따라 6시간 30분으로 정했다. 백일 견지한 후 다시 6시간으로 줄이고 또 백일 견지했다. 또 반시간 줄이고 백일 견지했다. 중간에 아직 요구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여기면 급하게 잠자는 시간을 줄이지 않고 백일 더 견지했다. 한번은 백일 계획을 세우기 전이었는데, 아침에 나는 주동적으로 반시간 전에 깨어났다. 알람도 필요 없이 연속 며칠 그렇게 했다. 나는 내가 반시간을 줄여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 나는 잠자는 시간이 약 4시간 10분이다. 이는 당초 6시간 30분보다 확실히 많이 줄어든 것이다. 관건은 이 기간 어떤 때 그래도 여전히 곤하긴 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주 좋지 않은 상태는 나타나지 않았고 출근하여 일할 때나 법공부, 연공할 때나 다 괜찮았다.

한 동안 연공을 견지한 후 나는 연공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아울러 나는 가부좌하는 시간도 엄격하게 요구했다.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약간씩 연장했다. 내가 이런 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서 나의 심성이 체현되며 자신이 제고해야 할 요소가 그 속에 있다. 연공 시간을 연장함에 따라 나의 인내력도 점점 늘어났고 이런 것이 오히려 나를 다그쳐 수련하도록 촉진했다. 모종의 각도에서 보면 ‘연(煉)’ 중에 ‘수(修)’가 있고 ‘수’ 중에도 ‘연’이 있다. 서로 보완하고 도와서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밖에 나는 연공할 때 순정한 심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체가 건강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노쇠를 늦추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며 이걸 구하고 저걸 구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약간의 구하려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대법의 요구에 따라 사부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하면 순정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같은 일에서 내심의 출발점이 약간만 다르면 그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 모든 대법제자가 모두 남아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하여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조금씩 해내고 다그쳐 착실하게 수련하길 바란다.

바르지 않은 곳은 수련생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 ‘홍음’ ‘유위(有爲)’[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뉴질랜드법회설법’[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4]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14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7년 7월 3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7/31/35189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