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5.13 특집 원고) 나는 2005년 말에 백혈병에 걸렸고 2006년 초에 파룬따파 수련에 들어왔다. 당시 나는 한 외자기업에서 근무했는데 근무환경의 원인으로 내 전후로 네 명의 백혈병 환자가 발생했다. 그들은 모두 의학적 치료법에 따라 치료했지만 잇따라 사망했다. 나는 파룬따파를 수련했기에 살아남았다. 오늘 이 기회를 이용해 여러분에게 나의 경험을 말하고자 한다.
대법을 배척해 죽음에 직면, 대법에 동화해 새로운 삶을 얻다
2005년 나는 회사에 다니고 작업 현장의 자그마한 책임자가 됐다. 남편은 소형 화물차를 사서 일하고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닌다. 일이 뜻대로 되고 가정도 소원대로 되어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내 주위에는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매체 선전의 영향을 받아 대법을 배척했다. 파룬궁수련생은 우리가 차를 사자 차 안에 걸 수 있는 호신부적을 가져다주면서 ‘삼퇴’해 평안을 보장하라고 권했다. 그런데 나는 고마워하기는커녕 크게 야단을 쳤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나는 백혈병에 걸렸다. 외지에서 일하기에 대도시의 소비를 감당할 수 없어 고향에 와서 치료했다.
막 돌아왔을 때는 혼자 생활할 수 있었다. 파룬궁수련생이 참을성 있게 진상을 알려 주었지만 속으로 배척했다. 그녀는 나에게 성심껏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염하면 나에게 이롭다고 했다. 남편은 말했다. “의학적으로도 해석하지 못하는데 그 몇 글자를 읽는다고 낫겠어?!”
이후에 나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게 됐고 병원에서 쇼크까지 했다. 남편은 의사를 불러 응급처치를 하라고 했지만 의사는 움직이지 않고 가족에게 후사를 준비하라고 했다. 남편은 조급했다. 사무실에 뛰어 들어가 멱살을 잡다시피 하여 의사를 끌어냈고 의사는 그제야 나에게 산소 공급을 해주었다. 깨어난 나는 크게 우는 남동생과 아직도 의사와 다투고 있는 남편을 보았다. 남편은 병원 측에 구급차를 불러 시내 큰 병원으로 옮기게 도와달라고 했다. 그들은 소용없다고 했지만 가족을 동정해 남편과 다투지 않았다. 남편의 주장으로 구급차를 불렀다.
기사도 동정했지만 소용없다고 가던 길에서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고 했다. 남편의 고집 하에 구급차 기사는 잠깐 생각하더니 알았다고 대답했다. 이때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남편은 집으로 전화해 병원비를 준비하라고 했다. 가족들은 5위안, 10위안도 마다않고 한 보따리를 빌려 왔다. 어머니는 스스로 모은 2만여 위안(한화 약 4백만원)을 내놓으려 했지만 두 언니가 말렸다. 여러 사람들이 먼저 도와주고 나서 보자고 했다.
나에게 진상을 알려주던 파룬궁수련생은 이때도 나에게 와서 알려줬다. 부디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워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미 방법이 없는지라 수시로 몇 마디 염하기도 했다.
