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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찾아 더 깊은 집착심을 제거하다

/ 랴오닝 파룬따파 제자

[밍후이왕] 나는 법을 일찍 얻었다. 그때 나는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수련 과정 중에 많은 일을 법의 요구대로 하려고 애썼지만 법 공부와 연공을 따라가지 못했고 느슨히 했으며 정진하지 못했다. 사실 착실하게 수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2008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좀 나은 수련환경이 되었다. 나는 법을 더 많이 배우기 시작했고 진··(··)의 법리로 자신의 수련을 요구하려 했다. 그러다 2012년에서야 수련 상태에 좀 들어선 것 같았다.

최근 내가 안으로 찾으면서 집착을 제거한 과정 중에서 얻은 약간의 심득 체험을 수련생과 교류하고 토론하여 함께 거울로 삼아보고자 한다.

1. 집착심을 제거하고 이지적으로 수련생과 연구·토론 하는 것을 배우다

대법수련에 들어서서 십몇 년 동안을 사존께서 자비롭게 이끌어주시고 보호해 주심에 많은 고난과 고비를 걸어 지나왔다. 법 공부를 통해 끊임없이 안으로 찾았고 사존께서 늘 나를 점화해주셨다.

최근 나는 법리를 깨달을 때마다 억제하지 못하고 주위 수련생에게 말했는데 말투에는 늘 불안정한 상태가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에게 과시하고, 흥분하여, 침착하지 못한 인상을 주었다. 나 본인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수련생을 위한 것인데 왜 나는 당황해 할까? 수련생의 부족한 점을 보았거나 나의 깨달음을 연구·토론하지 말아야 하는가?

첫째. 나의 수련이 교란 받을까봐 근심하다

일부 수련생의 문장에서 수련생이 의지했던 수련생이거나, 수련 상태가 줄곧 괜찮고 법을 잘 깨달은 수련생이 사악한 구세력에게 빈틈을 보여 박해를 받은 사례를 언급한 내용을 보고 나는 속으로 좀 두려웠다. 내가 이렇게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수련생과 연구·토론하다가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닐까? 이 생각은 구세력이 바라던 것이다. 우리는 사부님의 제자로서 사존께서 대법제자에게 배치한 수련의 길만 승인해야한다. 사악한 구세력은 길 양쪽에 비바람, 가시덤불, 심연, 야수 등을 만들었는데 모두 우리에게 겁을 주는 가상이기 때문에 반드시 제때에 부정해야 한다. 대법제자는 일체이기 때문에 서로 협조하고 포용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 본인 생각이 바르고 마음이 바르며 법의 요구, 사존의 요구에 따라 누락이 없이 수련하면 빈틈을 보이지도 않을 것인즉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구세력의 교란을 두려워할까? 사악한 구세력의 교란을 부정해야 하지만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진정하게 생사를 내려놓는 것이다.

둘째. 수련생을 깔보고 분별하는 마음

나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수련생과 연구·토론하기를 좋아했고 이런 문장을 보는 것도 좋아했다. 층차가 높지 않아 내가 감동을 받을 수 없는 수련생을 만나면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마음,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함을 한스러워하는 마음으로 수련생을 교육하면서 그들이 머리를 쓰려하지 않고 애써 법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며 원망하고 탓했다. 나는 나에게 경고했다. 내가 깨달은 모든 것은 대법이 나에게 준 것이고 수련생과 서로 돕고 공동으로 정진하게 한 것도 사존께서  배치하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존의 제자이고 모두 대법 중의 작은 입자이며 모두 사존께서 배치하신 수련의 길을 걷고 있는데 내가 뽐낼 것이 뭐가 있는가? 이렇게 엄중하게 한다면 쉽게 자심생마 하지 않겠는가? 사존께서는 과시심과 환희심은 쉽게 마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정말 아주 엄숙한 문제이다! 나는 사존의 전법륜에서 자심생마문제를 읽을 때 자신만만하게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만 주의하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쟁투심과 일하는 마음

일정한 층차에서 자신이 일부 법리를 깨달으면 즉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인식이 높다고 여기면서 일종 상사와 비슷한 책임감이 생기고 뭔가를 배치하고 다른 사람이 나의 건의에 따르길 원했다. 못하거나 이의가 있다든지 나의 표준으로 보았을 때 태도가 좋지 않든지 하면 나는 화를 내면서 수련생 및 다른 사람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비는 언급할 나위도 없다. 사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인식, 나의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면서도 자신은 다른 사람이 잘 되길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소위 책임감은 전혀 자비가 없고 수련인이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가 아니다. 더 엄중한 것은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대법 앞에 놓고 나를 실증하고 있었다.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넷째. 동정심도 정이다

