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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수련생을 찾아오는 중에 심성을 제고하다

글/ 랴오닝 대법제자

[밍후이왕] 7.20 이후 실수(實修)를 중시하지 않았는데, 명백해진 이후에 항상 시간이 충분치 않고 자신의 발걸음이 너무 늦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수련방면에서 급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해 법을 얻은 이후에 수련하지 않는 예전 수련생에 대해서도 조급함을 느꼈다. 이 2년간 나는 예전 수련생을 찾아오는 방면에서 매우 많은 노력을 들였다. 아래에 이 2년간 내가 예전 수련생을 찾아오는 중에서 체험한 것을 사부님께 보고 드리고 수련생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1. 예전 수련생을 찾아오다

2004년 7월, 나는 시장에서 우연히 한 노수련생을 만났다. 그는 대화를 나누던 중에 시골로 내려가서 예전 수련생을 함께 찾으러 갈 동료를 찾고 있으나 줄곧 적당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며, 그가 보기에 내가 가장 알맞다고 했다. 당시 나는 “정말 기막힌 우연이네요. 저도 최근에 마침 현에서 이 일을 하고 있었어요. 시골로 내려가도 좋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교통수단이 문제인데,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내가 전동차를 사서 당신을 데리고 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튿날 나는 한 번 충전하면 100km를 갈 수 있는 큰 전동차 한 대를 샀다. 8월 2일부터 나는 전동차로 그를 데리고, 이미 파악해 둔 ‘7.20’이후에 수련을 하지 않거나 책만 보고 나오지 않거나 정진하지 않는 수련생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매 수련생의 구체적인 상태에 근거하여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로 그들을 깨우쳐 주었다. 다수의 수련생이 새롭게 대법으로 걸어들어 오거나 정진할 수 있게 되었다.

10월 중순 이후로 날씨가 점점 추워졌다. 그 수련생은 나이가 많아 더는 함께 다니기가 어려워져 나 혼자서 다녔다. 그 수련생은 당시 78세였고 나는 75세였다.

내가 시골로 내려가면 또한 편리한 조건이 있었는데, 7.20이전에 내가 보도소 소장이었기 때문에 각 향진의 협조인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7.20이전의 많은 노수련생도 모두 나를 알고 있는데, 그때 홍법을 하려고 오토바이를 타고 현의 농촌 구석구석을 다녔다. 이런 이유로나 역시 접촉하기 편리하고 말하기도 쉬웠다. 그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마을은 50여km를 가야 했는데, 한 번 왕복하면 100여km이었다. 배가 고프면 되는대로 건제품을 좀 사고 목이 마르면 물을 좀 찾아 마셨다. 겨울에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러워 넘어진 적도 있으나 놀람은 있어도 위험 없이 걸어 지나 왔다.

2. 107개 마을을 두루 다니다

이 과정 중에서 현지의 협조인들도 큰 작용을 발휘했다. 시골로 내려갈 때 다수는 나도 현지의 협조인을 찾아 함께 갔다. 그들은 현지의 정황에 대해 더 익숙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비교적 편리하고 순조로웠다. 게다가 정진하지 않는 협조인도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1년 후, 전동차의 전기가 부족하고 타이어도 나빠져 나는 또 전동차 한 대를 새로 샀다. 모든 현 범위 내 49개 향진의 107개 마을을, 대법제자가 있는 곳이라면 전부 돌아다녔다. 한 달에 거의 한 번을 돌았는데, 법공부 팀을 만들 조건이 되는 곳에는 법공부 팀을 만들어 법공부를 견지할 수 없던 이도 견지하게 되었다. 일부 수련하지 않던 수련생도 돌아왔고, 그다지 정진하지 않던 이도 정진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정진하다가 시간이 길어지면서 해이해진 이도 있어 자주 가서 그들을 이끌어 나가야 했다. 대법책이나 기타 자료가 필요한 일부 수련생에 대해서는 모두 제때에 해결해줄 수 있었다.

수련생을 도와주는 동시에 나 자신도 법공부와 연공에 힘을 들였는데, 매일 3시 40분에 일어나 5세트 공법을 전부 연마했다. 법공부는 매일 2시간 이상 했는데, 법에 대한 이해와 인식에서 매우 큰 제고가 있었다. 정진하지 않는 수련생에 대해 더욱 조급해져 예전 수련생을 찾아오려는 책임감이 커져갔다.

3. 방해를 돌파하고 예전 수련생을 찾아오다

이 과정 중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도 있었고 억울함도 있었으며, 더욱이 각종 각양의 교란과 압력이 있었지만 나는 모두 돌파했다. 시작할 때, 나는 장기간 수련생과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에 10여 개 향진의 백여 개 마을 수련생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여 수련생의 얼굴은 알고 있지만 이름은 다 기억 할 수 없었고 또는 수련하지 않는 그녀의 남편 이름을 기억해서야 그녀의 집을 알아낼 수 있었다.