시내 큰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응급처치를 끝내고 의사는 가족을 불러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내 상황은 아주 낙관적이 못되는데 혈소판이 적어 특수 병실에 입원하라고 권했다.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튿날 병원에서 수납을 독촉했다. 입원할 때 낸 1만여 위안은 이미 거덜 난 상태였다. 병원에서는 하루건너 한 번씩 혈액검사를 했다. 주치의는 남편에게 혈액은행에 가서 혈액을 사오라고 했다. 입원할 때 수혈한 400cc가 거의 다 소모됐다고 했다. 내 신체는 조혈의 조짐이 없었다. 그 때 혈액 100cc에 6백 위안(한화 약 12만원)인데 400cc면 2천 4백 위안이었다. 환자측에서 현금을 갖고 가서 혈액을 가져와야 했다. 나는 돈이 아까워 동의하지 않았다. 요 며칠간 쓴 돈만 해도 나에게는 이미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나는 주치의에게 음식으로 보충할 수 있는지 물었다. 사실 나도 입안이 다 헐어서 좁쌀죽이나 겨우 먹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주치의는 안 된다면서 사람에게 출혈이 발생하면 혈소판의 응고에 의해 지혈되는데 체외 출혈은 싸매서 지혈시킬 수 있지만 내출혈은 위험하기에 특수 병실에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내 신체에 면역력이 없기에 전염될까 봐 두려워서였다. 내가 동의하지 않자 의사는 치료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며 갔다.
내가 입원한 며칠간 남편은 의사들과 몇 차례 다투었다. 수혈할 때 가족의 서명이 필요했다. A형 간염, B형 간염, 에이즈… 골수 천자(가는 주사 바늘로 골수를 뽑아내는 일), 허리에서 천자할 때 가족이 서명해야 했다. 마비되고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으며 사망할 수도 있다고 했으며 남편이 의문을 제기할 때 그들은 알려주었다. “이것이 우리 병원 규정으로서 가족이 서명하면 우리는 하고 서명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남편도 답답해 내가 입원한 13층에서 뛰어내리고 싶다고 했다.
남편이 복도에서 담배를 피울 때 대법제자 한 분을 만났다. 그는 남편에게 알려줬다. 그는 이전에 오랜 약바구니였는데 파룬궁을 연마한지 14년 동안 약 한 알 먹지 않았다. 그의 이웃도 원래 백혈병 환자인데 대법을 믿고 역시 14년 동안 약 한 알 먹지 않았다고 했다. 남편은 돌아와서 나에게 말해주면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염하라고 했다. 우리는 함께 염했다.
하루가 지나 혈액을 검사하니 혈소판이 8만으로 올라갔고 상황이 안정됐다. 병원에는 퇴직하고 다시 스카우트해 온 교수가 있었는데 몸소 의사들을 데리고 병실에 와서 무슨 보양식을 먹었냐고 물었다. 그녀는 40여 년간 혈액환자들을 접촉해 왔는데 한 건도 낙관적인 사례가 없었다. 당시 나는 두려움 때문에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염해서 이렇게 됐다는 말을 감히 하지 못했다. 하지만 속으로 알기에 생각나면 곧 염했다. 일부 약은 부작용이 있는데 내 몸에서는 어떠한 증세도 나타나지 않아 의사도 궁금해 했다.
처음으로 화학요법을 하고 퇴원한 후 나는 신체가 이미 정상으로 회복됐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파룬궁수련생은 나에게 연공을 가르치고 책을 보게 했다. 하지만 화학치료를 할 때가 되자 또 병원에 갔다. 병원에 기독교를 믿는 미화원이 한 분 있는데 말을 하고 보니 한 고향 사람이었다. 나에게 매우 잘 대해줬다. 매번 우리 병실에 와서 청소할 때면 나에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기독교를 믿으면 얼마나 좋다고 했다.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말할 때 나는 믿지 않는다고 파룬궁을 믿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발칵 화를 내며 나에게 소리쳤다. “파룬궁을 믿는 사람들은 병원에 오지도 않는데 당신은 뭣 하러 왔어요?”
