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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마음을 거두고 자아를 내려놓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오랫동안 이 ‘자아’가 완고해 나의 정진을 가로 막는 거대한 관이었지만 요즘 깊이 찾아보고 자성해보니 마치 일부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아 글로 적어본다. 최후의 시간에 수련생들과 공동 정진하고 노력하여 착실하게 수련해 사존의 진수제자가 되려 한다.

왜 정진할 수 없는가? 자신이 괜찮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2013년부터 수련을 시작했고 처음에 인간세상의 고해를 벗어나고 많은 번거로움에서 해탈하고 싶은 마음이 아주 명확했다. 그리하여 자신을 움직일 동력이 있었다. 책을 볼 때마다 반드시 손을 깨끗이 하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한 글자 한 마디씩 진지하게 배웠다. 법공부가 깊어지면서 결가부좌하고 법공부를 했고 30분에서 50분까지 모두 견지해나갔다. 그 시기에 꿈속에서 늘 자신이 각종 교통수단을 타거나 혹은 공중에 떠올라 위로 상승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의 명백한 일면도 자신의 승화와 거대한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수련생과 교류할 때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고 시계 알람소리를 못 듣는다는 말을 듣고 나는 불가사의하게 느껴졌고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나는 매일 알람이 울리기만 하면 일어나고 알람소리가 가족을 깨울까 봐 꺼버린다. 그리고 정신이 깨어난후씻고 나서 아침 연공을 시작하는데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생각이 있은 지 얼마 못가서 어느 날부터인가 시작해 나는 아침에 알람소리를 듣지 못했고 높은 소리로 설정해도 듣지 못했는데 가끔은 남편이 꺼주었다. 낮에 하는 말이 나에게 들려주는 것임을 몰랐는데 나도 알람을 완전히 감지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는 좋았다 나빴다 하면서 반복됐는데 계산해보니 거의 2,3년이 됐다. 자신을 찾아보니 안일한 마음이 매우강했고 너무 게을렀으며 너무나 고생을 하려 하지 않는 등등인데 최종적으로 개변이 없었다. 매번 깊이 파보고 독하게 파보면 조금 나아지고 일단 느슨해지면 그 뒤로 3~5번 심지어 한 달, 수개월 동안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 나아졌을 때 시간을 찾아서 보충하고 더욱 많이는 사람마음이 강할 때는 그냥 놔둬버렸다.

이 문제로 매번 밍후이왕에서 수련생들의 이 방면 심득을 볼 때마다 나는 일부 방법을 찾아 자신을 격려하고 싶었고 이 상태를 철저히 개변하고 싶었지만 사실상 효과가 없었다. 법리 속에서 나도 알고 있는데 비록 수련생의 방법을 참조할 수 있어도 근본적으로 말할 때 이는 일종의 밖으로 구하는 것이고 근본적인 자신의 원인은 해결하지 못한 것이므로 이 관을 넘기 어렵다. 안일함을 구하는 마음? 게으름? 사람의 편안함을 탐하다? 후천에 형성된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한다는 관념? 마치 모두 있는 것 같지만 또 마치 뿌리를 건드리지 못한 것 같았다.

어릴 때 정경을 돌이켜보았다. 어릴 때 나는 어른들이 걱정하지 않는 아이였고 매일 방과 후 집에 가서 첫 번째 하는 일은 숙제였다. 마치고는 책가방을 정리하고 다음날 교과서와 준비물을 정리하고서 나가서 잠깐 놀았다. 어른들은 나를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아침에 알람을 설정하고 알람소리가 나기만 하면 바로 일어났고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기 싫어하는 상황이 아주 적었다. 동창생들은 모두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고통스러워했기에 주말이면 모두 점심까지 잠을 자거나 심지어 오후까지 잠을 잤는데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수업하거나 방학하거나 저녁에 늦게 자도 나는 아침에 일반적으로 일찍이 일어난다. 이후에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은 후 늦잠을 배웠고 사회 분위기가 이러하니 나도 더는 이전처럼 그렇게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지 않고 세파에 따라 흘러갔다.

