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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아들의 수난 중 나는 수련으로 들어섰다

/ 산시 대법제자 양광(陽光)

[밍후이왕](경축 5.13 특집원고)

1. 아들의 수난 중 나는 대법을 알게 됐다

나는 올해 57세이며 산시(山西)성 농촌에 살고 있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몸이 안 좋아 늘 설사하여 몹시 말랐다. 2000년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막 사업에 참가하자 곧 파룬따파에 접촉했고 그는 좋다고 생각되어 연마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 더는 설사를 하지 않게 됐고 신체도 좋아졌다.

아들은 집에 돌아와 우리에게 말했다. “파룬궁은 정말 좋아요,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해 신체가 건강하고 도덕이 승화되게 해요. 장쩌민이 몹시 나빠서 좋은 사람을 박해하고, 분신자살 사건을 조작해 사람에게 배우지 못하게 해요.” 남편은 듣자마자 화를 냈다. “너 나라와 맞설 작정이냐!” 아들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계속 배우려 했다. 그러면서 몰래 나에게 말했다. “이 공법은 정말 좋아요, 더욱이 신체에 좋아요, 내가 엄마한테 녹음기를 드릴 테니 집에서 사부님 설법을 들으세요. 내가 연공을 가르쳐 드릴 테니 아빠가 알게 해서는 안 돼요. 두려워하지는 마세요.” 내가 말했다. “좋아, 네 아빠만 모르면 다 되는 거야.” 그리하여 나는 법을 듣고 연마했다.

아들은 일하는 한편 홍법을 했다. 하지만 내가 아직 설법을 한 번 다 듣기 전에, 5장 공법을 아직 다 익히기 전에 아들은 파룬궁을 연마한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다. 그는 집에서 해고당했다는 것을 모르게 하려고 말로는 그 일자리가 좋지 않아서 장래가 없으므로 좀 큰 도시에 가서 더욱 좋은 일자리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딸이 대학을 다니는 도시에 가서 다른 일자리를 찾았으나 늘 오래 하지 못하고 소란을 받고는 2, 3일이 안 되어 해고를 당했다. 우리 동네에서는 어디서 얻어들은 소문인지 내 아들이 파룬궁을 연마해 해고를 당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화가 나서 전화로 아들에게 돌아오라고 했으나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이 돌아온 후 남편은 문을 걸어 닫고 집안에서 아주 굵은 스프링으로 그를 때렸다. 나는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아들의 등은 맞아서 크게 부었고, 살갗이 찢기고 피가 흥건해 오랫동안 침대에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었고 아파서 잠들 수 없었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공부하면서 아무런 고생도 해보지 못한 아이가 어찌 이런 지독한 매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속담에 호랑이도 제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렇게 자기 자식을 때리다니, 이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도 잔인한가! 이는 나에게 아주 큰 충격을 주었다. 그 때 나는 파룬궁이 아주 좋으며 모두 장쩌민이 너무 나빠서 좋은 사람을 박해하기 때문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감히 파룬궁을 연마하지 못했다. 그 후의 몇 달 동안 아들은 줄곧 집에 갇혔고 나가지 못하게 했다. 나도 수련하지 못하도록 강요당했다.

2003사스가 소란을 피울 때, 딸이 갑자기 위출혈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고 퇴원을 하고서도 여전히 몸이 회복되지 않아 늘 약을 먹었다. 2004년 어느 날 우리 집 친척이 경찰이 아들을 찾는다면서 어서 아들을 숨기라고 나에게 알려줬다. 남편은 화가 나서 말했다. “숨기는 뭘 숨어, 공산당이 그를 키워줬는데 공산당과 맞서다니. 그 녀석을 직접 잡아가야겠어, 당에서 그를 잘 교육하게 말이야.” 나는 아들이 돌아올까 몹시 걱정했다.

