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베이징 대법제자
[밍후이왕] 2017년 5월 22일, 밍후이왕에 어시베이(鄂西北) 대법제자 문장 ‘속인이 수련생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실었다. 대체적인 뜻은 수련생이 속인들이 암이라고 여기는 병에 걸려 세상 떠났는데, 이런 상황이 직접 진상 알리기에 영향을 주므로 어떻게 속인에게 설명, 혹은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서였다. 작자는 어떻게 하면 사람 구하는데 영향 주지 않을 것인지를 교류하길 바랐다.
우선 수련인이면 사부님께서 여러 번 상세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수련생이 병업이 있거나 심지어 생명을 잃은데 대해 법리에서 모두 명백히 인식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수련하지 않는 사람에게 분명하게 말할 것인가. 내 생각은 이 문제를 말할 필요가 없이 우리 자신의 관념을 돌려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법에서 파룬궁을 수련하기만 하면 죽지 않을 것이고 소업(소위 ‘병’)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모종 측면에서 말하면 이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사람이 대법을 공격할 때 구실을 찾으려 한 말이다. 밀레르빠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늙어서 병든 모습을 보였고 석가모니도 병든 모습(일종 설에 따르면 순타가 공양한 버섯을 먹었다고 함)을 보였으며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났다. 이런 일은 사람들이 그런 종교를 믿고 믿지 않는 원인이 되지 않았으며 신도들도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해석할 필요가 없었다. 의사가 사망했다고 사람들이 병원에 가서 치료하는 것에 영향 주는가? 대법은 그들과 다른 성명쌍수 공법이기에 생리와 건강에 아주 큰 변화와 개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수련의 정진하는 여부 등 여러 요소와 관련된다. 특히 이는 정법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요소가 정법과 우리 수련에 영향 주고 좌우지하려고 시도하며 대법제자 수련 과정과 세간에서의 표현을 좌우지하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이런 복잡한 요소를 어떻게 사람에게 분명하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나는 문제에 부딪히면 안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체험했다. 우리는 왜 이런 문제에 부딪혔을까? 주위 수련생이 세상을 뜬 문제만이 아니라 속인이 질의한(혹은 우리가 질의하고 있는) 문제를 포함해 왜 우리에게 부딪히게 했을까? 나는 이런 체험이 있다. 나는 이공과를 배웠기에 대법을 수련한 후 늘 과학적으로 대법을 해석하면서 그렇게 해야만 시름이 놓였고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한 동안 수련한 후 정말 내가 법리를 완벽하게 이해한 것 같아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나에게 수련의 어떤 문제를 물어보든지 난 원만하게 해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법을 알리는 것과 진상 알리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집착을 형성했다. 자주 높게 말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했다. 한 번은 본과대학 졸업생이 내 말을 반나절 듣고 좀 이해했는데 너무 어렵다면서 파룬궁을 수련하려면 먼저 대학 이과를 다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에게 이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해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정도와 필요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늘 나의 사유대로 말하거나 듣는 사람이 이런 것을 듣기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실제 정황과 효과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 문제는 세상을 떠난 수련생이 있을 때 듣는 사람은 이 문제를 관심하고 심지어 이 문제를 지켜보고 있어 그들이 대법을 인정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전제가 된 것 같지만 사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법에는 대법을 수련하기만 하면 소업하지 않거나 죽지 않는다는 설법이 없다. 우리에게 대법을 잘 대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본인이 연공하여 대법에 영광을 주어야지 ‘병’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마음이 있어 소업할 때 사람을 피하고 가족마저 가급적 피하거나 ‘병’이 없는 모습을 보이려 한다. 주위 수련생이 ‘병’이 있거나 세상을 뜨면 법리적으로 어찌된 일인지 알지만 다른 사람이 몰랐으면 하고 영향이 좋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연공하면 ‘병’이 있어서는 안 되고 죽어서는 안 된다는 개념이 생긴다.(다른 사람은 그렇게 여기지 않을 수 있는데 스스로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여길 수 있음) 다른 사람이 이 일을 아주 주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대법에 대한 인식에 영향 줄 것이라 여기면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는 ‘병’이 아니고 정말 세상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거나, 속인의 사망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지만 또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사실 이것은 사람마음이다. 대법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사람마음의 표현이고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는 진선인(眞善忍)에 부합되지 않으며 집착할수록 표현이 더 강렬해질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으면 버려야 한다. 우리가 집착할수록 부정적인 것으로 연화될 것이고 구세력의 요소가 교란하는 구실로 될 것이다. 우리가 분명하게 말하려 할수록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없고 마음도 더 무거울 것이며 국면은 점점 불리해질 것이다.
우리가 이 마음을 닦아버리면 일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사람도 연공인이 죽는 것이 무슨 일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연공하면 병이 생기지 않거나 죽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 대법에 일정한 인식이 있거나 믿는 사람일 수 있고, 혹은 우리가 이전에 그 사람에게 이런 오해를 주었거나 억지로 남의 흠집을 찾으려는 사람일 수 있다. 매듭은 우리 여기에서 먼저 풀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바꾸고 우리 관념을 바꾸면 외재적인 환경을 바꿀 수 있고 주위 사람을 개변할 수 있다.
우리 본인의 수련과 제고는 진상 알리기 활동을 포함해 우리 모든 것에 용해되어 있다. 안으로 찾는 것은 영원히 우리의 법보다. 자아를 내려놓고 모든 사람마음을 포기하고 모든 것이 완전히 법에 있으면 진상 알리는 데 더 유리할 것이다. 마음이 단순하고 지식수준이 높지 않는 농촌수련생이 진상 알리는 효과는 오히려 아주 좋다.
자신이 이전에 걸은 굽은 길과 체험에 근거한 약간의 인식이니 옳지 않을 수 있기에 수련생 여러분께서 바로 잡아주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17년 5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5/24/3486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