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뉴욕 업스테이트 대법제자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뉴욕 업스테이트 노년 대법제자입니다. 2000년에 법을 얻은 뒤 오늘까지 17년 동안 저의 개인수련과 정법수련은 함께 용합(容合)되어 있었습니다. 법을 얻은 후 비록 법리에 명백하지 않아 무엇이 정법수련인지 몰랐지만 당시 박해가 너무 심하였기에 노수련생들을 따라다니면서 반박해 활동과 진상알리기 활동에 많이 참여했습니다. 인권회의 기간 제네바에 두 번 가서 반박해와 진상알리기 활동에 참여하고, 매주 뉴욕시 혹형시범 및 중국대사관 앞 발정념과 반박해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2004년부터 미국 정부관료들에게 진상을 알리기 시작해 현재까지 줄곧 중단한 적이 없습니다. 2008년 또 운좋게 뉴욕 천국악단에 참가해 수차례 각종 대형 퍼레이드 활동에 참가했습니다. 올해 우리 지역 두 차례 션윈공연에서 협조인이 되면서 저는 많은 압력과 고험을 느꼈습니다. 저의 개인수련에 관한 에피소드를 교류하려고 합니다.
법을 얻다
2000년, 저는 법을 얻은지 얼마 안 되는 분을 차에 태워 뉴욕시에서 열린 심득교류회에 참석했다가 운좋게도 수련생들의 교류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당시 저는 직전에 왼쪽 발을 다쳤고 의사는 적어도 반년이나 일년 정도 지나야 회복될 것이고 이전 상태로 돌아가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법회에서 돌아온 후 제 발은 저도 모르게 기적적으로 나았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좋아졌습니다. 한 수련생은 사부님이 저를 관할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저는 매우 감동되었고 그 후부터 수련하면서 조사정법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천국악단 참여 과정에서 수련
법을 얻은 후 각종 진상알리기와 중생 구도 항목에 참여해 바삐 보내는 때가 많았습니다. 개인수련은 사실 그중에 용해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일을 많이 하고 개인수련을 홀시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한 일이 신성하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고험이 올 때 안으로 찾을 줄 모르게 됩니다. 법에서 제고해야 하는데 사람 마음으로 대하니 관을 넘는 데 어려움을 가중시켰습니다.
2006년 2월, 사부님께서는 ‘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 중에서 제자의 질문에 이렇게 회답하셨습니다. “그날 차이나타운 행진에서 천상의 각 공간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들, 온 하늘이 모두 신이었는데, 전고(戰鼓)를 두드렸다. 많고 많은 그런 천병천장(天兵天將)이 모두 앞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대법제자들이 나팔을 불 때 방출하는 에너지는 대단히 컸다. 여러분은 영화에서 원자탄이 폭발할 때 발생하는 충격파가 매우 큰 것을 보았는가? 그 힘보다 더 컸다. (박수) 대법제자들이 방출하는 에너지 성분은 원자보다 더 크기 때문인데, 이뿐만 아니라 매 한 층의 입자도 매우 강대했다. 다시 말해, 당시 오직 소리가 나오기만 하면 바로 온통 빛이었다.”
사부님의 이 한 단락 설법을 직접 들은 저는 그만 놀라 나도 천국악단에 참가해야겠다는 일념이 나왔습니다.
어린 시절 타이완에서 공부할 때 6년 동안 교내악단에서 지휘한 경험이 생각났습니다. 자신이 악보와 음악기초이론 감각에 일부 경험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2008년 저는 마침내 운좋게 천국악단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너무 기뻐 자신의 장기를 가지고 조사정법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악기를 다루지 않아 많이 연습해야만 요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토요일마다 뉴욕 천국악단에 참가해 연습하는 기회를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폭풍폭설 같은 악천후 외에 저는 약 5시간 동안 차를 운전해 가서 연습에 참가했습니다. 한 곡 한 곡 매우 진지하게 열심히 연습했고 음표 하나하나를 보면서 저는 그들을 이용해 중생을 구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주 연습에 참가하고 늘 각종 퍼레이드에 참가했습니다. 이 한 단락 시간은 마치 제 생활 중의 일부처럼 되었습니다. 때로는 좀 힘들다고 느꼈지만 더욱 보람있고 즐거워 어느새 몇 년이 흘렀습니다. 대략 2012년 발생한 일인데도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수련 중에서 무조건적으로 안으로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저의 한차례 큰 고험이기도 했습니다.
7월 4일, 워싱턴 DC에서 미국 국경일 퍼레이드를 하기 전 악대 리허설을 한 후 지휘자는 퍼레이드 대열에 참가하는 수련생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생각 밖에 명단에는 제가 없었고 당시 저는 청천벽력 같아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누구도 제게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는데 저는 그런 방식을 아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허튼 생각을 했고 화가 치밀었습니다. 설마 내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런가, 아니면 내 연주가 별로여서 그런가, 하지만 저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연주하는 것이 저보다 못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저는 줄곧 불공평해하는 사람 마음을 안고 억지로 참았습니다. 심지어 그 후 퍼레이드에서도 늘 이 일을 생각했습니다.
