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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뉴욕법회에 참가한 후의 변화

글/ 미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2017년 뉴욕법회에 참가했는데 자신의 심성에 커다란 제고가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법회가 지난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법회의 정화 속에 있는 상태 같고, 심성이 끊임없이 승화되고 있는 것 같다.

법회에서 돌아오자마자 전화에서 욕설과 질책을 몇번 받은 적 있다.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나에게 씌우개를 씌우신 것처럼, 수련생의 욕설이 나를 이끌지 못했다. 조금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는데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예전에 나는 억울, 불평, 원망하고 다른 수련생에게 말하기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이해와 인정을 바라고, 심지어 당문화 방식으로 처리했다. 지금은 아니다. 일이 생겨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냉정하게 처리할 수 있다. 수련생과 논쟁하지 않으며 수련생의 기분이 누그러지라고 일을 도맡아하기도 한다. 잘못을 승인하고 항목에서 협조하며, 자신은 안으로 찾는 방식으로 내심의 문제를 해결하곤 한다.

사존의 이번 설법을 듣고 나는 많은 일에서 문제를 보는 각도가 달라졌다. 수련은 더 이상 그렇게 힘겹지 않고 모든 일에 부딪히면 유쾌할 수 있다. 또 자연스러움에 따르고 억지로 구하지 않는 평화적인 심태이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발생했는지 자세히 생각해 보았다.

1. 질투심을 제거해야 진정 무사무아할 수 있다

사부님은 “이 질투심을 당신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 물건은 무시무시한 것이며, 그것은 당신의 모든 수련을 다 해이해지게 만들 것이고, 당신을 망칠 것이다. 질투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1]라고 제기하셨다. 질투심을 제거하는 문제가 특별히 중요하다. 나는 자신에게 반드시 질투심을 제거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수련성취할 수 없다고 요구한다. 수련생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진심으로 기뻐해주어야지 왜 자신에게 이런 좋은 일이 생기지 않았냐며 마음속이 평형을 이루지 못하면 안 된다. 다른 수련생에게 있는 것이 자신에게 없는 것은 그 수련생이 덕이 있거나 수련을 잘해서이다. 기분 나빠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자신의 심태를 바르게 놓아 질투심리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우리는 대법제자이다. 질투심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자신이 더욱 깨끗하고, 순결해 지고, 대법 진(眞)ㆍ선(善)ㆍ인(忍) 특성과 한 데 더욱 잘 융합된다. 그래야 진정하게 ‘무사무아, 선타후아’를 해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사는 불가능하고 무아는 더욱 불가능하다. 질투심을 제거하는 것은 대법제자 수련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반드시 시시각각 그것을 배척하고 제거해야, 수련이 빠른 속도로 제고하고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더는 위사위아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선타후아가 되고 직지인심으로 가서 수련할 것인데 그러면 아주 빨리 제고할 것이다.

2. 인터넷에 대한 집착을 제거

법회에 참가하기 전 한동안 나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심지어 NTD, 대기원에서 속인 드라마를 보고, 속인 뉴스에 집착했으며, 아이패드 게임을 이틀간 했다. 나는 이 일체가 법회에 갔다 오면 철저히 제거될 것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자신을 그렇게 방임했다.

“현재의 컴퓨터 게임은 모두 외계인들이 사람을 통제하여 만든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만들었다고 여기는데, 내가 방금 말했듯이, 사람의 사상은, 당신이 만들어내려고 하는 그 물건의 사상적 내원이 어디에 있는지, 당신은 모른다. 당신의 층층 사상이 어떻게 사고하는지, 외래 사상이 당신에게 어떻게 주입됐는지, 이 과정을 당신은 전혀 모른다. 당신은 다만 표면에서 반영되어 나온 것만 알뿐이다. 그러므로 인류에 대해, 이런 물건은 모두 해독을 끼치는 것이며, 사람을 사람이 아닌 상태 속으로 끌고 가고 있다.”[1]

법회에서 돌아온 후 나는 더는 인터넷을 쓰지 않았다. NTD, 대기원, 페이스북을 포함해서다. 시간이 충분했고, 충분한 시간을 더 많이 수련에 쓸 수 있어 나의 마음은 자연히 청정하게 되었다.

지금은 자신을 억제해서 인터넷을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집착하는 마음이 적어지고 청정심이 많아져, 조용해질 수 있으며, 들뜨지 않고 더욱 가라앉았다.