대법을 수련한 후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고 이미 몇 년이 되어도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다. 단번에 이렇게 일찍이 일어나자니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그 시기에 사존께서는 가지해주시고 밀어주시고 초기에 대법을 얻어 본성의 일면은 여전히 신나고 정진했다. 그리하여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느 날부터 시작해 고질병이 도져서 늦잠을 자고 고치지 못했다. 나는 초기에 사존께서 가지해주시고 밀어주시는 그 단계가 지나가서 나중에 자신에게 의지해야 하기에 비로소 이러하다고 여겼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자신의 비교적 이상한 상태를 찾았는데 바로 밍후이왕의 교류문장을 본 후 늘 정진하는 수련생의 상태에 격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정진하지 않는 사례에 이끌리고 느슨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핸드폰 위챗을 하지 않는데 수련생의 교류문장을 보고 핸드폰을 하며 놀고 위챗을 하며 놀다가 곤두박질쳤다. 나는 며칠에 한 번씩 갑자기 핸드폰 혹은 위챗에 집착을 하며 한번 놀기 시작하면 며칠이 걸렸다. 또 예를 들면 수련생이 인터넷쇼핑몰에서 제품을 구매하는 것을 좋아하고 시간을 지체하고 대법자원을 낭비한다는 등을 이야기하면 본래 그런 쇼핑몰에서 구매하지 않던 내가 나가서 쇼핑하기 시작하고 대량의 시간과 금전을 낭비했다. 늘 수련생들이 지적하며 모두 경계하라고 하는 일을 나는 반대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교류문장을 보기 전에 없었던 이런 일들을 말이다.

초기에 나는 단지 마음속으로 자신이 왜 심성을 지키지 못하는지 생각했다. 남들이 무엇을 말하면 따라서 해보고 또 몸으로 시도까지 한다. 몸으로 법을 시험한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한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왜 나는 ‘몸으로 법을 시험해보는가?’ 잠재의식 속에서 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느끼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런 넘어진 수련생들, 아주 많이는 노수련생들이고 심지어 7.20 이전에 법을 얻은 노제자들이 오히려 수시로 일부 나 같은 이런 ‘신수련생’이 보아도 쉽게 제거할 사람마음에서 곤두박질치기에 자신은 암암리에 환희심이 일어났고 남을 깔보는 마음,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자신이 그래도 괜찮고 얼마를 수련하지 못해도 이런 노제자들보다는 이런 문제에서는 수련을 잘했다고 여기는 등등이다.

이 문제를 발견하면서 나는 비로소 의식하게 됐다. 자신의 수련이 이렇게 착실하지 못하고 그렇게 표면에서 겉도는 것이 자신이 ‘수련을 괜찮게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근본적으로 그런 후천에 형성된 ‘자아’마저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잠재의식에서 나는 늘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여기고 속인 때에도 비교적 높은 도덕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했으며 수련 이후 자아반성을 하고 이런 유사한 생각으로 자신을 장애시켰다. 비록 확실히 늘 안을 향해 찾고 나로 하여금 적지 않은 사람마음을 제거했지만 사실상 최종적으로 그 무척 이기적이고 철저히 자신을 위하는 그 ‘자아’는 전혀 움직이지 못했고 잠재의식에서 ‘나는 일반인보다 더 강하다’란 생각이 있었다.

이 한 점을 깨달은 후 나는 비로소 아주 후회하며발견했는데 바로 이 일념이 나를 가로막고서 마땅히 제거해야 할 많은 사람마음을 제거하지 못하게 했고 나를 줄곧 붙잡고 진정으로 철저히 장기간 정진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심지어 이후에는 나는 자신의 깨달음이 나쁘고 근기가 얕아 아마 수련성취에 희망이 없을 것 같다고 여기게 했는데 바로 이 ‘가짜 나’에게 이렇게 사기당한 후 소극적인 게으름이 나타났고 사부님을 믿지 않고 법을 믿지 않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이 마음에 이끌린다면 결과는 정말로 상상하기 어렵다.

후천 자아를 내려놓고 비로소 ‘진짜 나’를 분간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뿌리가 구우주에 있고 철저히 자기를 위하는 ‘자아’가 장기간 장애되어 나는 어느 것이 진짜 나이고 어느 것이 후천에 형성된 가짜 나인지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에 와서 나는 무척 더럽고 강력한 사상업력에 교란당해 비로소 이 마음을 깊이 파보았고 이 근원을 찾게 됐다.

