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천지개벽 이래 우주의 정법 중 매우 영광스럽게 파룬따파(法輪大法) 제자가 되어 대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똑똑히 알리며 구도중생을 하는 것은 우리들의 책임과 사명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진법대도(眞法大道)를 주셨다. 광적인 탄압과 박해로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고통의 이익과 모순 중에서 자신을 수련하고 조금씩 안으로 찾고 자신을 순정하게 했다. 지금 수련과정 중의 약간의 심득을 사부님께 보고 드리고 수련생과 교류를 하려 한다. 부당한 곳이 있으면 자비롭게 시정해주시기를 바란다.
1. 과시심의 무지한 범죄
사부님의 불은호탕(佛恩浩蕩) 중, 사부님께서는 제자를 도와 신체를 정화해주시고 죄업을 감당하시며 심성을 제고하게 하시고 자비롭게 깨닫게 해주셨다. 내 생명의 특징 중에 과시심이 특별히 강했다. 수련을 하지 않을 때는 나쁘다고 느끼지 않았다. 사실 좋고 나쁨을 의식하지 못했다. 지금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겸손하고 예의를 갖춰 사양하는 수양이 없다. 근 1년 사이에 나는 이 마음이 얼마나 더럽고 무지한지 알게 됐다.
강산은 쉽게 바뀌어도 사람의 본성은 바뀌기가 어렵다는 속담이 있다. 사람이 나쁘게 변하는 것은 부지불식간의 과정이기에 선량한 본성으로 회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생명은 모두 이기적이다. 만약 수련이 아니면, 만약 사부님의 자비가 아니라면 근본적으로 사람의 집착을 제거할 방법이 없고 오직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중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을 친다. 수련을 했기에 과시심의 언행을 알게 됐지만 여전히 그것을 통제하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떠한 모순이 나타나고, 어떠한 일이 나타났을 때,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주었다. 모순이 발생한 두 사람이 자신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 외에, 제삼자마저도 자신을 생각해 봐야 한다고. 왜 당신에게 보게 했는가? 하물며 더욱이 우리는 직접 모순 속에 있는 한 사람임에랴. 왜 자신을 수련하지 않는가?”[1] 법공부 장소에서 어떤 수련생이 다른 수련생의 좋지 않는 점을 말하고 자신이 좋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나도 그 수련생과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서야 비로소 이 마음에 공력을 들여 점차적으로 그것을 통제할 수 있었다.
최근 사부님의 전법륜(轉法輪) 중의 과시심을 배웠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는 리(李) 스승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다. 여러 사람이 에워싸고 듣는데, 그는 거기에서 말하면서 자신의 이해를 보태어 주워들은 소식을 전한다. 무슨 목적인가? 여전히 자기를 과시하는 것이다.”[2] 갑자기 과시심은 첫째, 수구를 하지 않고 둘째, 참됨이 아니며 셋째, 사부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해를 보태어 주워들은 소식을 전한다.’[2]이며 난법인 것을 의식했다. 과시심은 난법을 조성하기 쉽다. 어떤 사람은 법리를 안다고 과시하거나 고상하고 오묘한 이론을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공동제고를 위한 것이 아니며 자신을 뽐내는 것이다. 순정하지 못한 심태 하에 아마 질투 혹은 숭배를 초래하며 이로 인해 모순을 조성하고 간격을 조성하며 더욱 심한 자는 난법을 한다.(겸허한 정상적인 토론은 포함하지 않는다.)
나는 안으로 과시심의 근본을 찾아야겠다고 의식했다. 내가 이 일념을 움직이자 사부님께서는 나를 가지하셨다. 동공(動功)을 할 때 머릿속에 일념이 나타났다. ‘내가 안 것은 모두 사부님의 원 말씀이며 모두 사부님께서 너에게 주신 것이다.’ 그렇다. 사부님이 없으면 이 일체는 없다. 나는 자신에게 반문했다. 사부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너는 어떤 사람이겠는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생명마저 보증하지 못하는데 너는 과시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속인 중의 업무능력과 생활능력 일체 모두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며 사부님께서 만든 것이며 네가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다. 무엇을 과시할 것이 있단 말인가?
