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경축513 밍후이 원고) 513 세계 파룬따파의 날에 즈음하여 나는 밍후이를 빌려 사존의 자비로운 구도에 감사드리며 아울러 인터넷을 통해 법을 얻고 또 수련 이후의 아름다운 체험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한다. 처음 투고이니만큼 지적해 주기 바란다.
나는 2012년, 24살에 법을 얻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자랐기에 80년대 출생한 대부분 사람과는 달리 나의 처세관은 전통적인 것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철이 들자 나는 곤경에 직면할 때마다 당시 보기에는 표면상 뭔가 잃는 것 같았지만 지나간 후에 보면 흔히 노인의 가르침대로 생각 밖의 수확을 얻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내가 모르는 속에 틀림없이 사람보다 높은 법이 존재하며 그가 무형 중에 일체를 제약하고 있음을 믿게 했다. 비록 이 법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내 마음속엔 이미 ‘반드시 선량해야 한다.’라는 종자가 심겨 있었다.
대학 다닐 때, 나는 여행과 관련한 프랑스어 전공을 선택했기에 외국 관광객에게 프랑스어로 가이드를 하게 됐다. 이 때문에 재학 기간에 아주 많은 동서양 문화를 접촉하게 됐고, 많은 책도 보았는데 예를 들면 성경, 주역, 불교 경전 등등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많은 정보를 섭렵할수록 내게는 도리어 현실 세계에 대한 더욱 많은 의문과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생겨났다.
어느 날인가 불교 지식을 강의하는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은 말하고 말하다가 약간 웃으며 말했다.(마치 그녀 자신도 믿지 않는 것처럼) “학생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해주겠는데 이건 석가모니가 한 말입니다. 그는 56억 7천만 년 이후, 한 미래 부처님, 미륵부처가 내려와 사람을 구도한다고 말했습니다. 학생들이 만약 그때까지 살 수 있다면 미륵부처를 따라 배워보세요.” 말을 마친 선생님은 허허하고 웃었고. 많은 학우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이 말은 전류처럼 나의 머리를 꿰뚫고 사상의 가장 깊은 곳까지 이르렀다. 나는 생각했다. 정말 너무 좋구나. 장래 내가 미륵부처님을 만난다면 꼭 그분에게서 잘 배우겠다.
어느새 대학 졸업이 다가왔다. 3년 동안 공부하여 나는 취업자격 시험을 순조롭게 통과했고 프랑스어 가이드 자격을 받았다. 재학 당시 줄곧 불법(佛法)이란 어찌된 것인지 알고자 했으므로 실습할 때 나는 외국관광객을 안내하지 않고 불교의 4대 명산 중 첫 번째인 우타이산(五台山)에 가서 가이드를 했다.
그러나 그곳에 간 후에야 그곳에 보존돼 오는 옛날에 건축된 사찰 이외에 진정한 내면의 것들은 이미 볼 수 없음을 알게 됐다. 그곳의 여행사 ‘선배’가 종일 주입하는 것은 모두 관광객에게 돈을 팔아 향을 피우고, 불상을 집에 모시라는 말뿐이었다. 사찰의 스님은 대부분이 모두 남방에서 온 까까중(머리 깎은 중)이었다. 낮에는 승복을 입고 휴대폰으로 가이드와 연락을 취하며 사찰에서 연달아 손님을 맞아들였고, 밤이면 사복으로 갈아입고 야시장을 돌아다녔다.