나중에 딸의 말에 따르면, 아들 거처에서 두 남매가 함께 밥을 먹을 때 아들이 현지에서 알게 됐다는 이른 바 한 친구가 그에게 물건을 주었는데 열어보니 파룬궁의 책이었다. 동시에 갑자기 한 무리 사복 경찰이 곤봉을 들고 뛰어 들자 곧바로 아들을 붙잡았고 그 친구는 문으로 재빨리 빠져 나갔다. 잇따라 그들은 모두 연행됐다. 딸은 돌아와서 우리를 위안했다. 말로는 오빠가 위법되는 일을 하지 않았고 경찰도 무슨 큰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며칠 후면 나올 거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렇지 않았다. 아들은 재빨리 구치소로 납치돼 일주일 갇혀 있었고, 잇따라 이상야릇하게 우리는 아들의 1년 징역 판결서를 받았다. 나는 그때 하늘이 다 뿌옇게 된 것 같았다. 내 이 아들딸은 왜 모두 이렇게 팔자가 사나울까!

나는 남편과 함께 외지에 있는 노동교양소로 찾아갔더니 아들은 얼굴이 퍼렇게 멍들고 부어서 알아볼 수 없었으며 걸음도 바로 걷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심한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듯 괴로웠다. 이러했지만 남편은 그에게 호되게 뺨을 한 대 후려갈겼다그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대더니 그 자리에서 까무러쳐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이러한 압력을 감당할 수 없었고 거기에다 남편의 강렬한 반대로 나도 더는 파룬궁 설법을 들을 경황이 없었다. 딸은 경찰이 집을 수색할까 봐 나에게 책을 모두 숨겨 놓으라고 했다. 나는 처마 밑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사부님의 설법 책과 테이프를 여러 층으로 꽁꽁 싸서 파묻었다. 그때로부터 우리 집은 파출소 사람이 와서 늘 소란을 피워 무사한 날이 없었다.

1년 후 아들은 석방돼 돌아왔고 말하기 싫어했다. 우리는 모두 그가 틀림없이 연공을 포기한 줄로 여겼다. 모두들 이전의 일을 언급하는 것을 삼갔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들은 더욱 먼 곳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비록 앞에서처럼 그렇게 가슴 아픈 일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경찰은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와 소란을 피워 우리는 여전히 몹시 긴장한 나날을 보냈다.

2008, 경찰은 또 우리 집에 달려와서 하는 말이 밖은 안전하지 못하니 그들이 아들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남편에게 아들을 찾아다 그들에게 보여 달라고 했다. 남편은 그 말을 정말로 여기고 말했다. “우리도 나쁜 일을 하지 않았고, 경찰도 우리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니 아이더러 돌아오라고 해서 상급에 명확한 태도를 보여줘야겠어.” 그는 온종일 아들을 찾아올 궁리만 해 딸, 아들의 친구, 학우들을 모두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들과 연락을 취할 수 없었다.

2009, 아들은 예쁜 여자를 데리고 와 마음에 드냐고 물으면서 결혼하겠다고 했다. 나와 남편은 몹시 기뻐서 끝내는 가정을 꾸린 사람이 됐고, 앞으로 더는 무슨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결혼식 준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내 신체는 갈수록 못해져 괴롭기 그지없었다. 남편은 날마다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다녔다. 가장 고통스런 것은 자궁 근종으로 인한 계속적인 출혈로 빈혈이 야기된 것이다. 반드시 서둘러 수술해야 했다. 바로 병원에 입원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아들은 전화로 아내가 해산을 하게 됐으니 나에게 가서 도와달라고 했다. 며느리를 보살펴 주는 것은 나의 책임이니 안 갈 수 없었다. 다른 것은 상관하지 않고 차표를 끊고 며느리를 보살피러 외지로 떠났다.