나는 단번에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생각했다. ‘그러네, 내가 뭘 하러 왔지?’하며 나는 속으로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퇴원한 후 의사가 매일 먹으라던 약을 한 알도 안 먹었다. 1천 위안(한화 약 20만 원)이 넘는 약과 병력서 들을 모두 태워버렸다. 남편은 매일 일하러 나가기에 모르고 있다가 화학요법을 하러 갈 때가 됐는데도 가지 않자 알게 됐다. 남편은 울면서 장모에게 전화했다. 딸이 화학요법을 할 때가 됐는데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파룬궁을 연마하려 한다고 했다. 마작은 이번에 지면 다음에 이기면 되지만 이건 아니라며, 만약 내기에서 지면 손실이 막심하다고 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딸의 병은 우리 가정에서 도와줄 수가 없구나. 우리보다 돈 있는 사람도 도와줄 수 없단다. 파룬궁을 연마하여 병을 고친 사람도 확실히 있으니까 딸이 연마한다면 연마하게 두렴. 정말로 그날이 온다고 해도 장모는 너를 탓하지 않는다.”
그 때부터 이미 12년이 됐다. 나는 약 한 알 먹지 않고 20대 보다 몸이 더 좋다. 키가 166센티미터였지만 50킬로그램을 넘은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70여 킬로그램이 됐다. 나를 아는 사람은 모두 내가 예뻐졌다고 말한다.
아들이 법속에서 성장하다
내 아들은 어려서부터 약골이었다. 매일 먹는 약값이 밥값보다 많았다. 내가 법을 얻을 때 아들은 6살이었는데 작고 말랐다. 나는 매일 아들에게 법을 읽어 주었고 이때부터 아들은 약을 먹지 않아도 됐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위장이 나빠서 자주 설사했다. 법을 얻은 지 얼마 안 되어 아들은 설사해도 약을 먹지 않고 매일 평소처럼 어린이집에 갔다. 나는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아이에게 약을 먹이지 말라고 얘기했다. 아들은 어린이집에 가면 모든 것이 정상이지만 집에 들어서면 첫 번째 일은 화장실에 가서 설사하는 것이었다. 연속 사흘 후 위장이 정상적으로 됐다. 아들이 글을 알 수 있을 때 우리는 한 사람이 한 단락씩 법을 읽었는데 하루도 빠트리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3백여 페이지가 되는 ‘전법륜’의 글자를 거의 다 익혔다.
나는 이전에 남편에게 진상을 알려주고 사부님의 ‘홍음2’ 중의 시 ‘일다(淘)’를 외워주었다. 남편은 나에게 사부님의 이 시를 보여 달라고 했다. 남편은 ‘홍음2’를 들고 한 페이지씩 넘겼고 아들은 한 페이지씩 읽어주었다.
중국공산당 매체의 선전영향을 받아 이전에 남편은 내가 아들에게 대법을 가르쳐주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내 백혈병이 낫기만 한다면 뭘 해도 간섭하지 않았다. 나와 아들은 남편이 나갔을 때 법을 배웠기에 그는 아이가 그렇게 많은 글자를 아는 줄 몰랐다. 아이가 아빠에게 줄줄 읽어 주자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아이는 아빠가 책장을 넘기는 대로 읽었고 아빠는 아이를 한 번 보고 책을 한 번 보고 또 아이를 한 번 보고 책을 한 번 보았다. 한참을 읽었지만 한 글자도 틀리지 않자 남편은 아들을 품에 끌어안고 웃으면서 물었다. “너 언제 이렇게 많이 배웠니?” 이때부터 한 번도 내가 아이를 데리고 법공부하는 걸 간섭하지 않았다.
한번은 열이 나서 아들의 작은 얼굴이 새빨개졌고 몸이 불덩이처럼 뜨끈뜨끈했으며 눈도 뜰 수 없었다. 남편은 당황해서 얼른 병원으로 보내려 했다. 나는 남편에게 안가도 된다고 알려주고 사부님께 청하고 아들에게 ‘홍음’을 외우자고 했다. 외운지 10분도 안되어 아이는 졸려서 자려고 했다. 남편이 아이의 몸을 만져보니 땀이 흠뻑 났고 손에도 땀이 가득했다. 이때 남편은 아이를 흔들어 못 자게 했다. ‘홍음’을 계속 외우라고 했다.