왕래를 하다 보니 이름이 많아져 기억할 수 없어 노트에 적어야 했다. 이러한 것을 어떤 수련생은 이해하지 못했고, 배후에서 뭐라고 말하는 사람도 다 있었다.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안전문제가 잠복되어 있다고 말했고 협조인과 나는 이 일에 대해 말했다. 나는 이 항목을 잘하고 싶은데, 항상 백여 개 마을을 가야하고, 막 시작할 때 기억하지 못해 노트에 써야 했다고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수련생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직면해 나도 억울함을 느꼈고, 하지 않겠다, 다른 걸 하자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나고서 수련이 어디 그렇게 쉬울 수 있겠는가, 안으로 찾아보자,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잘해야 하는데, 이 항목은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것이고, 역시 자신을 수련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4. 예전 수련생을 찾아오는 중에 심성을 제고하다

어떤 부부는 원래 두 사람 모두 수련했다. 후에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남자는 또 후처를 맞았는데, 이 여자는 그가 수련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하루는 내가 그의 집에 가서 이 수련생과 막 법공부에 대한 일을 제기하는데, 그녀가 갑자기 덮쳐들며 한손으로 내 손을 잡고 한손으로는 내 어깨를 잡아당기며 나를 힘껏 문밖으로 끌어냈다. 입으로는 듣기 힘든 말을 뱉고 즉시 방문을 닫고는 남자 수련생을 못 나오게 했다.

그리고 한 촌의 부부 둘은 ‘7.20’전에 보도원이었으나 며느리가 강력히 반대하여 결국 모두 수련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그들을 찾아갔을 때, 며느리는 수련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자마자 즉시 나를 쫓아냈는데, 내가 가지 않는 것을 보고는 전화로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다.

또 한 번은 가정의 방해로 정진하지 않거나 걸어 나오지 않는 수련생을 찾았을 때였는데, 역시 막 법공부와 진상 알리는 일을 언급하자 밖에서 불을 피우던 그녀의 남편이 즉시 불태우던 막대기를 갖고 들어와 그 막대기로 나를 가리키며 “나가시오. 막 이틀은 조용하더니 또 와서 이런 쓸데없는 소릴 하는군. 당장 가시오!” 라며 나를 억지로 쫓아냈다.

매번 이런 정황을 만날 때, 나는 웃으며 그들에게 말한다. “이러지 마세요. 당신이 나를 때리고 나를 욕해도 나는 상관이 없고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수련을 가로막으면 당신에게 좋지 않아요. 그것은 죄를 범하는 겁니다. 마땅히 그를 지지해야 해요. 그가 수련하면 당신과 가정에 모두 좋은 점이 있답니다.”

그리고 한 수련생은 내게, 그의 어머니는 원래 꽤 정진했으나 지금은 마작에 빠져 권고해도 듣지 않는다며 나보고 가서 좀 도와 달라 했다. 나는 연이어 4번을 갔다. 앞서 두 번은 그녀가 밖에서 마작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어디 있는지 분명히 알면서도 찾으러 가지 않았다. 세 번째는 그녀가 들에 일하러 가서 만나지 못했다. 네 번째에야 비로소 그녀를 만날 수 있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사부님의 설법을 말해주고, 대법을 얻음은 쉽지 않음과 수련의 아름다움을 말해주었으며, 이와 반대로 사명을 완성하지 못하고 서약을 실행하지 않은 두려운 후과를 말해주었다. 그녀는 깨닫고 즉시 마작을 내려놓고 바로 이웃마을 법공부 팀의 법공부에 참가하겠다고 했으며, 아울러 다른 수련생도 이끌었다.

또 한 여 수련생은 남편이 일 년 내내 밖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집에서는 소, 돼지, 닭 여러 마리를 기르고 매우 넓은 밭도 있어 종일 굉장히 피곤했다. 법공부, 연공, 진상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부근 수련생들은 모두 그녀를 걱정했고, 나에게 방법을 생각해 그녀를 도와주라고 했다. 그녀와 대화하자마자 그녀는 고생스럽다고 한바탕 하소연을 하며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나는 곧 그녀에게 우리가 법을 얻음은 쉽지 않고, 상태를 좀 개변할 수 없겠는지, 대법을 제1위에 놓고, 매일 차라리 적게 잘지언정 시간을 짜내어 법공부를 해야 하며,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연공을 하고 그 후에 다시 다른 것을 하라고 말했다. 20여 일이 지나 또 그녀의 집에 갔는데, 만나자마자 그녀는 매우 기뻐하며, “이전에는 어째서 이렇게 할 것을 생각지 못했을까요. 이렇게 배치하니 법공부도 하고 연공도 하고 무슨 일이든 그르치지 않아요. 원래 몸도 안 좋았는데, 지금은 몸도 좋아졌어요. 정신 상태도 좋아졌고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예전 수련생은 사오를 했는데, 소위 ‘제10강’을 배웠다. 나는 곧 법리상에서 그와 교류를 했고, 후에 그는 또 대법수련의 길로 걸어들어 왔다. 이런 일은 매우 많지만 많이 말하지는 않겠다.

이 2년간 비록 일부 예전 수련생을 찾아오고 동시에 정진하지 않는 많은 수련생을 정진하게 하고 어떤 곳은 법공부팀이 설립되었으며 어떤 이는 이때로부터 걸어 나왔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전에 나 역시 어떤 수련생이 찾아와 나로 하여금 정진할 수 있게 해주었었다. 그러나 나 자신은 줄곧 집착에 가로 막혀 걸어 나오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걸어 나온 것이 너무 늦었다고 깊이 느낀다. 많은 시간, 많은 일을 지체했는데, 매우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항상 사부님께 죄송함을 느끼고 수련생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나는 이미 가만히 결심을 내렸다. 이후에 반드시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하고 최후의 이 단락 길을 잘 걷고 바르게 걷겠다.

원문발표: 2017년 6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득>수련경력>진상을 알려 세인을 구도하다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6/29/35012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