부처의 기치를 내걸고 돈을 사취하는 가짜 가이드, 가짜 스님을 분명하게 보게 된 나는 낮에는 여행사에 머물고 황혼이 깃들어 조용해지면 다시 문을 나섰다. 어둠이 내린 어느 날, 혼자 원수사의 정원에 멍하니 앉아 처마 밑에 달린 방울이 미풍에 달랑이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마음이 더없이 처량해졌다. 어제의 불교 성지가 어찌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내가 찾고 있는 불교 정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어느 날 오후, 어디서 생겨난 생각인지 갑자기 밖에서 무엇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망연히 걸어나갔다. 산기슭에 이르러 대학 동창을 만났고 그곳에서 우리는 서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되어 먼 곳에서 세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아주머니 두 분과 누나뻘 되는 사람 한 분이었다. 그중 안경을 낀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모모 사찰을 어떻게 찾아가느냐고 길을 물었다. 들으니 동북 말씨인지라 어려서부터 동북 사람 말을 듣기 좋아했던 나는 흔쾌히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아주머니, 여기로 올라가기만 하면 곧 도착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하지요. 저도 별로 할 일 없으니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그리하여 우리 일행 4명은 산으로 걸었다. 나와 길을 묻던 아주머니는 앞에 서고 다른 두 분은 뒤에서 걸었다. 50미터쯤 갔을 때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당신 올해 책력의 2월에 물건 하나를 잃었어요, 이 물건은 당신에게는 아주 중요한데 후에는 찾았어요. 어느 신이 도와서 찾아준 거예요. 그녀 말을 듣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또 나에게 물건을 잃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확실히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자초지종을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그것은 겨울방학을 보내고 학교에 돌아온 후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추웠는데 침대는 문 쪽을 향해 있었는지라 나는 아침 7시 지나 쌀쌀한 바람결에 놀라 깨어났다. 보니 웬걸 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달려가 문을 닫고 나는 듯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 다시 잠을 자려고 했다. 그러나 손으로 베개 밑을 더듬어 보니 돈 지갑이 없었는데 나는 갑자기 당황했다. 지갑에는 신분증, 수험표가 들어 있었다. 이틀 후 가지고 가서 가이드 자격증을 만드는 데 쓸 것들이었다. 즉시 실습할 곳을 찾아야 하는데 잃어버렸으니 다시 만들어 가지고 온다 해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걸 어찌하나?
나는 학교의 구석구석을 다 찾아보았고, 심지어 쓰레기 버리는 장소까지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숙소에 돌아와 룸메이트에게 “물건 찾는 광고”를 써서 붙이게 하려고 했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서 룸메이트가 한 장 한 장씩 써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몽롱한 가운데 신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속으로 묵념해 보았다. 신이시여, 저는 아직 당신에게 빌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제가 요만한 일로 당신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이드 증서는 저에게는 몹시 중요합니다. 만약 제가 찾을 수 있다면 꼭 당신에게 감사할 것이며, 선행을 많이 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 후, 나는 마치 단번에 부정적인 사유를 내려놓은 것 같아 여유롭게 놀러 나갔다, 어느 숙소에 들어가니 한 학우가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기에 웬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화를 내며 말했다. 누가 나의 휴대폰을 훔쳐가고는 이 헌 돈지갑을 내 침대에 버리고 갔어! 보니, 나의 돈지갑이었다!
아주머니는 말하기를 내가 돈지갑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은 신이 나의 선념을 보고 나를 도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주 괴이쩍게 생각한 것은 그녀가 어찌하여 이 일을 알 수 있는지다. 게다가 나는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후에 파룬따파 수련을 통해서야 알게 됐는데 아주머니에게 숙명통 공능이 있어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수도하는데 사부님은 소백룡(小白龙)이며, 또 우리는 이전에 인연을 맺었다고 했다.
처음에 나는 아주 듣기 좋아했으나 듣고 듣다가 어쩐지 좀 허황한 감이 들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록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곁에서 자라 신을 믿고 하늘을 존중하는 사상기초가 있긴 했지만 10여 년 동안 학교에서 받은 교육은 모두 무신론 교육이었다. 아주머니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사상이 잠깐은 이쪽에, 잠깐은 저쪽에, 잠깐은 인정하고 잠깐은 의심하는 것을 느꼈다. 후에 나는 이런 건 상관하지 말자, 아무튼 아주머니가 미래의 일을 아니까 그럼 나의 미래나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우타이 산에 오게 된 자초지종을 알려드리고 또 이런 곡절을 거치고 나니 졸업 후 가이드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대학 다닐 때 선생님은 프랑스어 전공자는 아프리카에 가서 사업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곳의 많은 나라는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아주머니에게 내가 출국할 기회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잠깐 있다가 하반기엔 나갈 수 있다고 했다.