마침 사돈댁도 와 있었다. 이때에야 나는 아들이 수련을 여태껏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며느리 친정은 온 가족이 죄다 수련인이어서 그들은 날마다 함께 연공하고 저녁이면 법공부를 했다. 며느리는 성격이 아주 좋았고 몹시 말랐지만 몸은 아주 건강하고 노인을 존중하고 어린이를 귀여워했다. 사돈댁도 무척 열정적이고 늘 나에게 파룬궁을 배우라고 했다. 하지만 아들이 박해당한 일이 늘 검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녀 수련에 들어서지 못했다. 이 과정이 1년 남짓 계속된 후에야 서서히 들어섰지만 아들에게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날마다 사돈댁을 따라 몰래 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십 년이나 나를 괴롭히던 불면증, 신경성 두통, 만성 위장염, 무릎 관절통 등 크고 작은 병들이 저도 모르게 사라졌다. 파룬궁의 치유 효과는 정말 좋았다! 나는 너무 기뻐서 아들에게 알려주었다. “나도 파룬궁을 연마한단다!” 아들은 몹시 기뻐했다. 늘 우리 4,5명이 단체 연공을 하면 아이는 중간에서 놀았다. 온 가족은 아주 화목했고 고부 사이도 얼굴을 붉혀본 적이 지금껏 없었다. 이건 너무도 좋았다. 지금껏 우리 누구나 앓아본 적이 없다.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자비하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나를 구해 주신데 대해 감사를 드린다.

딸의 득법, 모녀가 함께 정진

신체가 좋아지고 대법이 좋다는 것도 나는 알지만 나는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신기한 공법을 왜 정부는 반대할까? 게다가 박해가 이렇듯 심각한가? 사부님께서는 그렇듯 자비롭고, 그렇듯 신통광대 하신데 왜 제자들은 여전히 고생을 겪어야 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까지 하는가? 아들은 어려서부터 선량하고 양심에 꺼리는 일은 하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피해를 당해 이렇게 고생하는가? 며느리도 지식인이고 수련 시간이 길며 아는 것도 많았다. 나는 이런 문제를 지니고 며느리에게 가르침을 바랐다. 그녀는 아주 인내심 있게 나에게 많은 진상을 말해 주었고, 나를 데리고 사부님의 각지 설법을 공부했으며, 또 나에게 ‘9평공산당을 보여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이번 박해의 원인은 간단하게 사람이 사람에 대한 박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며느리에게 나를 도와 성명을 발표해 달라고 했다. 이전에 대법에 대한 의심과 바르지 못했던 생각, 언행을 죄다 폐기한다고 했다.

어느 때인가 한 번은 내 팔이 몹시 아파 거의 들 수 없는 정도여서 연공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가부좌를 견지했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몹시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아파서 온 밤 자지 못하자 사돈댁은 깜짝 놀랐다. “아들이 돌아오면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진해 볼까요?” 내가 말했다. “급해 말아요, 더 참아봅시다.” 이 말을 막 마치자 통증이 즉각 많이 줄어들었고 서서히 내 팔은 또 들어 올릴 수 있었는데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 같았다. 대법은 너무도 신기했다. 이 몇 년을 회상해 보면 나는 앓아본 적이 없고 약 한 알 먹지 않아도 신체는 아주 튼튼했는데 모두 사부님께서 하사해주신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자비하시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오성이 매우 나빠서 지금까지도 다 아들이 박해당한 검은 그림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그다지 정진하지 못하고 있으며, 나가서 대법진상 자료 배포나 진상 알리기는 더욱 못하고 있다. 딸은 2003년부터 위출혈이 시작됐다. 10여년이 지나자 그녀도 의사가 됐으나 온 몸은 병투성이였다. 그녀는 늘 현대의학은 병을 치료하지 못한다고 비웃으며 자신은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면서 의사도 제 병을 못 치료해따위의 말을 했다. 대법을 말하면 그녀는 언제나 언급하지 못하게 하면서 참여도 평가도 안 하는 상태에 있었다. 나는 그녀가 노동교양을 당한 오빠의 일로 받은 상처가 몹시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14년 설날, 딸이 아들 집으로 와서 우리와 함께 설을 쇘다. 음력 초 이튿날, 딸은 학우 집에 갔다가 돌아와서 올케에게 말했다. “학우에게서 들으니 그녀 고모가 파룬궁을 연마해 간암을 치료했다고 해요, 파룬궁이 간암도 다 치료할 수 있다는데 제 이 병은 파룬궁으로 말하면 식은 죽 먹기겠네요. 그렇지 않나요?” 그녀 올케는 놀랍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제가 가르쳐 드릴 테니 먼저 해보세요.” 딸은 포륜을 하자마자 온 몸이 뜨거워졌고 손에서 파룬이 돌았다. 이틀 후, 그녀는 다른 성으로 출근하러 갔다. 나는 아들, 며느리와 토론하고서 사돈댁과 함께 딸의 그곳으로 가서 신수련생이 된 딸과 함께 법공부와 연공을 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대학에 갔다. 그녀는 다 다려놓은 한약을 보면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온 몸이 아주 편안해요, 그래도 이 약을 내가 먹어야 하나 안 먹어야 하나요?” 내가 말했다. “너 마음대로 하려무나, 어떻게 해도 다 되니까.” 그녀가 말했다. “제 이 약은 돈으로 사온 것이고 또 마음을 다 해 다린 것인데 먹지 않으면 낭비예요.” 그리고는 단숨에 마셔버렸다. 이후에 그녀는 날마다 퇴근하면 우리와 함께 법공부와 연공을 하느라고 약을 다려먹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리고는 격동되어 그냥 눈물을 훔치면서 이 대법이 너무 좋기에 더 많이 연공하고 더 많이 법공부 할 수 있는지 물었다. 당시 나는 법공부가 많지 않고 깨달음이 좋지 않아 이만하면 되고, 연공은 하루 한 번하면 되며, 시간이 있으면 더 많이 법 공부해도 된다고 했다.