이제 막 학교에 가서 아직 한자를 배우지 않았는데 아들은 선생님을 도와 아이들의 숙제 책을 나눠줬다. 선생님은 의아해했다.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글자를 알까?’ 선생님은 아들에게 말했다. “만약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너 같으면 참 편하겠는데.”
나는 2010년에 천리 밖의 세뇌반으로 납치됐다. 경찰은 학교에 와서 아들을 교란했다. 그때 아이는 10살도 되지 않았기에 심리적으로 매우 큰 상처를 입었다. 아들이 어렸을 때 경찰을 매우 숭배했다. 커서 경찰이 되어 나쁜 사람을 붙잡고 백성을 위해 해악을 없애고 싶다고 했다. 내가 좋은 사람인데도 납치당하자 아들은 변호사가 되어 좋은 사람을 위해 변호하려 했다. 좋은 사람을 위해 말을 하던 변호사가 ‘실종’되자 아들은 커서 대통령이 되어 덕정을 펼쳐 백성들이 모두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게 하겠다고 했다.
내가 세뇌반에서 돌아온 후 아들의 선생님을 찾아 진상을 알렸다. 선생님은 말했다. “아이의 몸에서 당신의 가정교육이 다른 집과 다르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진선인 세 글자를 매우 숭배한다고 했다. 그녀는 다른 학교에서 전근되어 왔다. 이전에 파룬궁을 연마하는 동료가 있었는데 이 동료가 납치된 후 교장은 회의에서 전체 교사들에게 말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한데 묶어도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 한 사람을 따라오지 못합니다.” 교장은 능력범위 내에서 그 대법제자에게 편리를 제공해 주었다. 선생님은 또 자신이 입당하지 않았는데 공산당의 수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학교에서 아들에게 소선대에 가입하라고 하자 나에게 선생님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했다. 이튿날 아들은 선생님에게 편지를 가져다주었다. 이때부터 아들은 붉은 스카프를 매지 않아도 됐다. 한번은 한 학우가 내 아들은 왜 스카프를 매지 않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전 세계가 다 맬 때 아들도 맨다고 했다. 학우들은 모두 내 아들이 스카프를 매지 않아도 되는 것을 부러워했다. 한번은 주번학생이 바뀌어 아들이 스카프를 매지 않는 걸 몰랐다. 감점 기록을 하자 반 친구들이 주번 학생을 에워싸고 못 가게 했다. 아들은 한 번도 스카프를 매지 않았는데 교장선생님도 아는 일이라면서 너 한마디 나 한마디 했다. 감점 기록을 지워서야 보내주었다.
운동회에 아들은 연속 3년 8백 미터 우승을 했다. 선생님은 기뻐서 소리쳤다. “나는 너를 숭배할 지경이다. 체육, 학습 모두 훌륭하구나!” 누구나 아들을 보면 잘 생기고 단단하다고 한다. 중2때 지역 삼호(三好: 신체·학습·활동이 모두 좋음) 학생으로 선정됐다.
중학교에 올라가자 입단에 연관됐다. 남편은 먼저 선생님에게 전화해 아들은 입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개인 생각에 따른다고 했다. 중 3때 선생님이 바뀌어 남편이 또 전화했다. 그 교사도 자발적이라고 하면서 그녀의 이모도 파룬궁을 연마해 10여 년간 약을 먹지 않았고 매우 좋다고 했다.
지금은 과외가 붐을 이루기에 아이들은 하교한 후가 등교 때보다 더 힘들다. 이 수업이 끝나면 다음 수업을 해야 했다. 아들은 방학하면 집에서 나와 함께 연공하고 사부님의 각 지역 설법을 배웠다. 사부님의 법이 40여 권인데 아들과 함께 10여 번을 배웠다. ‘전법륜’은 매일 배운다. 아들의 모든 것은 대법을 배우기에 얻은 것이다.