아, 가장 기본적인 수양마저 없었다. 마치 부모님처럼 생명은 부모님이 인간 세상에 데려온 것이지만 너는 오히려 부모님의 양육의 은혜를 잊어버렸다. 너는 죄를 범한 것이 아닌가? 더욱이 우리를 사람에서 신으로 구도하시는 사부님임에랴? 네가 자신의 능력, 자신의 재간이라고 인식할 때 사부님을 어느 위치에 놓았는가? 사부님에 대한 불경일 뿐만 아니라 하늘의 공적을 훔친 것이며 난법의 전조이고 큰 죄를 범한 것이다.
사람은 정말 무지하다. 부끄럽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 사부님의 불은호탕으로 생명의 본성이 각성과 각오(覺悟)를 하고 수련인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승화하고 심령이 정화돼 인심이 선을 지향하며 도덕이 다시 상승을 하는 것이다.
2. 질투심은 만 가지 악의 근원
장쩌민은 전 우주에서 가장 사악한 자이며 질투가 습관이 됐고 그의 질투 때문에 진선인(眞善忍), 불법(佛法)과 맞섰다. 진선인을 수련하는 좋은 사람이 너무 많고 공산당원을 초과했기에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탄압하며 박해를 했다. 질투하는 자, 악인의 대표이다.
이런 말이 있다. 질투는 사람이 이성을 잃게 하고 살인, 방화 무엇이나 다 감히 하게하며 사람을 해치고 자신을 해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어린이가 학교에서 집까지 뛰어가는데, 그 문을 열기도 전에 그 집 안에서는 벌써 욕부터 나온다: 뭐 대단할 게 있느냐. 그저 백 점 맞은 거 아니냐? 뭐 호들갑 떨 게 있느냐! 누구는 백 점을 못 맞아본 것처럼! 이 두 가지 부동(不同)한 관념은 부동한 효과를 낳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질투심을 생기게 할 수 있는데,”[2] “질투심이 있는 사람은 남을 얕보고 남이 자기를 능가하는 것을 허용하지 못하며, 남이 자기보다 더 나은 것을 보면 그의 마음은 평형을 잃고 견디지 못하며 불복한다.”[3] “질투심은 연공에 극히 큰 장애이며, 연공인에 대한 영향이 아주 커서 연공인의 공력에 직접 영향을 끼치고 함께 도를 닦는 사람을 해치며, 우리가 위로 수련하는 것을 심하게 교란한다.”[3] 때문에 정을 위해, 명을 위해, 이익을 위해, 색을 위해, 질투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만 가지 악의 근원이다.
그러면 질투의 근원은 어디인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악자(惡者)는 질투심의 소치로 자신을 위하고, 화를 내며, 불공평하다고 한다. 선자(善者)는 늘 자비심이 있어, 원망도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 각자(覺者)는 집착심이 없으며 세인들이 환각(幻)에 미혹됨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4] 나는 질투심의 근원은 이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흉금이 너무 좁고 이기적이기에 다른 사람을 질투한다. 그러면 이기적인 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바로 나,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자아, 나를 중심으로 하는 자아이며 마음속에 단지 상처를 받지 않는 것만 생각하고 무엇이나 수용하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자아를 타파하는가? 다른 사람을 위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된다.
내가 없으면 질투는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어떤 일에서든지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하며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고 나중에 자신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바로 당신들이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나중에 자신을 생각(先他後我)하는 정법정각으로 수련하여 원만을 이루게 하려 한다.”[5] 나는 이기적인 것을 버리는 것은 바로 나를 버리는 것이고 자아를 버리는 과정이란 것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이 수련 중에서 질투심을 제거하지 못하면 정과(正果)를 얻지 못하는데, 절대로 정과를 얻지 못한다.”[2]
마음속으로 내가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 마음은 넓어지고 선하게 변한다. 위사위아(爲私爲我), 자신을 수호하는 일체 요소를 닦아버릴 때, 마음속으로 이기적이고 질투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천천히 그것을 제거해 버릴 수 있다. 듣거나 보거나 마음속에 조금만 언짢거나 원하지 않을 때, 불안정할 때 불편하거나 성이 날 때, 사람을 깔볼 때, 평온하지 않거나 독선적일 때 뭐지 하고 안으로 찾으면 자아가 질투하고 있었다! 만약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면 당신의 선한 마음은 늘 있지 않고 온화한 심태도 있을 리 없으며 더욱이 ‘자비’ 두 글자를 말하지도 말라. 우리는 또 우리가 법을 실증하고 구도중생을 저애하는 가장 큰 사심이 바로 두려운 마음이다. 두려울 때 생각해보라. 누구인가? 당신은 여전히 그 자아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선천적인 자아는 순진하고 선량하고 대자비하며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자아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수호하는 가짜 자아다.