과연 대학 졸업 후, 다시 말해서 2009년 9월, 나는 인터넷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아주 순조롭게 모 대외무역그룹의 초빙통지를 받았고, 또 이사장이 직접 나에게 전화로 면접할 필요 없이 직접 아프리카 모 나라에 가서 현지 회사의 재무와 판매관리 사업을 담임하라면서 연봉 8만(약 1,300만 원)에 상금을 더한다고 했다. 나는 그때 겨우 21살인데 이런 전화를 받자 좀 멍해졌다. 그래서 나는 30여 시간 기차를 타고 회사에 가 보았고, 이런 일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집에 돌아와서 출국 준비를 했다.
출국 전에 나는 속으로 한 가지 생각을 정했는데 여하를 불문하고 밖에서 길어야 2년 있다가 2012년 전에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는데 하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연세 많아서 내가 반드시 효성을 다해 그들의 여생을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12년’의 예언을 내가 특별히 믿기 때문이었다. 인류에게 재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믿었다. 비록 무슨 천재가 있을지 감히 생각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인류는 정말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재난이 없다고 하더라도 종국에는 도덕의 타락과 자원의 고갈로 사람은 서로 참살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니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꼭 가족과 함께 있어야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2년이 바로 다가왔다. 회사의 총경리는 이사장의 학우이다. 그는 내가 일하는 것이 좋고 젊은 데다 정규 교육을 받은 출신이라 외국어도 잘해 나를 남길 생각이었다. 두 번째 해 시작부터 그는 나에게 남아서 더 여러 해 일해 보라며 여러 번 말했다. 내가 두 번째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면 세 번째 해부터는 부총경리를 시킬 것이며, 연봉 15만(약 2,500만 원)에 전용차도 주겠다고 했다. 나는 출국 전의 결정에 대해 한 번도 동요해 본 적이 없었고 돌아가 노인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완곡히 사절했다. 나중에 총경리는 탄식하면서 말했다. “아무튼, 우리 이곳에는 항상 당신의 자리가 있으니 당신이 어느 때 오고 싶으면 어느 때 오시오.”
2년 동안 외국에서 보낸 매 하루는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았다. 생활 주변은 모두 중국 사람뿐이고, 날마다 보는 TV는 위성안테나로 수신하는 CCTV 4이고, 인터넷 접속은 단지 QQ, 웨이보뿐이며, 어쩌다 서우후(Sohu.com Inc. NASDAQ: SOHU)를 열고 뉴스를 본다. 문을 나서서 출근할 때 온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검은 피부색의 사람들임을 보았을 때라야만 꿈에서 깨어난다. 오, 나는 아직도 아프리카에 있구나.
이러한 생활이 귀국하기 두 달 전까지 줄곧 계속됐다. 시차로 말미암아 나는 고등학교 때의 학우와 늘 SKYPE로 한담을 했다. 그는 국내의 모 영화제작진에서 후기 편집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제작진에서 영화를 찍고 밤이 돼야 그는 일할 수 있었는데 마침 나와 시간이 맞았다. 그는 제작진을 따라 항일 “오라토리오”의 현지 촬영 때 현지인들로부터 역사의 진상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는 그제야 교과서에서 배운 것은 공산당이 꾸며내어 세뇌한 것임을 알게 됐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연설문 한편을 보내왔는데 내용은 국내경제의 진실한 면모에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보고 나서 깜짝 놀랐다. 원래 국내에서 선전하는 이른바 대국이 궐기했다는 것은 죄다 가상이었다. 이어 나에게는 한 가지 생각이 움텄다. 항일과 경제문제에서 공산당이 사람을 속이는 가짜를 만들어내는데 그럼 역사상의 그런 정치사건의 진상도 그것에 의해 덮어진 게 아닐까? 정말 잘 조사해 봐야겠다. 이런 것을 보려면 방화벽을 뚫고 구글에 들어가야 볼 수 있다고 학우는 말했다. 하지만 너는 국외에 있으니 직접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이때야 나는 국내에선 네트워크를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아프리카에 거의 2년을 있으면서도 인터넷 접속은 모두 바이두를 사용했고 구글은 써보지 못했다.