3. 법공부를 강화하고 ‘해체당문화’를 공부

법회에서 돌아온 후 RTC 환경 법공부를 강화했다. 법공부 시간을 고정시켜, 매일 수련생들과 함께 공부했다. 단체 법공부 환경이 생겨 나에게 큰 도움이 됐다. 예전에 시간이 있으면 공부하고 없으면 일이 바쁘다며 하다말다하던 상태가 개변되었다. 인터넷을 내려놓은 후 나는 더 많은 시간 법공부를 할 수 있었고 마음이 예전보다 조용해졌다.

나는 ‘해체당문화’도 한번 진지하게 들었다. 자신이 아직 많은 면에서 당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당문화는 수련에 너무 큰 장애를 조성했다. 자신이 더욱 잘 더욱 빨리 대법에 동화하는 것을 막고 있었고, 많은 집착심을 제거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으며, 수련생들이 더욱 잘 정체를 형성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당문화는 대륙에서 나온 수련생에게는 거의 다 있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당문화를 해체하면 후천적인 변이된 사상과 극단적인 문제 처리방식도 많이 제거할 수 있다.

4. 일에 부딪히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모순중에서 잘잘못을 논하지 않다

그날 욕설에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것은 그날 낮에 법공부를 하다가 ‘파룬궁’에서 이 단락을 보았기 때문이다. 법공부를 했기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고 그냥 웃으면서 넘길 수 있었다.

그후 연이어 수련생이 전화로 질책했어도 나는 진정으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나를 도와 제고시켜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해 했다. 내가 그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모순 중에서 모순을 보지 않고, 밖에 있었기 때문에 모순은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수련생의 원망도 나를 다치게 하지 못했고 나에게 닿지 못했다. 나는 이 일이 왜 나한테서 일어났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으로 찾아,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변화시켰고, 고생스럽다는 느낌이 없이 홀가분하게 제고되어 올라왔다.

“나는 늘 속인의 마음이 나를 움직일 수 없다고 말했는데, 누가 나에게 좋은 말을 한마디 한다고 해서 나는 기뻐하지 않고, 누가 나를 나쁘다고 욕한다 해도 나는 역시 화를 내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 속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심한 心性(씬씽) 교란도 내게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 연공인은 얻은 일체의 이익을 아주 담담하게 보고, 무엇이나 모두 마음에 두지 않을 때에만 도를 깨닫는 그 마음이 비로소 성숙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명리(名利)에 대해서 억지로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명리나 지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때, 당신은 번뇌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으며, 영원히 심리적 평형을 유지할 수 있다. 무엇이나 다 버릴 수 있다면 자연히 청정해질 것이다.”[2]

사부님의 설법을 통해 나는 이해했다. 수련은 어떤 일에 부딪혀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모든 일체를 담담하게 보면, 누구도 우리를 어찌하지 못한다. 일부 난은 구세력이 강제로 가한 교란이다. 목적은 대법제자 사이에 간격을 조성하고 법실증 항목을 파괴하기 위해서다. 사부님은 장계취계로 대법제자를 제고시키신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 중에서 우리는 어떻게 제고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상대 수련생과 같이 각기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고 양보하지 말아야 하는가? 나는 우선 마음을 움직이지 말고 시비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세력은 이 사람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법에 있으며, 아예 그에게 닿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 교란하지 못하고 가버릴 것이다.

‘부동심(不动心)’ 이 세 글자는 아주 간단하나 매우 풍부한 내포를 가지고 있다. 진정으로 해내어야 그 뒷면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5. 안으로 찾아 수련할 줄 알게 되다

일에 부딪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첫걸음일 뿐이다. 그 다음은 안으로 찾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내가 이 일에 부딪혔는가? 왜 그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대하는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나타났을 것이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무슨 마음이 초래한 것인가? 어디에서 잘못했는가? 이런 것은 모두 자신 마음의 뿌리를 캐는 것이다. 지금 나는 되돌아서 문제를 보는 것을 배웠다. 자신을 먼저 캐내고 다시 다른 사람을 본다. 그 수련생은 무슨 마음이 있어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 전에는 자신만 찾고 상대 수련생의 집착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자신의 문제도 찾고 상대도 어디에 잘못되었는지 찾는다. 한걸음 더 생각해서 상대의 집착을 보고 자신도 이런 문제에서 집착이 생기지 않게 주의한다. 기회가 되면 상대의 받아들이는 상황에 따라 선의적으로 지적해 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사부님께서 하신 수련은 안으로 찾고, 무슨 일에 부딪혀도 안으로 찾고, 다른 사람의 일에서도 안으로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 정말로 수련의 법보이다. 이렇게 하면 수련 중의 모든 것이 간단하게 변한다. 이렇게 해야만 짧은 수련시간 내에 더 많은 수련 기회, 집착심을 내려놓는 기회가 있다. 이런 기회와 인연은 완전히 자신이 어떻게 장악하는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시스템이다. 습득했다면 더욱 총명하고 지혜로워 로켓을 타고 위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수련인 중에 많은 사람이 안으로 찾을 줄 모른다. 그래서 수련하기가 고생스럽고 힘들며 어렵다. 안으로 찾는 것을 배우면 수련에서 많은 때에 행복하고 홀가분한 느낌이 들 것이다.

