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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리는 다 알지만 해내지 못함’에 관한 일깨움

글/ 중국 대법제자 징위안(靜遠)

[밍후이왕] 어떤 수련생은 교류문장에서 자주 말한다. “법리는 다 아는데 행하지 못해요.” 평소 수련생들이 서로 교류할 때도 어떤 수련생은 자주 탄식한다. “법리는 다 아는데 왜 해내지 못할까!” 나도 한동안 이 문제에 대해 곤혹스러워 했다. 하지만 끊임없는 법공부와 착실한 수련을 통해 이런 말에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지금 자신의 일부 생각을 써내려 한다. 옳지 못한 곳은 수련생들이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1. 진정하게 법리를 인식하지 못했기에 해내지 못한다

우리는 다 안다. 사부님의 설법은 ‘이치와 말이 간단명료(理白言白)’[1]하다. 많은 고심막측(高深莫測)한 법리를 사부님께서는 인류의 가장 쉽고 통속적인 언어로 말씀하셨다. 미혹속에 있는 우리가 법을 인식하고 수련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법의 글자 뜻에 대한 인식은 다만 법이 사람 이 한 층 국부에서의 나타냄에 국한된다(사람의 교육, 수양, 관념, 집착에 따라 다르다). 사람 이 한 층에 있는 법의 모든 진정한 내포를 다 안 것은 아니며 인류 이 한 층차보다 높은 층층 층층의 내포는 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 법의 진정한 내포는 오로지 수련인이 착실한 수련 중에서만이 서서히 인식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련하는 사람이 어느 층차까지 수련되면 다만 그 층차 중의 불법의 구체적인 체현을 인식할 수 있는데”[2]. 당신이 법의 모 층차에서의 내포를 진정하게 인식할 때 당신은 이미 그 한 층차까지 수련한 것이고 당신의 사상경지도 이미 그 한 층차에 있는 것이다. 당신의 행위도 필연적으로 그 한 층차의 법리의 요구에 부합될 것이다. 얼마나 높은 법리를 깨달았으면 곧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법리는 다 알지만 해내지 못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는 다만 법의 표면적 의미를 안 것일 뿐, 수련인의 층차에 대한 법의 내포는 진정하게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해내지 못한다는 느낌이 드는가. 바로 우리에게 사람의 마음이 너무 많고 집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마음으로 어떻게 법의 더욱 높은 내포를 알 수 있겠는가? 때문에 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처럼 “일명(一名)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로서 개인의 해탈은 수련의 목적이 아니다. 중생을 구도함이 비로소 당신들이 올 적의 큰 소원(大願)이며, 정법 중에서 역사가 당신들에게 부여한 책임과 사명이다.”[3] 이 법리를 수련생들은 다 안다. 하지만 실제 수련 중에서 매 사람의 표현은 다르다. 어떤 이는 사람을 구하는 중요성과 긴박성을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어 매일 최선을 다해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한다. 어떤 이의 생각은 사부님께서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원만하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임무를 완성하는 심태로 한다. 또 어떤 이는 진상을 알리는 것을 전혀 중시하지 않으며 할 생각이 없고 하기 싫어한다. 또 어떤 이는 두려운 마음으로 감히 하지 못하는데 지금까지도 걸어나오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가? 바로 사람마다 수련 층차가 다르고 사상경지가 다르기 때문에, 즉 대법 법리에 대한 인식 정도가 다른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람의 기점에 서서 법리의 표면적 의미만 인식한다면 당연히 법리가 우리에 대한 요구에 도달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정말 자신을 수련인으로 본다면, 대법제자의 각도에 서서 이 법리를 인식한다면,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되어 조사정법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인식할 수 있다면,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하는 것은 대법이 우리에게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임을 인식할 수 있다면, 자신이 억만 년의 노력과 무수한 고생으로 오늘날 비로소 대법제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비로소 자격이 있어 조사정법하고 중생을 구도할 수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아무리 큰 재난도 우리가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것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곧 만고에 만나기 어려운 이 기연을 매우 소중히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잘하지 못하고 해내지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잘하지 못하고 해내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 반드시 자신이 수련한 층차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데 유일한 방법은 곧 법을 많이 배우고 진정하게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다. 자신의 수련층차가 제고되면 곧 법이 이 한 층차에서의 현현(顯現)을 보아낼 수 있고 그때는 자연히 법이 우리 이 한 층차에 대한 요구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2. ‘해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생각이 없고 하기 싫은 것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일부 사람은 수련의 목적이 불순하거나 법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의 수련 목적은 반본귀진이 아니라 이후에 생활을 더욱 잘하기 위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비록 매일 법공부하고 연공도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법공부하기에 법의 내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자신을 진정하게 수련하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들도 자주 “법리는 다 알지만 해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실 이런 사람은 해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할 생각이 없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역시 매일 법공부하고 법리를 말하자면 한 세트씩 말하지만 진짜로 법을 믿는 것은 아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처럼 “진짜로 수련하는 사람은 병이 없다.”[4] 이 법리에 대해 다 알지만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다. 신체가 불편하기만 하면 병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람의 방법을 좀 취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신사신법하지 않는 이런 사람은 실제적으로 아직 진정하게 법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법을 인식한 사람은 법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에 대한 인식이 애매모호하고 표면에서 사람의 이치에 떠 있으면서, 착실한 수련 중에서 끊임없이 법의 진정한 내포를 깨닫지 못한 사람만이 법을 의심한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법의 요구대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잘하지 못하고 해내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 반드시 자신의 원인을 진지하게 찾아야 한다. 자신의 수련상태로 조성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근본적으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인지, 하기 싫은 것인지 잘 봐야 한다. 만약 자신의 수련이 부족해 조성한 것이라면 시간을 다그쳐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한다. 법공부를 통해 착실하게 수련하고 자신의 층차를 제고해야 한다. 만약 자신이 내심으로부터 할 생각이 없고 하기 싫다면 곧 경계해야 한다. 절대로 만고에 만나기 어려운 기연과 스쳐지나가지 말아야 한다.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잘할 수 있는지는 우리가 대법제자가 맞는지 가늠하는 표지이다. 절대로 ‘법리는 다 아는데’로 자신을 장애하고 잘못 이끌지 말고, 자신이 안으로 찾고 안으로 닦는 것을 저애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잘하지 못하고 해내지 못하는 것은 곧 우리가 수련에서 아직도 부족한 점이 있고 사람의 마음이 너무 많아서 조성된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법을 배우고 실수(實修)하는 중에 자신을 제고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사람의 마음이 점점 적어진다면 법의 힘은 곧 우리 몸에서 체현되어 나올 것이다. 그때는 절대로 잘하지 못하고 해내지 못하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길에서 걷는 수련자에게 세상의 어떠한 마난도 모두 자신을 승화시키는 기회이고 모두 위덕을 건립하는 기회이며 모두 자신을 성취시키는 기회다. 우리는 마땅히 천지개벽에 있어본 적이 없는 소중한 기연을 붙잡고 시간을 다그쳐 대법제자가 해야 할 일을 잘함으로써 우리의 신성한 사명을 완성해야 한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2013년 대뉴욕지역법회 설법’[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3-사람 마음을 내려놓고 세인을 구도하자’[4] 리훙쯔 사부님 저작: ‘파룬따파의해-창춘(長春) 法輪大法(파룬따파) 보도원을 위한 설법’

원장발표: 2017년 7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7/18/3512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