나는 학우가 가르쳐 준 대로 구글에서 차례로 키워드를 검색했더니 과연 나왔다. 문화대혁명, 대약진, 3년 대기근, 6·4 학생운동, 파룬궁 박해 등등. 텐안먼 분신자살 진상을 폭로한 동영상 ‘위화’를 본 후 나는 정말 자신의 인식을 감히 믿을 수 없었다. 원래 자신은 이렇게 클 때까지 온통 거짓말 속에서 살았다. 나는 동영상을 다운하여 동료에게 보여 주었고, 그들은 보고 나서 모두 몹시 분개했다. 수만 명의 파룬궁수련생이 생체 장기 적출을 당했고 장기가 팔렸다는 보도를 보았을 때, 나는 이것은 근본 존재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나는 그들(파룬궁수련생)이 장쩌민에게 무고한 박해를 당한다는 것은 믿었으며, 심지어 그런 고문도 믿었지만, 인류가 생체에서 장기 적출한다는 이런 일은 마음속으로는 정말 감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것은 내가 의심하는 태도로 모든 증거를 보고 모든 정보를 분석하고 나서 얻은 결론은 이 생체장기적출이 놀랍게도 모두 정말이었다는 것이다.
귀국하기 며칠 전, 또다시 거짓말에 속아서 살게 될까 봐 걱정돼 방화벽 소프트웨어 자유문을 다운하여 외장 하드에 보관했다. 이러면 집에 가서도 진실한 뉴스를 볼 수 있다.
2년 동안 이국 타향에서, 인생의 의의를 찾지 못한 젊은이로서는 마음의 공허함을 수십만의 금전으로는 달랠 수 없는 것이다. 귀국 후 나는 빠르게 극단에서 다른 한 극단으로 빠져들었으며 사치스런 생활에 묻혀버렸다. 항상 친구들과 먹고 마시며 엉망진창이 돼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이렇게 정신적 공허함을 메우고자 했다. 하지만 이런 생활 방식은 여전히 나를 즐겁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술자리의 반복되는 화제에 대하여 혐오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에게 유치원에서 생긴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내가 인생에 대해 철저한 반성을 하게 했다.
어느 유치원에 5살 되는 어린이가 있었는데 그의 아빠가 날마다 전동차로 보내고 마중했다. 갑자기 어느 날 이 어린이는 아무리 어찌해도 아버지와 함께 유치원에 가려하지 않았다. 부모는 원인을 캐묻고 나서야 알게 됐다. 전날 어떤 두 어린 친구가 너의 집에는 돈이 없어 전동차를 타고 다닐 수밖에 없다고 비웃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어린이 부모는 날마다 자가용에 그들을 태우고 유치원에 왔다. 아빠는 별수 없었다. 샐러리맨의 처지라 대부금 7만 위안(약 1,200만 원)을 빌려다가 차를 샀는데 그제야 아이가 유치원에 갔다고 했다.
물욕이 넘쳐흐르고, 도덕이 타락한 대륙과 편안하고 자유로우며, 민풍이 순박한 해외를 대비해 보면서 자신에게 하나 또 하나의 의문을 제기했다. 아프리카주, 티베트의 그런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은 생활의 질이 그렇게도 나쁜데 그들은 왜 날마다 도리어 아주 즐거워하는가? 그래 사람의 일생은 돈과 명리를 위해 산단 말인가? 만약 사회가 더 이렇게 발전해 나간다면 인류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마침내 이 일체 문제의 근원은 중국 대륙 사람의 ‘신앙 결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1949년 이후, 공산당이 벌인 역대의 정치운동은 중화민족의 전통적 신앙을 파멸했지만, 오히려 의도적으로 학교와 사회상의 사람에게 무신론과 유물론을 주입했다. 90년대 이후에는 또 끊임없이 사람에게 일체 모두가 돈을 향하게 하는 돈 숭배 관념을 부어 넣었다. 각종 관념의 오도로 인해 사람은 자연적으로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전통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타이완과는 뚜렷한 대비를 형성했다.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게 됐으니 잃어버린 ‘신앙’을 찾아와야 한다. 하지만 어디 가서 찾겠는가? 나는 당년 우타이산에서 만났던 공능이 있는 그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나의 의혹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은 과학자일까 아니면 수도하는 자일까?