6. 입체적으로 사람을 보면 포용할 수 있다

“문제를 봄에 그는 총체적으로 보고, 입체적으로 보나, 사람은 단지 표면상에서 본다. 어떤 때 대법제자가 내 곁에 있으면, 당신의 일사일념, 당신의 표현에 대해, 나는 아예 당신의 표면, 당신의 행위를 보지 않고, 나는 당신의 진정한 그 동기를 보며, 나는 당신의 진정한 사상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본다. 이 과정 중에서, 표면상 표현되어 나오는 것, 비록 그것이 당신의 행위이고 당신이 책임져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의 근본을 본다.”[1] 속인은 수련인을 이해할 수 없다. 수련인도 종종 수련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부님은 입체적으로 우리를 본다. 우리도 자신과 타인을 입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다른 수련인을 대하는 면에서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포용하고 도량이 있어야 하며 주위에서 일어나는 형형색색의 번거로움, 모순, 마난을 지혜롭게 풀어나가고, 일체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변화시킨다. 이런 모순을 이용해 모순 자체에서 벗어나 안으로 찾고, 다른 사람이 어려운 것을 보거나 각종 집착심에 빠져 있는 걸 보면, 그 사람은 그렇게 해도 나는 그러지 말자고 하며, 이 방면에서 수련할 기회를 자신에게 준다. 생각하는 것을 놓치면 한번 제고하고 수련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전제 조건은 타인을 입체적으로 보아야지 눈을 다른 수련인의 부족한 점에 두어서는 안 된다. 잠시 제고해 올라가지 못한 것이지 그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 없고, 타인의 집착과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을 구하는 면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일종의 대지혜이다. 그것은 일종의 선과 관용, 자비심이기 때문이다. 이 자비심이 있으면 중생이 모두 아름답게 보이고, 모두 진상을 들으러 왔다고 보이며, 모두 대법과 인연을 맺기 위해 왔다고 보인다. 타인을 이해해야 한다. 속인이 잘못했거나 부족한 점이 있거나 변이되었어도 말이다. 중생이 구도되는 것은 우리의 제고 때문이다. 우리가 제고되면 중생이 구도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우리와 접촉하도록 배치된다. 사람 중에 표현되면 우연히 우리를 만나 진상을 받아들이거나, 다른 사람에게 진상하는 내용을 옆에서 듣게 되어 삼퇴를 하는 등등 형식이다. 그들도 예전에는 위대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고되어야 그들에게 닿을 수 있고 그들이 구도될 수 있다. 우리가 제고되지 않으면 위덕이 없고, 진상을 잘 알리지 못하게 표현되기도 하여 상대를 구하지 못한다.

우리가 수련에서 큰 돌파가 있으면, 사람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된다. 어려워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데 우리의 마음이 견정하기 때문이다.

7. 수련생의 교류를 들으며 자신의 수련을 돌이켜보다

이번 뉴욕법회에서 ‘대법의 홍대함·원용과 엄격함을 체험하다’ 교류문장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돌아온 후 다시 읽어보았다. 나는 최상의 관정을 느꼈다. 그 수련생은 극단으로 가지 않으면서 모든 일을 조리있게 잘 해냈다. 아무것도 빠트리지 않고 무엇이든 다 잘 해냈다. 그 수련생은 착실한 수련기초와 명석한 법리 이해가 있기에 법에 서있는 결과가 나타났다.

사부님께서는 이번 뉴욕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법정인간(法正人間)으로 넘어가고 있다.”[1] 나는 정법시기가 곧 끝나고 이미 최후의 최후로 접어들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전력으로 돌진해 나가야 한다고 여겨진다.

나는 일에서 최대한 노력하고 가정에서 최대한 원융하며 수련에서 최대한 노력하여 제고하고, 생활에서의 크고 작은 일을 성실하게 대하고, 시간에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며, 수련인의 모습으로 일체를 잘해야겠다고 다짐한다.