남편이 대법에 들어오다
남편은 내가 대법 속에서 이렇게 수혜를 입는 것을 보면서도 주입된 무신론이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어 늘 어떤 의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에서도 내 백혈병을 어찌할 수가 없었고, 내가 연공해 건강을 회복하자 내가 대법을 수련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4번 납치당했다. 남편은 병원에 가서 내 진료 기록을 가져다 즉시 파출소에 가서 경찰에게 말했다. 그는 내가 파룬궁을 연마하는 걸 지지하고 대법에 감사한다며, 대법이 그에게 온전한 가정을 주었고 ‘헌법’을 뒤져 보았고 일부 관련 문건도 보았는데 14가지 사교 중에 파룬궁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그는 경찰에게 질문했다. “만약 구속했다가 내 아내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2010년 10월 나는 세 번째로 납치됐다. 경찰은 나를 천리밖 세뇌반에 보냈다. 남편은 아이를 친구 집에 맡기고 감찰원을 찾고 민원실에 가고 공안국에 가서 나를 납치한 경찰을 신고했다. 매번 그가 어디에 가려 하면 곧 택배를 보내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일을 다 보고 막 돌아오려 하면 곧 택배를 보낸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하여 그는 헛걸음을 하지 않았다.
남편은 좀 의아해 했다. “왜 이렇게 공교롭지?” 사부님께서 그의 천목을 열어 주셔서 내가 안에서 매우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현지의 한 백수는 대법제자가 날 납치한 경찰을 폭로한 스티커를 갖고 남편을 찾아가 말했다. 몇 년에 그는 파룬궁에 탄복했다고 했다. 한창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파룬궁의 진상 영상이 나타났다고 했다.(아마도 파룬궁수련생이 진상영상을 삽입한 것) 공산당은 지금까지 파룬궁을 제거하지 못했는데 파룬궁은 대단하다고 했다. 그는 함께 간 사람에게 누구에게 원한을 사도 파룬궁의 원한은 절대 사지 말라고 하며, 파룬궁의 원한을 사면 재수가 없다고 말했다. 남편은 그 며칠 좀 피곤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자 정신이 났다. 남편이 관련 부서를 찾아 석방을 요구하는 과정에 일부 양심이 있는 경찰은 우리 집의 사정을 듣고 눈시울이 붉어져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남편에게 진료 기록을 갖고 직접 불법적으로 감금한데 가서 석방을 요구하라고 알려주었다.
천리밖에 보내진 닷새 된 저녁 밤중에 그는 수련생과 운전해 세뇌반에 와서 나를 석방하라고 했다. 내가 시달리고 얻어맞았을까 봐 걱정되어 잘 휴식하지 못한데다 밤중에 장거리 운전까지 해서 졸리고 피곤했다. 반쯤 왔을 때 운전하면서 잠이 들려 했다. 이때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한번 쳐서 삽시간에 졸음이 달아났다. 옆의 수련생이 친 줄 알았는데 보니 그는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차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동안 지나자 그는 또 졸렸고 누군가 또 머리를 쳤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번이었다. 이는 사부님께서 그를 가호하신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내리자 날이 밝기 시작했다. 낯선 곳이라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대법제자가 말했다. “사부님께 요청하는 수밖에 없어요.” 이때 차는 마치 스스로 의식이 있는 것 같았다. 핸들은 남편이 잡고 있었지만 회전해야할 곳으로 회전됐다. 먼 길을 달려 길이 없어지자 남편은 브레이크를 밟았다. 다시 보니 도착한 것이었다.