그것은 2012년 초반이었다. 나는 인터넷에서 많은 서양 과학자의 ‘영성과학’에 관한 연구 성과를 보았다. 진화론의 오류, 영혼과 윤회전생의 진실, 송과체의 비밀, 기공의 초상적인 현상 등등을 그들은 실증 과학으로 벗겨 보였다. 여러 해 이래 학교에서 ‘과학숭상, 미신타파’ 교육을 받은 나에게 현재의 수준을 능가하는 이런 과학연구는 사유의 국한을 꿰뚫게 했다. 원래 우리가 학교수업에서 배운 것이 바로 진정한 미신이고 공산당 이론 범주의 이른바 과학일 뿐이다. 원래 종교에서 말하는 것이 다 정말이다. 내가 줄곧 명백하지 못했던 신앙 문제가 원래는 수련이었고, 수련은 정말 존재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가, 어디에 사부가 있어 가르쳐 주겠는가? 불교는 지금 안 된다. 우타이 산에는 이미 가보았다. 너무 난잡하다. 도가의 책도 접촉해 보았다. 모두 고문이어서 가르치는 사람이 없으면 봐도 알 수 없다. ‘성경’도 읽었는데 그건 백인을 수련시키는 것이어서 나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기공이라, 기공은 수련할 수 있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가 한 가지 공을 연마했던 일이 생각나서 어떻게 말했는지 보려고 할머니더러 그 자료를 찾아보라고 했다. 보고 난 후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 타이완의 친구와 구매 대행 사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타이완 그쪽의 기공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는 그가 지금 연마하고 있는 기공과 또 기타 기공의 사이트를 나에게 발송했다. 봤지만 역시 만족이 안 되어 다시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하루는 그가 한 사이트 주소를 나에게 발송하면서 말했다. 자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럼 이거나 보게. 타이완에서는 많은 사람이 이 공을 연마하는데 파룬궁이네.
날마다 둥타이왕에 접속했는데 파룬궁의 사이트는 페이지의 중간에 있었지만 나는 종래로 클릭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뭔가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오히려 친구가 나에게 발송한 것이다. 처음에 나는 봐야 하나 고려하다가 다시 생각했다. 아니야, 타이완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연마하고 유럽의 그렇게 많은 나라에서도 연마한다는데, 또 많은 사람이 박사, 과학자라고 한다. 국내에서는 탄압이 이렇게 심하여 붙잡고 징역을 보내고 심지어 생체 장기 적출을 해도 사람들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연마하는 것으로 봐서 이 공은 틀림없이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보자, 반드시 보자.
나는 파룬따파 서적 사이트를 열었다(http://gb.falundafa.org/falun-dafa-books.html 국내는 인터넷이 봉쇄됐으므로 방화벽을 넘는 소프트웨어로 열어야 한다).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몇십 개의 책 이름이었다. 원래 파룬궁에 이렇게 많은 책이 있었구나. 어디부터 봐야 할지 알 수 없어 머뭇거리는 사이에 “파룬따파 미국 법회설법”이란 책 이름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기공사가 한 말을 읽었어도 수련을 제대로 분명히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파룬궁의 사부님이 미국에서 설법하셨다니 (강단) 아래에서는 응당 많은 수재가 듣고 있을 텐데 그럼 나도 열어보고 내가 찾으려 하는 것이 있는지 보자.
설법을 보는 중,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고, 내 인생 중의 의문이 끊임없이 풀려 흥분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인류 문명의 예로부터 지금까지, 지구를 주시하고 있는 외계생명, 다른 공간의 존재형식, 인체 수련의 박대정심, 세속에서 수련하여 정과를 얻을 수 있는 우주대법 등등등등. 이것이 바로 내가 줄곧 찾던 것이 아닌가? 파룬궁의 사부님은 뜻밖에도 통속적인 언어로 다 말씀하셨다.
내가 단숨에 ‘미국법회설법’을 다 읽었을 때는 벌써 새벽 세시가 됐다. 조금도 잠기가 없고 두뇌는 맑았다. 나는 끝내 나를 가르칠 수 있는 사부님을 찾았다. 나는 파룬따파를 수련하겠다. 격동된 나는 침대에 꿇어앉아 눈물을 가득 머금고 두 손을 합장하며 속으로 사부님께 여쭈었다. 사부님께 비나이다, 저를 꼭 받아 주십시오. 얼마나 고생을 하더라도 이 한 생에 저는 꼭 사부님 따라 부처로 수련하겠습니다.