우리가 이곳에 온 며칠 동안 그녀는 날마다 감기로 콧물을 흘리지 않으면 설사를 했고, 허리에는 접시만큼 큰 포진이 돋았으며, 이틀이나 혈뇨를 보았다. 하지만 모두 그리 괴롭지 않고 반대로 아주 편안하고 아주 즐거웠다. 나는 그녀 몸에서의 신기한 변화를 보고 마음속으로 몹시 격동됐다. 주말에 나는 그녀가 방을 정리하면서 한약 두 봉투와 양약 한 박스를 정리해 낸 것을 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사부님께서 저에게 신체를 정화해 주셔서 이젠 병이 없어요, 이런 약을 나는 버리겠어요. 양약은 직장에 가져다가 누가 필요하면 주겠어요.”

두 달 후, 내가 다시 딸을 보러 갔을 때 딸은 자꾸 말했다. “왜 좀 더 일찍 나에게 진상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왜 좀 더 일찍 파룬따파는 좋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어요? 무엇 때문에 이걸 배우면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이렇게 좋은 공법이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는데도 보고도 알지 못했으니 이렇게 여러 해 동안 고생했지 뭐야.” 내가 말했다. “아이고, 네 엄마가 우둔하고 수련을 잘하지 못한 탓이야, 네가 언급도 못하게 하니 나도 감히 말을 못했지 뭐야. 마땅히 방식을 고쳐 대법의 아름다움을 너에게 알려야 했어.” 그녀는 나에게 어떻게 해야 사부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고, 사부님께서는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물었다. 나는 사부님께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우리가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이 바로 사부님께 보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는 이미 직장에서 홍법을 했다면서 한 환자가 신수련생이 되게 했다고 했다. 그 신 수련생은 아주 잘해서 스스로 소모품을 사서 ‘9과 진상 자료를 만들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틈만 있으면 함께 나가서 배포한다고 했다. 법공부 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 스스로 전법륜을 만들어 신수련생에게 제공한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법 노정을 따라가고 진상을 알려 사람을 많이 구하라고 하셨어요. ‘9을 아직 볼 사이가 없었지만 이런 것은 모두 사람을 구하는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먼저 배포부터 하고 다시 봐요.” 그녀는 또 나를 데리고 낯선 사람에게 대면해 진상을 알렸다.

딸이 이렇게 정진하는 것을 보고 나는 문득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 여러 해 동안, 강대한 두려운 마음은 나를 조심스레 대법에 들어서게 했으니 밖에 나가 자료를 배포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 둘에게 나를 데리고 나가서 자료를 배포하게 하고 나에게 진상책과 전법륜만드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했다. 사람을 구하는 이 한 발자국을 확고하게 내 디딤으로서 나도 정정당당하게 자료를 배포할 것이다.