정은 속인 사회를 유지하는 연결고리이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이 정에서 뛰쳐나왔다면 누구도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며, 속인의 마음은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자비이며, 더욱 고상한 것이다.”[1] 나는 줄곧 이 정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지만 제거해야 한다는 것은 인식했다. 수련생과의 사이에 정이 있다는 것은 정말 발견하기 어렵고 아주 깊이 숨겨져 있다. 나는 무슨 이치를 깨달으면 즉시 속인 중에서 무슨 보물이라도 얻은 것처럼 가까운 수련생들에게 보여주고 함께 향수하려 했고, 그들에게 여의치 않은 일이 생기거나 무슨 관이 있으면 시시각각 마음에 담고 괴로워하고 방법을 찾아 도와주려했다. 이런 느낌은 속인 가족, 친구를 대하는 상태와 비슷했다. 정에 집착하는 비율이 수련생을 서로 돕는 것보다 컸다. 이런 느낌은 자비가 아니라 완전히 속인의 근심이었다. 다른 방면에서 말하면 정을 내려놓지 못한 데에서 본인의 이익에 대한 집착을 보아낼 수 있다. 나는 나의 가족, 친구, 수련생을 모두 나의 것으로 보았고, 나 자신의 이익 중의 일부분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슨 결점이 있거나 순조롭지 못한 일이 있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정은 일종의 물질이다. 어떤 수련생이 문장에서 그것은 끈끈하고 희뿌연 것이라고 언급했다. 나는 보이지 않지만 점차 확실히 그렇다는 것을 느꼈다. 속인에 대한 정을 버려야 하지만 수련생에 대한 정도 버려야 한다!

2. 과시심 속에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 

직장일, 생활, 수련 중에서 나는 스스로 사심이 없는 일, 사심 없이 일을 좀 하거나 대법에 부합된 일, 일부 대법의 신기한 일을 보면 늘 득의양양해하며 속으로 기뻐했다. 관련된 행동도 좀 흥분된 상태였고 까불었었다. 이는 모두 환희심, 과시심이라는 것을 뻔히 알기에 이런 상태를 같지 않은 각도에서 내가 과시하는 원인을 찾고 제거하려고 노력했지만 늘 이런 상태를 억제하지 못했다. 때문에 이런 환희심, 과시심에 기초하여 또 두려운 마음까지 생겼다. 항상 떨어질까 두려웠고 뭔가를 잘못할까 두려웠으며 자심생마 하여 빈틈을 보일까 두려웠다. 이 모든 것을 태연하게 대하지 못했다.

어떤 때 나는 해외 대법제자가 그렇게 잘하고 그렇게 많은 일을 한 것을 보고, 또 국내 대법제자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구한 것을 보고 생각했다. 그들 본인은 원만할 자본이 있다고 생각할까? 그들은 기뻐할까? 그들은 어떻게 이후 조사정법의 길을 대할까? 그들은 계속 평탄하게 이후의 수련의 길을 잘 걸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근심하는 것이 바로 내심의 내 모습이었다. 나의 과시심도 보답을 바라고 공덕을 구하고 원만을 구하려는 데서 온 것이 아닐까?

보답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재물, 명리, 표창, 감격, 인정, 의지, 공덕 등, 내가 사람마음으로 중히 여긴 모든 것을 그 중의 어느 것이든 마침내 구해왔을 때 자연스럽게 만족해하고 기뻐하며 나아가서는 자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수련인은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보답 방식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공덕에 집착하고 마지막에 심지어 원만에 집착하는 것 역시 구하는 것이 아닌가?

수련하여 원만에 이르는 것은 모든 대법제자의 목표이긴 하지만 다 닦아낸 것이지 구해온 것이 아니고 가져온 것이 아니다. 이런 구하려는 마음은 이렇게 복잡하고 은밀하게 숨겨져 있고 발견하기가 어렵다.

차츰 착실하게 수련하면서 이 십몇 년을 낭비한 것이 얼마나 아깝고 유감스러운지를 점점 발견했다. 착실하게 수련한 많은 노제자들의 안정된 수련 상태를 보면 정말 수련은 돌격적으로 완성한 것이 아님을 느꼈다. 층차는 닦아낸 것이지 바라고 구해서 가져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사존께서 나에게 준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못했음을 정말 후회했고 나의 격차를 보고 조급해졌다. 정법이 마지막 시각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수련성취하지 못하고 수련생들이 원만하여 사부님을 따라가는 것을 봤을 때 늦었다고 후회하는 고통을 나는 느낄 수 있다.

이 글이 나와 비슷한 상태를 가진 수련생을 깨우쳐주어 다그쳐 착실하게 수련하길 바란다. 사존께서는 크나큰 자비로 제자를 포기하지 않으시니, 우리는 기연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사존께서 치른 대가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법을 사부로 모시고 용기를 내어 용맹정진하자.

이 문장의 모든 심득체험은 사존의 대법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개인의 깨달음이니 층차의 제한이 있다.

사존의 자비로운 점화에 감사드립니다. 수련생의 문장이 나에게 준 계발과 독촉에 감사드립니다. 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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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763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6/3/34512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