세뇌반에 들어온 후 남편은 그들에게 나를 데리러 왔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질문했다. “당신들은 그녀의 구술에서 그녀의 상황을 알지요?” 세뇌반 반장이 접대했다. 우리 여기에서 잘 보살펴 주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남편은 책상을 치면서 그에게 크게 소리쳤다. “사람이 병이 안 도졌을 때는 누구나 잘 돌봐줄 수 있지만 병이 도지면 병원에서도 돌봐주지 못하는데 당신이 어떻게 돌봐줄 수 있습니까! 나는 일개 백성입니다. 당신이 입은 것은 제복이고 국가를 대표하는데 서명을 해주십시오. 사람이 당신 여기에 있으면 괜찮다고 말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시 우리 다시 얘기합시다.” 상대방은 감히 서명하지 못하고 대장을 찾아왔다. 대장도 감히 서명하지 못했다. 시간을 지연시켜 위에 보고하기 위해 그들은 전례를 깨고 남편에게 나를 감금한 방에 와서 보게 했다(이전에는 모두 나가서 가족을 만나 보았다). 수련생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가족의 신분으로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방안에 들어오자 남편은 털썩 나에게 무릎을 꿇었다. “나는 당신과 결혼한 그 날부터 당신을 잘 돌봐주겠다고 말했는데 지키지 못했소.” 나는 남편을 일으켜 세웠다. 뒤에 있던 지도원 대여섯 명이 놀라서 뒷걸음치는 게 보였다. 남편이 나가자 그들은 나를 에워싸고 부탁했다. “절대로 절대로 당신 남편에게 흥분하지 말라고 권하세요.” 나는 그들이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보았다.
교섭을 통해 세뇌반에서는 즉시 사람을 석방한다고 했다!
남편은 나를 위층에서 안아 내리고 첫 마디로 “나는 신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을 느꼈소! 오늘부터 나는 정식으로 대법에 들어가겠소”라고 했다.
그렇다. 만약 대법제자의 가족이 모두 이렇게 우리를 보배처럼 여긴다면 사악도 감히 거리낌 없이 우리를 박해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번의 성공적인 구출은 현지 수련생의 전반적인 협력을 떠날 수 없다. 박해를 폭로한 스티커, 메시지, MMS, 참여자에게 직접 전화하고 발정념하는 등, 현지 수련생은 무너뜨릴 수 없는 확고한 정체(整體)를 형성했다.
남편은 수련한지 얼마 안 되어 담배와 술을 끊었다. 남편은 13살에 담배를 피우고 14살에 술을 마셔서 나이는 많지 않아도 연령(煙齡), 주령(酒齡)은 적지 않았다. 젊었을 때 자주 엉망으로 취하게 마시고 옷도 언제 버렸는지 모른다. 그의 고모는 화가 나서 ‘얼간이’라고 부른다. 그의 아버지는 화가 나서 말했다. “네가 술을 끊으면 내가 밥을 끊지!” 집에서 그를 정상인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몇 없었다. 한번은 그의 큰 매형 집에 놀러 갔다. 그의 매형은 술을 마시지 않기에 매번 갈 때마다 자신이 술을 가지고 가서 마셨다. 돌아올 때 두 병이 남았는데 남편은 한 주머니에 한 병씩 넣어 갖고 왔다. 길에서 마신다고 했다. 큰 매형은 화가 나서 집에서 욕했다. “이 사람이 술을 끊을 수 있다면 내가 당나귀 똥을 여덟 바구니 먹겠네.” 두 아들에게 말했다. “크거들랑 너네 작은 외삼촌은 닮지 말거라.” 남편은 대법을 수련한 후 술담배를 모두 끊었다. 큰 매형은 두 아들에게 말했다. “너네 둘은 작은 외삼촌만큼만 하면 된다.”
남편은 50에 가까운 나이다. 수련하기 전에 몸의 근육이 느슨해졌는데 연공한 후 근육은 강철 같이 변했다. 한번은 한 한약방에 물건을 배달하러 갔다. 노 한의사는 그의 신체가 그렇게 건장한 걸 보고 맥을 짚어보더니 말했다. “당신은 쿵푸가 있군요.”
위대하신 사존께서 나를 지옥에서 끌어내시고 건강한 신체와 새로운 가정을 주심에 감사드린다!
원문발표: 2017년 5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신수련생마당>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한 이야기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5/7/34676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