“사람이 반본귀진하려는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된 진정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수련하려고 생각하면 불성(佛性)이 나왔다고 본다.”[1] “불성이 나오면 시방세계(十方世界)를 진동한다.”[1] “眞(쩐)ㆍ善(싼)ㆍ忍(런), 이런 특성은 우주 중에서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표준이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 바로 그로써 가늠한다.”[1] “일부 사람들은 또 이미 미끄러져 내려온 도덕 수준으로 자신을 가늠하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가늠하는 표준마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1] “수련자로서, 이 특성에 동화하면 당신은 곧 도(道)를 얻은 사람인데, 바로 이렇게 간단한 이치다.”[1] 나는 격동을 금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어릴 때 기억한 것 중의 그 법이 아닌가? 쩐,싼,런 이는 진법인데 나는 찾았다.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여러 해 동안 줄곧 자신은 선량을 유지했고, 동년배에 비하면 그래도 괜찮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정한 표준 쩐,싼,런에 비하면 아직 차이가 멀고도 멀다. 나는 꼭 진정한 수련자가 되겠다.
법을 얻은 후 나는 곳곳마다 일마다 사부님께서 가르치신 쩐,싼,런 표준에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 참말을 하고, 참된 일을 하고, 사람을 착하게 대하며, 일에 부딪히면 더는 남과 다투지 않고 더는 책임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으며, 매번 문제에 부닥치거나 모순이 생길 때면 주동적으로 안에서 자신의 문제를 찾았다.
사업을 부지런히 성실하게 했고 사람을 솔직하고 성실하게 대했으며, 종래로 남과 따지지 않았다. 수련 후, 두 사장은 나의 봉급을 몇만 위안이나 지불하지 않았으나 나는 그저 그들이 기업경영을 잘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우려했을 뿐 나쁜 말은 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모두 파룬궁을 수련한다면 이 사회는 좋아질 것이다.
가정에서 노인을 돌보고 가정 관계를 평형 시켰고, 어른에 대해서는 더욱 더 존경하였으며 인내심이 있었다. 내가 막 법을 얻어 수련한지 몇 달 됐을 때 할아버지가 마비되어 침대에 눕게 됐다. 아버지와 고모께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수련인으로서 나는 주동적으로 할아버지를 보살피는 책임을 감당했다. 낮에는 할아버지에게 밥을 먹여주고 활동시키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대변을 받아내고, 밤이면 그의 신변에서 자면서 몸에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때때로 돌려 눕혔다.
할아버지는 병에 걸린 후부터 딴 사람으로 변했다. 늘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고, 툭하면 화를 냈다. 처음엔 어떠하든지 막론하고 정성껏 보살폈으나 불러온 것은 늘 원망과 욕설과 불만이었다. 밥을 먹여 줄 때도 순순히 드시는 것이 아니라 어떨 땐 성깔을 부리며 밥을 나의 몸에 뿜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이것을 수련 가운데서 심성을 제고하는 고비라고 여기고는 늘 즐거워하면서 계속 할아버지를 달래서 식사를 시켰다. 한번은 내가 보서 ‘전법륜’을 들고 할아버지에게 읽어 드렸더니 그는 오히려. 가, 가, 가! 네 책을 들고 저쪽에 가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심정이 안 좋아서 그러는 줄로 여기고 책을 접어놓고는 그냥 그를 시중들었다. 이튿날 할아버지는 나를 오라고 부르더니 나에게 말했다. 어제 내가 잘못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 사부님께 사과하겠다. 그는 왼손을 입장하고 가슴에 대고 얼굴에는 경건한 빛을 띠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오성에 놀라며 말했다. 할아버지, 사부님은 자비로 사람 구하러 오셨어요. 매 하나의 생명에 대하여 모두 몹시 소중하게 여기세요, 그분은 할아버지에게 화를 내지 않을 거예요.