대법을 수련한 이후 나는 사존과 대법에 대해 경건과 공경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고 절대로 감히 범접하지 못했다. 평소에 이야기할 때도 공경의 마음을 지니고 절대로 쉽게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자신이 경사경법 이 문제에서는 무슨 근본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번에 이 사상업력은 무척 좋지 못했는데 모두 사존에 대해 무척 불경하고 무척 나쁜 염두였다. 나도 이것이 나 자신이 아님을 깊이 알았지만 수일간 대치상태였고 정념으로 제거해 조금 나아졌지만 얼마 안 가서 또 튀어나오고 교란을 받았다.

갓 시작할 때 나는 이 염두를 발견하면 첫 번째 염두가 ‘아이고,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해. 어찌 이런 더러운 염두가 있지?’였고 이어서 비로소 발정념으로 제거했으며 이어서 그것을 부정했으며 진짜 나에게서 나오는 염두라고 승인하지 않았다. 이어서 전문적으로 ‘전법륜’ 중의 ‘주의식이 강해야 한다’를 읽고 적으며 또 큰 힘을 들여 발정념으로 제거했다. 어느 날 나는 비로소 인식하게 됐는데 원래 나는 처음부터 이것을 승인했고 다시 말해 구세력의 올가미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사로를 정리했고 마음속에서 이렇게 자신에게 물었다. “당신은 사존께 이렇게 불경한 염두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당신은 진정한 당신이 이렇게 더러운 염두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당신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도 그것을 갖지 말라, 당신은 자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크게 깨달았다. 죽으려는 것은 그것들이고 나에게 제거된 것은 이런 더럽고 타락한 찌꺼기들이자 쓰레기인데 어찌 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내가 매번 발정념할 때 수시로 또 일념을 가했다. “나 자신의 XX를 제거한다.” 그것은 먼저 그 나쁜 것이 나라고 승인하고 다시 제거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나라고 승인했다면 또 어찌 철저하게 깨끗이 제거할 수 있겠는가? 이때 나는 비로소 의식하게 됐는데 수련생들도 밍후이왕에서 유사한 문제를 교류한 적이 있었다. 바로 발정념할 때 늘 ‘나 자신의’ 무슨 좋지 못한 것이라고 강조하는데 일부 것들은 전혀 자신의 것이 아닌데 오히려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에 깨끗이 제거되지 않고 또 반복되는 것이다.

‘진짜 나’와 후천에 형성된 관념과 사람 마음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은 진정으로 그 이기적인 ‘가짜 나’를 철저히 내려놓지 못하고 자신이 또 ‘남보다 조금 강하다’는 이 마음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 강력한 집착 또한 수련인의 정진을 저애하고 수련인의 의지를 소모시키는 무척 좋지 못한 마음이며 심지어 근본 문제인 것이다. 비록 각 방면과 각도에서 우리는 그 후천에 형성된 이기적인 관념을 닦아서 제거해야 함을 모두 알고 있는데 사실상 이 관념이 하루나 한 생에 형성된 것이나 일부는 아마도 자신을 몇 생 따라다녔을 것이다. 염두가 나오기만 하면 또 자신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여기는데 사실 전혀 아니다. 진정으로 순정한 자아는 그러한 난잡한 것이 없고 순정하게 한 곳에 머물러 있다.