딸은 아주 방법이 좋았다. 갖가지 가발과 안경을 사서는 늘 가장하고 다녀 나마저 알아볼 수 없었다. 여러 곳에 가서 자료를 배포하는데 감시 카메라가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3. 너도 정진 나도 정진, 협력하니 구원되는 사람은 많아져

아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딸의 정진하는 상태를 그들에게 말했더니 며느리도 몹시 격려를 받았고 모두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 더 우수하다고 감탄했다. 아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이 몇 년 동안 아들은 여동생 때문에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했고, 동생이 법을 얻도록 하는 것은 줄곧 그의 아주 큰 염원이었는데 오늘은 정진할 뿐만 아니라 오성도 좋아서 이렇게 빨리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고 있으니 정말 대단하다면서 이는 우리에게 정진하여 사람을 많이 구하라고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했다. 어느 한 번 사부님 설법을 공부하면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당신은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한다. 중생을 구도하는 이것은 대법제자의 책임이다!”[1]를 보았다. 그렇다, 나는 정법시기에 태어났는데 사람을 구하지 않고서야 어찌 되겠는가? 이건 사부님 말씀을 안 듣는 게 아닌가? 나는 적어도 자료 배포는 나가서 해야 한다.

우리도 설비와 소모품을 샀다. 나는 집에서 밥을 짓고 애를 보며 자료를 복사하고 필요한 대법 책을 만들었다. 애들이 쉬는 날이면 나는 자료 배포를 나갔다. 나는 나가서 사람을 구하는데 이렇게 긴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얼른 발정념을 했더니 재빨리 평온해져 자료 배포도 아주 순조로웠고 두렵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나는 유달리 기뻐서 더욱 더 정신이 나고 기분이 상쾌했으며 신체도 날듯이 가벼웠다.

나는 며느리의 참을성 있는 지도로 자료 복사를 배웠다. 낮에 그들이 출근을 하면 나는 집에서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보면서 자료를 인쇄했다. 주말이면 사돈댁을 불러다 아이를 데리고 아들 며느리와 차를 몰고 함께 나가 진상 자료를 배포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줄곧 이 상태를 유지했다. 평소에 내가 자료를 인쇄하고 주말이면 식구가 함께 나가 자료를 배포하는데 아이는 차 안에서 아주 얌전해 떼를 쓰지 않는다. 우리는 협력을 아주 잘했고 매번 지니고 가는 자료도 갈수록 많아졌다. 나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중대한 책임이며 또한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깊이 느꼈다.

시골에서 살아온 몇 십 년 생활에서 나와 아들의 선량, 열정,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는 온 동네 사람들의 마음에 아주 좋은 인상을 남겼다. 그 몇 년 동안 온 마을 사람들은 내 아들이 박해당한 상황을 다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돌아가도 감히 진상을 알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 몇 해 동안의 수련에서 법공부를 강화하고 온 집 식구의 단체 법공부를 통해 나는 우리 온 집은 시골 마을 사람들이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며, 모두 우리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갈수록 느끼게 됐다.

몇 년 동안, 아들은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어린 시절의 또래 친구들, 친척 친구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알렸다. 2년 동안, 사부님 가지 하에서 나도 대면 진상을 시작했다. 고향에 돌아오기만 하면 연속 그런 어린 자매, 친구와 이웃들을 찾아 그들에게 삼퇴를 시켰다. 사실 나는 말할 줄 잘 모르지만 그들을 만나기만 하면 그저 말이 술술 나와 많은 진상을 알리게 되고, 모르는 사이에 많은 사람을 탈퇴시킨다. 그들이 삼퇴에 동의할 때면 나는 언제나 눈물을 흘린다. 또 하나의 생명이 구원된 것이다. 이 모두는 사부님께서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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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2013년 대뉴욕지역 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7516
문장분류: 수련교류>신수련생마당>대법인연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5/16/3467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