할아버지는 자리에 누운 지 열 달 만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가족은 할아버지가 가신 후 꿈에 나타나 부탁하는 것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가신지 1주년이 되는 어느 날 저녁에 나는 할아버지가 내 곁으로 온 꿈을 꾸었다. 그는 모습이 젊게 변했는데 안경을 걸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객실에서 침실로 불러다가 단독으로 말씀하셨다. 나더러 파룬따파하오를 알게 해 준 데 대하여 너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아주 훌륭한 곳으로 가게 되었다. 너의 할머니도 파룬따파하오를 알게 해 드려라. 아침에 나는 할아버지를 본 꿈을 할머니에게 여쭈었다. 할머니도 꿈에 봤다고 했는데 게다가 꿈에 본 모습이 내가 본 것과 똑 같았다. 단지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고 몇 발자국 떨어져 있으면서 웃으며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는 것이다.
파룬따파는 나의 인생을 의미 있게 변화시켜 더는 공허감을 느끼지 않게 됐고, 적막도 느끼지 않게 됐으며, 심령이 순수해지고 신체도 튼튼해져, 날마다 살아가는 게 재미있었다. 수련 후 나는 술 담배를 쉽게 끊었다. 여러 해 이래로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하면서 얻은 경추질환이 연공한지 며칠 안 되어 나았다. 심장은 어려서부터 나빴는데 수련 후 역시 다 나았고 더는 재발하지 않았다.
우담바라 꽃이 조용히 3년 동안 피었다
불경에서 말하기를 3천년에 한 번 피는 우담바라 꽃이 필 때면 미래 부처가 성왕으로 하세하여 법을 전하고 사람을 구도할 때라고 했다. 2014년, 성결한 우담바라 꽃이 나의 집 채과(덩굴식물)에 피었다. 나는 과피를 잘라다 보존했다. 바로 이렇게 물도 없고 양분도 없고 과피마저 말라서 나뭇가지처럼 돼 버렸는데도 그 위의 우담바라 꽃은 3년 동안 조용히 피어 있었다.
수련 후 나는 천상과 지상의 공간은 부동하고 시간도 부동하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았다. 당초 석가모니 부처가 제자들에게 한 말은 천상의 시간으로서, “56억 7천만 년”후, 미륵이 하세하여 불법을 전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 인간에서 2천 오백년 후 전세한 파룬따파였던 것이다. 불가는 연분을 주장하는데 “56억 7천만 년”의 소망으로 나는 드디어 불연(佛緣)을 맺게 됐으니 이 한 평생 후회하지 않게 됐다.
후기
2015년 5월 1일, 중국 최고 검찰원과 최고 법원은 “유안필입, 유소필이”(有案必立,有訴必理–사건이 접수되면 반드시 입건하고 소송이 제기되면 반드시 심리한다)라는 통고를 발표했다. 중화의 아들딸로서, 민족이 위난을 당할 때, 역사가 부여한 책임을 용감히 감당해야 하며, 대법 수련자로서 태연하게 일체 바른 요소에 책임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6월, 나는 실명으로 전 국가 주석인 장쩌민을 고소하여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한 가운데서 저지른 죄악을 추궁할 것을 두 군데 최고검찰원과 최고법원에 요구했고, 아울러 접수증을 받았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만약 1999년 장쩌민이 억에 달하는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박해를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그럼 10년 후,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어쩌면 선생님께서 석가 부처의 “56억 7천만 년”이란 예언을 경박한 어투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강의를 듣던 학우들도 당년에 대법 수련에 들어섰을지도 모른다고 난 적어도 긍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부님께서는 가사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누구인가
망망한 천지여 나는 누구인가
얼마나 윤회했는지 기억마저 희미하네
고난 속에 막막한 아득함이여
기대 속에 마음 이처럼 힘겹구나
한밤중 흘러내리는 창상(滄桑)의 눈물
진상을 본 그 때서야
대법을 찾은 그 때서야 천둥소리 들리는 듯
나는 알았노라 내가 누구인지
나는 알았노라 신의 길을 힘차게 달려가야 함을”[2]
사람의 일생은 뜬구름처럼 사라진다. 올 때 알몸으로 오고 갈 때도 알몸으로 간다. 진정으로 남길 수 있는 것과 갖고 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24살 때, 겹겹한 후천적 관념의 장애를 돌파하고 진정한 나를 찾았고, 인류 재난의 최후에 진법을 얻었다. 당신은 아직도 (방향을)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
[1] 리훙쯔사부님 저작:《전법륜》
[2] 리훙쯔사부님 시사:《홍음3》〈나는 누구인가〉
문장발표: 2017년 5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경축5.13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5/14/34677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