이 문제가 명백해진 후 나는 연공인이 왜 입정하지 못하고 법공부할 때 정신이 다른 데로 가고 발정념할 때 조는 등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됐다. 장기간 이 후천에 누적되어 형성된 자신과 비슷해 보이며 제 딴에 느낌이 양호한 ‘가짜 나’에 집착했기 때문이고 사람 속의 집착을 철저히 내려놓고 진심으로 법을 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경사경법의 정도가 지극히 제한적이고 심지어 불경하고 불신하고 있었다. 왜인가? 늘 자신이 좋다고 여기거나 괜찮다고 여기는데 어디에 진심으로 순정무아한 마음으로 사존과 대법을 믿고 존경하겠는가? 나는 그 자리에서 방할당하는 것 같았고 단번에 깨어났다. 아주 많은 사람마음을 발견했는데 사실 모두 일찍이 제거하고 깨끗이 제거할 수 있었던 것들인데 깨끗이 제거하지 못하고 반복하고 있었다. 모두 그 이기적인 ‘가짜 나’에 집착하고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아’에 집착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대법에 동화하지 못했고 선택적으로 자신의 애호에 따라 대법을 이해했는데 실제적으로 수련하지 못했고, 자신이 진정으로 수련하려는 것에는 인간세상의 번뇌에서 해탈하기 위한 것도 가세한 셈이다. 이 한 개의 근본 집착을 장기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대법에서 일부 평온을 얻고 한 점의 승화를 수확하면 곧 득의양양해하고 내심에서 만족하며 이로써 더는 더 많은 법을 담지 못했고 법공부해도 법을 얻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이는 대법 속에서 해탈을 구하고 사람의 번뇌에서 해탈하려고 하며 사람의 평온함을 얻으려 했다. 이것도 나의 정진이 늘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는 원인이었다. 정진하다가 느슨해질 때 외부의 자극을 더 받으면 비로소 더 정진했다. 내가 줄곧 수련을 생활의 일부분으로 여기고 생활을 수련의 일부분으로 여기기 않았기 때문이다. 일념지차이지만 천양지차다!

정을 제거하지 못하면 수련성취 못하고 사부님을 독실히 믿으면 수련이 어렵지 않다

‘정(情)’자를 말하면 수련인은 모두 알고 있는데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두 대금기이다. 그러나 대법수련에서는 또 조금 다른데 나는 단지 두 사람을 중점적으로 말하려 한다. 한 명은 어머니이고 한 명은 남편이다. 그들에 대한 나의 집착을 제거해야 했다.

어머니는 98년에 대법을 수련하셨고 박해 이후 2006년에 ‘병업’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 일은 나에 대한 충격이 무척 컸고 한동안 빨리 죽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물론 나는 자살하지 않을 것인데 죄업이 비할 바 없이 크기 때문이다. 이후에 인간세상에서 자포자기하고 한순간에 소멸되기를 바랐다.

2013년 대법을 수련하기 시작하면서 일부 법리를 점차 알게 됐고 어머니에 대한 정도 끊임없이 닦아서 없애고 내려놓았다. 그러나 마치 늘 한 가닥이 있는 것 같았고 깨끗이 제거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명백할 때 나는 어머니에 대한 정이 많이 내려진 것을 알고 있고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심 깊은 곳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한숨이 나왔고 무척 아쉬운 생각, 많은 여한이 남아있었다.

대법을 수련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이전에 어머니를 두 번이나 꿈속에서 만났다. 두 번째 꿈에서 만날 때, 나는 이미 어머니보다 더 높은 공중에서 끊임없이 날았고 어머니는 낮은 곳에서 서서히 상승하고 계셨으며 아주 천천히 상승하는데 나와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나는 늘 어머니와의 정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문제임을 깨달았다. 수련 층차가 돌파되면서 이것이 작은 문제가 아님을 의식했다.

나는 이 문제를 반복적으로 사고하고 내심에서 이 정을 제거하려고 결심했다. 전법륜 제 6강의 “자심생마는 또 기타 정황이 있다: 세상을 떠난 친인(親人)이 교란함을 보게 되는바, 울며불며 당신에게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라고 하는데, 어떤 일이든 다 나타난다. 당신이 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이 아이를 지나치게 사랑하고 당신은 당신의 부모를 사랑한다. 당신의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그것이 당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알려주지만…… 모두 할 수 없는 그런 일들로서 당신이 한다면 잘못되는데, 연공인(煉功人)은 바로 이렇게 어렵다. 사람들은 불교가 혼란하다고 한다. 유교의 것들도 불교 중에 들어갔고 무슨 부모 효도와 자식 정 같은 것들조차 들어갔지만, 불교 중에는 이런 내포가 없다.”를 읽을 때 그 순간 나는 크게 깨달았다. 원래 가족 정에 집착하고 제거하지 않음은 ‘불이법문’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유교이고 하나는 대법 수련이다. 이 염두가 생기자 어머니에 대해 수년간 끊기 어렵던 그것이 서서히 끊어지고 흩날리는 것을 느꼈다. 내심에서 마치 일체 일념 관계가 이미 명백해지고 일체의 인정의 파란만장이 사라졌다.