8. 사람 구하는 새로운 환경을 열다

법회가 끝나고 현지로 돌아온 첫날, 갱신된 출근 카드가 도착했다. 법회에 가기 전에 면접 본 관광지 부근의 그 영업직에 통과한 것이다. 이 일은 관광지와 가까워 더 많은 시간을 이용해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영어를 잘 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서양인과 함께 하는 이 일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

이 영업일은 시작한 후 매일 5시간 가량을 서 있어야 하는데 며칠 후 완전히 적응했다. 비록 속인의 일이긴 하지만 내가 관광지에서 서서 진상을 알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아주 피곤한 느낌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오전 2시간만 서 있어도 힘들었는데 속인의 이 일을 통해 완전히 돌파했다.

지금 나는 운전해서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관광지에 간다. 진상을 2시간 알리고 점심에 휴식을 좀 하고 출근하러 간다. 5시간 가량을 서서 일하고 퇴근하면 다시 관광지에서 진상을 알리고 영문 전단지를 배포한다. 끝나면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가는 길에서도 인연있는 사람에게 진상을 알린다.

예전에는 오전에 진상을 마치면 수련생의 차를 타고 금방 집에가서 쉴 수 있어 좋았다. 지금은 지하철과 버스를 타며 더 많은 사람을 접촉한다. 나의 존재는 중생을 위해서 온 것이다. 대법과 인연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전에는 중국인에게 진상을 많이 알렸지만 지금은 서양인에게도 관심을 많이 가진다. 어차피 이 나라에 왔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지하철에 문신을 한 사람과 떠도는 사람이 많아 그들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 마음이 없다. 중생을 보니 그들이 매우 고생스럽고 쉽지 않다는게 느껴졌다. 그들은 대법의 구도를 기다리고 있다. 대법제자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많은 것을 감당하고 있다. 내가 사람을 구하느라 마음을 쓸 때 중생은 나에게 많은 기쁨을 주었다. 한 떠도는 사람에게 전단지를 주었는데 그는 가더니 차 두 봉지를 갖다주었다. 또 다른 이에게 전단지를 주니 그는 방금 전 잎으로 접은 초록꽃을 나에게 주며, 전단지에 대한 답례라고 했다. 나는 그 꽃을 반시간 지나 끝내 진상을 알아들은 대륙 여행객에게 주었다. 그녀는 아주 좋아하며 꽃을 들고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뜻밖에도 10분 후 한 수련생이 우담바라가 핀 나뭇가지를 나에게 주었다. 공교롭게도 이틀 전 다 쓴 화장품병을 깨끗이 씻어 꽃병으로 쓰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제대로 쓰였다.

이런 사소한 일들에서 나는 사부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을 느겼다. 이런 것은 모두 사부님께서 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사부님께서도 이런 것을 이용해 나의 관념을 타파해 주고 계신다. 중생을 보는 데는 지금 그들이 어떤 모양인지, 누구인지를 보지 않고 진정으로 자비롭게 한 생명의 전체를 본다. 그들은 휘황한 과거가 있고 예전에는 그렇게 높은 생명이었으며, 사부님 앞에 무릎 꿇고 서약을 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세상에 내려가 대법의 복음을 얻을 수 있다면 장애인, 떠돌이라도 나는 기꺼이 전생하겠다고. 그러므로 나는 중생의 고통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관념과 편견을 완전히 던져버리게 되었다. 중생의 행복은 곧 우리의 행복이고 중생의 고난 역시 우리의 고난이다.

9. 맺음말

나는 해외 여행지에서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며 우리는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서 왔다고 늘 자신에게 암시한다. 사람 속에서 우리는 겉보기에는 일반인 같지만 우리 마음속은 비할 바 없이 고상하고 빼어나다. 세인은 우리의 제고로 구도될 것이고 사부님도 우리를 더욱 높게 올려주어 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사명을 완수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대법제자 중에서 법공부를 하지만 진정으로 법을 얻은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대법제자 속에 있는 것만 아니라 법속에 있어야만 우리는 대법에 속하고 비로소 진정한 대법제자이다.

대법은 원용, 엄격, 자비, 위엄, 위대하다. 대법에 동화하는 것은 우리의 본질이다. 중생을 구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사부님의 정법을 돕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미래의 길이 얼마나 길든 수련생들과 함께 동행하여 조사정법의 길을 같이 가기를 희망한다……

이것은 최근의 일부 생각으로, 부족한 점이 있으면 자비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대법홍전 25주년 뉴욕법회 설법’[2]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法輪功(파룬궁)-제3장 心性(씬씽)수련’

원문발표: 2017년 6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6/16/3497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