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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법륜’을 배운 후 느낀 점

글/ 해외 대법제자 샤오저우(小舟)

[밍후이왕] 모두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인데 우리가 약간의 법 내포를 알아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어렵게 표현했어도 단지 표면만 말한 셈이고 법의 내포를 말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수영을 아는 사람이 수영을 모르는 사람에 수영 방법을 설명할 때 어떻게 설명해도 수영을 모르는 사람이 설명만 듣고 수영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수영의 기능은 반드시 실천 속에서 배워야 하며 타인의 해석은 조금 도움이 되어도 수영 기능 그 자체가 아니다. 이 예는 그리 적절하지 않으며 단지 아래 이야기하려는 심득을 설명하려 할 뿐이다. 진정으로 법에서 제고하려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이전에 법공부 때는 마치 법을 배운 적이 없는 것처럼 갑자기 한 점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전법륜’ 제1강 전체가 거의 새로운 내용을 보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어떻게 진상을 알리고 어떻게 중국인에게 ‘삼퇴’를 하는, 법 배후 새로운 내포가 일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런 새로운 내포는 스스로 의식적으로 생각한 것도 아니고 글자를 파고들어 본 것이 아니고 법이 자동적으로 내 눈앞에 펼쳐준 것이다. 내가 법을 읽는 과정에서 법이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나타난 것이다.

몇 가지를 예를 들겠다. 내가 “나는 법(法)을 전하고 공(功)을 전하는 모든 과정 중에서, 사회에 대해 책임지고 수련생에 대해 책임짐에 따라”[1]를 읽었을 때 우리가 중생에 진상을 알리고 ‘삼퇴’ 과정에서 우리도 중생에 책임져야 하고 법에 입각해 법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좋은 것은 남기고 나쁜 것은 제거해 버림”[1]을 읽을 때 우리가 진상을 알릴 때 마찬가지로 중생의 선념을 불러일으키고 사당 독해를 제거해야 하고 중생의 나쁜 관념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또 “물론 우리는 연분(緣份)을 중시하는데, 여러분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도 연분이다.”[1]를 읽었을 때 우리가 만나는 중생은 모두 우리와 인연이 있고 우리가 구도되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부동(不同)한 층차(層次)에는 부동한 층차의 법이 있다.”[1]를 읽었을 때 우리는 서로 다른 중생 그 개체 상황에 따라 그들 마음의 매듭을 타파해야 하고, 자아가 형성된 관념으로 공식처럼 다른 중생에 씌우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진상을 알리는 데 효과가 좋지 않고 반면 자신의 울타리에 빠져 나오지 못한다. 예는 많고 하나뿐이 아니다. 그런 세밀한 부분은 더 말하지 않겠다.

또 깊은 예를 들어 보겠다. 내가 “기공(氣功)은 사전문화(史前文化)다.”[1] 부분을 배울 때 사부님께서 ‘2억 6천만 년 전의 삼엽충(三葉蟲)’, ‘3만 년 전의 망원경’, ‘20억 년 전의 대형 핵 반응로’ 등 사전(史前) 문화의 예를 열거하셨다. 이전에 나는 이 한 점은 알았다. 사부님께서 이런 예로 우리 낡은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우리의 용량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갑자기 이런 열거 방법은 중생에 진상을 알리는데 사용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 사례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열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열거하는 방법은 수련생 사이 교류에도 사용할 수 있고 심지어 일상생활에서의 교류도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사당이 사악하다는 것을 말할 때 단지 일부 결론적인 말과 개괄적이고 추상적인 말을 하면 사람을 강요하는 느낌을 줘 효과가 그리 좋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전에 나도 일부 예를 들었다. 예를 들면 ‘문화대혁명’에서 ‘6.4 천안문 학생 대학살’을 말하고 또 사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일을 말한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그리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진상을 알릴 때 예를 들 때 마음이 조급하고 빨리 말해 끝내려 한다. 자신이 표현하려는 결론에 늘 약간의 강조를 하려 한다. 심지어 좀 강요한다. 그러면 자연히 어투가 순정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일정한 목적을 품고 있다. 때로 이 점을 의식해도 이런 목적심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나는 알게 됐다. 사람을 구하는 소원은 필요하지만 목적심은 필요 없다. 만약 열거한 방법으로 중생 스스로 우리가 표현하려는 이치를 알게 인도해 주면 진상을 알리는 효과는 아주 좋을 것이다. 물론 진상을 알리는 내용에서 큰 차이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투에서 마음 씀씀이에서 다르다. 왜냐하면 기점이 ‘위타(爲他)’이기 때문이다.

더 높게 말하면 마음속으로 늘 ‘위타’를 생각하면 그것은 ‘선’을 수련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하고 적합한 예를 찾을 때 혹시 ‘진(眞)’을 수련하는 요소가 안에 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상황에 부딪혀도 우리는 교만함과 성급함을 경계하며 참을성 있게 상세하게 진상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아마 ‘인(忍)’을 수련하는 것이다. 예에서 예를 열거하는 방법, 예를 열거하는 방법에서 ‘위타’의 기점, 최종 ‘진(眞)·선(善)·인(忍)’으로 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복잡한데서 간단한데로, 유형에서 무형으로, 실(實)에서 허(虛)의 과정이며 우리가 착실히 수련하고 도를 깨닫는 과정이다.

중생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때로 시간이 긴박해 방법이 없어 상세히 말할 수 없기에 일부 수련생은 급히 중생에게 말한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기억하세요.” 하지만 간혹 사람의 반감을 일으켜 한 마디 내던지게 한다. “왜 그것을 기억해야 하나요?” 나도 이런 상황을 만날 때 통상 이렇게 말했다.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때로 어떤 사람은 그리 받아들이지 않고 나에게 한 마디 던진다. “전 몰라요!” 지금 나는 이렇게 바꾸려 한다. “파룬궁은 질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본래 태도가 좋지 않았던 사람은 혹시 말할 것이다. “정말인가요?” 사실 이 과정에서 예를 드는 방법과 비슷하다. 추상적인 이치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물건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결국 ‘위타’하는 기점에 서서 말하는 것이다.

다시 법공부로 돌아가자. ‘전법륜’에서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극히 높은 곳에 이르러 말한다면,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왜냐하면 법은 마치 피라미드 모양과도 같기 때문이다.”[1] 여기까지 배운 후 단번에 피라미드의 법리를 깨닫게 됐다. 어떤 뜻인가? 전에 ‘피라미드’는 단지 하나의 비유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단지 비유가 아니라 그 형상은 진실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전법륜’은 가장 낮은 사람이 되는 이치부터 말했다. 그러면 가장 높은 법리는 ‘진선인’이다. 우리는 법공부를 할 때 가장 낮은 데서부터 가장 높은 중간 부분을 철저히 잘 배워야 하고 통과해야 한다. 그러면 실제 문제에 부딪혀도 더욱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 나는 단지 ‘전법륜’을 외우면 법을 잘 배웠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을 외웠어도 단지 법의 표면을 외운 것이고 배후의 층층의 내포를 알지 못하면 아직 그만이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예를 드는 방법에 대한 이해는 표면에서 파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법을 외우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니고 법을 외우는 것은 아주 좋은 법공부 방법이다. 관건은 아직 마음을 조용히 하고 도를 깨우치는 것이다.

법공부에서 느낀 점은 많지만 여기까지 쓰고 적절하지 않는 점은 자비로 지적해주시기를 바란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7년 7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7/3/3505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