같은 시기에 남편과의 인연을 생각하게 됐다. 나와 남편은 본래 여러 해 동안 군자처럼 교제했고 이후에 인연 관계가 정해져 결혼했다. 그러나 내심 깊은 곳에서 알았는데, 일체는 모두 법을 위해 온 것이고, 우리는 이 일보까지 걸어왔으며 대법에 연결되어 맺어진 것이었다. 결혼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정식으로 수련했기에 부부의 정과 색욕심을 주동적으로 닦아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는데 상대방에 대해 깨끗이 제거되지 못한 일부 정의 요소가 남아있었다.

나는 대법 수련은 표준과 요구가 아주 높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중에 수련했다고 하여 표준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아울러 나는 늘 남편과의 정, 나와 어머니와의 정 여기에 어느 부분에서는 유사한 것이 있음을 늘 느꼈다.

바로 내가 끊임없이 사고하고 부부의 정을 내려놓는 과정 중에서 또 점차적으로 일부 계시를 얻었다. 나와 남편은 원래 여러 세에 거쳐서 모두 부부, 연인, 동창생, 동료 등 이러한 관계였다. 심지어 사전의 먼 시간에서는 서로 의지하는 인연이었고 ‘동반자’관계였다. 그러한 관계가 표현되어 나오는 상태는 아름다운 것이고 사람의 정 혹은 욕이 없었다. 서로 간에 지켜줌은 조건이 없는 것이고 시간과 공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갈라져 있어도 모두 이러한 정해진 관계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일단 다시 만나면 또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었고 상대방에 대해 의심하고 추측하는 생각이 없었다. 또 한 생에는 우리는 원수 집안이어서 서로 상처를 주어야 했고 혼인할 수 없었다. 연인으로 1천년 넘게 했고 아울러 도시의 양 끝에서 거주했는데 만나도 포옹 혹은 현대 서양식으로 얼굴을 맞대는 정도의 예를 갖추면서 기타 예를 넘는 행동과 생각이 없었다. 평소에 모두들 일상 업무와 생활에 전념했고 이로 인해 서로 간에 권태를 느끼지 않았으며 단지 역사에 따라서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 걸어왔다. 이 5천년 내에 비로소 부부 이러한 인연이 있었고 이 일세에는 우리 두 사람이 처음 만났는데 모두 상대방을 오랫동안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물론 모순이 있었고 그 속에 있을 때는 역시 아주 격렬하고 첨예하게 표현됐다. 그러나 결국에는 안을 향해 찾으면서 문제를 해결했고 이로 인해 진짜로 간극이 생기지 않았다. 아울러 모순을 촉성하는 근원은 바로 사람 이 미혹에서 정의 환각에 몽폐되어서였다. 일순간에 이 ‘부부의 정’을 중하게 보아서였고 일단 이 올가미에서 벗어나 자신을 수련인의 표준 속에 놓으면 이런 모순들은 하나하나 해결됐다. 그러나 횟수가 많아지자 자신이 아주 둔해서 왜 매번 먼저 올가미에 걸려든 후에 다시 깨어나는지 생각했다.

내가 어머니와의 정을 점차적으로 깨달은 후 마치 남편과의 정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긴 것 같았다. 사실 ‘정’은 바로 삼계 내의 물질이고 내가 이것에 집착하면 삼계를 벗어날 수 없으며 그것에 의해 제약당하고 이끌리는데 그것은 사실 어떤 일종의 정이라고 해도 모두 똑같았다. 표현 형식상에 차이가 있을 뿐이고 본질적으로 같았다. 아울러 ‘가족 정’에 집착함에는 또 ‘불이법문’ 문제가 존재한다. 이는 작은 문제가 아니고 이른 바 ‘부부의 정’ 또한 정의 다른 일종의 연화이고 약탕 이름만 바꾸고 약재는 바꾸지 않는 셈이다. 사람이 미혹 속에서 이런 실마리를 풀 수 없고 수련인은 대법이 있어서 깨닫고자 하기만 하면 마음속으로 아주 쉽게 명백해지며 그 후로 노력해 실질적으로 수련하면 된다.