이 관을 저는 몇 년이나 끌면서 넘지 못했습니다. 후에 법공부가 깊어지면서 이것은 제가 어릴 적에 받은 교육과 자신이 처한 환경과 관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타이완에서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주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는데,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우리에게 일을 함에 있어 꾸준히 견지하고 모든 불공평한 일에 부딪히면 다 참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말을 매우 잘 들으며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가는 과정에서 순조로웠고 그다지 큰 고생을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참았습니다. 이번 관도 예외가 아니어서 저의 첫 반응은 바로 그냥 참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련인의 참음과 속인의 참음은 완전히 달라 수련에서 제고되어 올라오지 못하면 이 관은 넘지 못합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4강에서 “그러나 흔히 모순이 생길 때, 사람의 심령(心靈)을 자극하지 않으면 소용없고 쓸모없으며 제고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또 ‘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에서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관을 넘는 과정에서 저는 끊임없이 법공부를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을 함에 있어서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고려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만약 그 때 다른 수련생이 제외되었다면 저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보다 제가 감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자 문득 온몸이 가벼워지면서 아주 빨리 관을 넘는 감을 느꼈습니다. 전체 과정을 회상해보면 저는 많은 시기, 법에서 문제를 보지 않았고 첫 일념은 여전히 사람 마음과 관념이 작용을 일으켰습니다.
13년 연속 정부관료에게 진상을 알리다
2004부터 오늘까지 저는 200여 명 뉴욕 상·하원의원에게 신문을 배포하고 진상을 알렸습니다. 나중에는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또 그들이 대법에 수여한 표창장을 끊임없이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 많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었고 저의 수련도 그 속에서 끊임없이 제고되었습니다.
2004년, 저는 매주 월요일에 뉴욕주 정부청사 관료들에게 대기원 신문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현지 수련생이 저를 데리고 간 기억이 납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았을 때 두 번째로 제가 혼자 갔습니다. 안전검사를 통과한 후 한 경비원은 제가 그렇게 많은 신문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는 제게 무얼 하는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제가 신문을 배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자 그는 제게 허가증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자원봉사자이기 때문에 허가증이 필요한지를 모른다면서 바로 신문 한 부를 꺼내 그에게 이 신문을 본 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없다고 했고 저는 그에게 신문을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보고 나서는 아무 일 없으니 가서 배포하라고 말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각 사무실에 신문 한 부만 나누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사무실 직원들이 거의 다 냉정하게 제게 누구냐고 물었는데 저는 그들에게 저와 이 신문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믿고 이 신문을 좋아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그들에게 신문을 주고 임무를 완성하려 하지 않고 그들에게 신문의 내용과 대법의 진상을 말해주었습니다.
매번 신문을 가져오면 저는 먼저 제1면을 보고 내용을 파악하면서 어떻게 신문의 뉴스를 이용해 그들에게 진상을 알릴 것인지 생각했습니다. 보통 대기원 제1면을 소개한 다음 저는 그들에게 중국에서 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모른다고 하는데 저는 이 기회를 붙잡고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의원 비서거나 실습하러 온 정치관련 학과 대학생들인데 모두 매우 선량합니다. 진상을 듣고 나서 그들은 매우 놀라워하면서 또 우리를 아주 동정했습니다. 시간이 길어지자 많은 이들이 우리의 친구가 됐습니다. 아래에 두 가지 사례를 들겠습니다.
어느 날, 저는 한 하원의원 비서에게 신문 제1면에 실린 내용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매우 감동받아 자세히 제1면을 다 읽어본 후 가위로 그 뉴스를 오려서는 저를 데리고 의원 사무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오려낸 제1면을 셀로판테이프로 의원 좌석 의자에 붙여놓았습니다. 제가 당시 그의 행동에 매우 놀라자 그는 의원이 너무 바빠서 테이블 위에 있는 많은 문건들을 처리해주기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의자에 놓아야만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설명했습니다. 나중에 돌발사건이 있어 저와 다른 한 수련생은 예약도 없이 직접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처음에 주요회의에 참가하기 때문에 5분만 준다고 말했는데 결국 우리와 함께 1시간 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하원의원이 바로 작년과 올해 ‘파룬따파의 날’ 표창을 기안한 하원의원입니다.
또 어떤 상원의원 비서는 제게 많은 진상을 듣고 진상을 이해한 후 대법이 중국에서 박해받는 것에 대해 매우 동정했습니다. 한번은 그들 20여 명이 유람선을 타고 유럽여행을 가서 매우 즐겁게 놀았습니다. 모두들 다음번에 중국여행을 가자고 의논할 때 그는 가면 안 된다면서 제가 그에게 말한 대법의 진상을 그들에게 들려주었고 나중에 그들은 중국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올해 ‘파룬따파의 날’에 표창장을 수여키로 결의안을 만든 이가 바로 이 비서의 상원의원입니다.
수년간 신문배송과 진상 알리기를 계속하는 과정에 저는 힘들고 어렵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데로부터 주정부 청사의 많은 사람과 보안요원을 포함해 거의 다 친구가 됐습니다. 저는 다만 조사정법의 마음을 가지고 줄곧 현재까지 해왔습니다.
션윈홍보에 협조하다
올해 우리 지역에서는 두 차례 션윈공연이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엔 마침내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매우 기뻐했지만 매우 큰 압력을 느꼈습니다. 우리 지역에는 사람이 적고, 경험이 부족하고, 자신의 능력도 부족하며, 무슨 기능도 없어 현지 수련생을 잘 이끌 수 있을지 또 션윈홍보 과정 중에서 전체적인 수련으로 제고될 수 있을지, 티켓을 모두 팔 수 있을지에 대해 미지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이 줄곧 제 맘속에서 맴돌아 저의 마음은 항상 티켓 판매량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오로지 열심히 노력하고 신사신법하면 우리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일념이 있었습니다.
맺음말
비바람이 몰아친 17년은 모두 사부님의 자비하신 보호 하에 걸어온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통에 부딪치더라도 마음속에 사부님과 법이 있으면 제가 수련하고 조사정법하는 길은 누구도 막지 못했고 더욱더 견정하게 줄곧 현재까지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적절치 못한 곳은 수련생들이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2017년 뉴욕법회발언고)
문장발표: 2017년 5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해외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5/20/3484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