이런 것들에 명백해진 후 나는 또 정념 중에서 구세력이 강제로 주입한 요소를 제거했고 외래의 일체 교란을 제거했다. 정념 속에서 내 눈앞에는 붓대처럼 길고 뾰족한 푸른 봉우리들이 나타났는데 공중까지 솟아있었고 뾰족한 정상에는 구름과 안개가 에워싸고 있었으며 봉우리 사이의 평지는 드넓고 광활했으며 전반 화면은 ‘천 개의 산에 새가 전부 날아가 버리고 만 갈래 길과 사람들이 종적을 감춘’ 고요함과 텅 빈 느낌이었다. 원래 푸른 봉우리들과 주변 정경이 보였는데 내가 다가가 보니 이런 정경이 점차 축소되고 갈수록 더 축소되고 더 멀어졌다. 최후에는 위축된 정경이 화면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었고 기타 빈 곳에서는 또 방금 전에 나타나지 않은 정경들로 채워졌다. 나란 사람이 갈수록 커지고 커져서 나중에는 그 푸른 봉우리들이 아이들이 놀고 있는 나무 블럭 같아졌다. 한 작은 구역에 놓였고 안의 정경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으며 나의 전반 신체는 옅은 금동색을 띄면서 세밀하고 광택이 났으며 머리는 같은 색의 천을 쓰고 있었고 상서롭고 평온했다. 이때 공중에서 금색 연꽃이 나타났고 꽃송이가 내 얼굴 한 편을 향해 피어났다. 비할 바 없이 눈부신 금색 빛을 뿜고 있었고 그 장면 속에서 전반 마당은 모두 금빛 찬란했고 생생한 느낌이었는데 비할 바 없이 밝고 편안했다.

나는 남편과의 인연은 생생세세의 인연이고 모두 법을 위해 온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수차례 윤회를 거쳤고 모두 극본에 따라서 서로 간의 배역을 연기할 뿐이고 잘 연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연기를 잘하지 못하면 공로가 없는 것이다. 인간세상의 득실에는 무슨 좋은 매듭이 없다. 우리 사이에 연결된 매듭은 전혀 변한 적이 없었는데 그 물질 자체는 변한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은 사람 이 일면의 정과 원한, 사랑, 은혜의 득실에 의해 변하지 않으며 사람이 자꾸 변하는 것은 모두 미혹 속에서 진상을 잘 보지 못해서 초래한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날듯이 홀가분한 느낌이었고 대법수련의 정교함과 미묘함을 깊이 느꼈다.

맺음말

이번에 안을 향해 자신의 문제를 찾으면서 나는 사람 속의 정을 제거하지 못하면 수련성취 못함을 의식했다. 이 ‘정’은 만상을 망라하고 있었고 변화무쌍했다. 그러나 사실상 모두 한 개의 뿌리에서 기원되는데 ‘정’과 ‘사(私)’는 서로 같은 뿌리로 되어 있고 서로 의지한다. 일체 정의 근원 역시 그 가장 최종의 사(私)의 근원에서 왔고 이 두 가지는 각종 사람마음을 생성시키고 수련인을 미혹시킨다.

사존께서는 설법에서 우리에게 명확히 알려주셨다. “질투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정과를 얻지 못한다.”[1] 질투심은 바로 정을 위한 것이고 사(私)를 위한 것이며 이 한 개의 전반 체계는 모두 구우주 체계 속에서 연장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그 속에 잠겨있고 사람의 정, 느낌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근본은 여전히 사(私)에 집착하고 미혹되어 최후의 그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며 한 층의 극대한 장애다.

이런 문제를 일찍이 알았다면 대법 속에서 일찍이 자신을 바로 잡았을 것이고 많은 손실을 감소시켰을 것이다.

개인 층차의 제한으로 부족한 곳은 시정해주기 바란다. 허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7년 7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7/5/3505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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