무엇을 만나든지, 자신의 마음에 공을 들여 사람과의 왕래 중, 구도중생 중, 시시각각 자신의 일사일념을 지키고 후천적으로 형성된 이기적인 자아를 닦아버리면 비로소 선천적인 진아(眞我)가 나타난다. 진아에 우리가 갈수록 가까워 질 때 우리는 비로소 영원한 자비에 도달하고 사람 껍데기를 벗을 수 있으며 진선인(眞善忍)의 본성으로 회귀하며 신 우주에 들어서고 불법의 찬란함을 재현할 수 있다.
3. 진아와 자아를 똑똑히 분간하다
진아(眞我)는 하나지만 가짜 나(자아)는 아주 많다. 지금 중국인은 입을 열기만하면 거짓말을 한다. 사실 공산사당(共産邪黨) 문화가 만든 가짜 나는 선천적인 순진하고 선량한 진아가 아니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말하는 결점이 있다. 선하지 않을 때 늘 일종 강한 어조로 말하는데 똑같이 공산사당의 가짜, 악, 투쟁의 당 문화 요소다. 구세력의 참여, 게다가 공산사당이 전통문화에 대한 파괴, 도덕수양의 분실, 겸손하고 참고 양보하며 평온하고 배려하는 부분에 대한 결핍으로 시간이 지난 후 나도 후회하고 난처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말하는 행위는 내 사고를 거치지 않는데 어떻게 그것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 나는 방법이 없었고 걱정했다.
최근에 발생된 일인데, 단체 법공부에 참여했을 때 어떤 수련생이 그녀에게 아직 원영이 없어 세간법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당신이 원영이 없으면 당신이 구도한 중생은 어디에 둘 거죠?”라고 말했다. 이런 사고와 심사숙고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말하면 결과가 어떠한가? 자신을 과시하고 스스로 높다고 여기는 여전히 다른 사람보다 수련을 잘했고 높게 수련했다는 것이 아닌가? 질투를 일으키는 것이고 다른 수련생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아마 여러 사람은 각기 다른 생각이 있을 것이며 가져온 결과 역시 다르다.
동시에 모순이 발생하거나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늘 어떤 염두는 사람의 관념 혹은 구세력의 사유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나는 사부님의 한 설법이 생각났다. “사람의 사상에는 약점이 있다. 여러분은 장기간 진상을 알리는 중에서도 이 문제를 발견했을 것인데, 바로 선입견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웃음) 어떤 인식을 그가 받아들이면, 사람은 이 인식으로 그 이후의 것을 가늠한다. 이것이 사람을 만들었을 때의 결함이다. 그러나 이런 이치에 반하는 환경은 사람이 마난(魔難) 중에서 소업하고 진리를 찾아 걸어 나오는 데는 또 유리하다. 만약 이렇지 않다면, 사람이 법을 얻어 하늘로 되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쉽다. 사람이 무엇을 말하든지, 모두 올바른 이치로 탐구하고 가늠한다면, 이 환경은 영원토록 나빠지지 않을 것인즉, 그렇다면 사람의 사회가 아니다.”[6] 또한 생생세세 중 형성된 사람의 이치, 관념, 게다가 구세력의 교란과 배치가 있다. 그러면 우리의 사상 중에는 그것들의 많은 것이 만들어졌다. 만약 법공부가 적고 법에 적게 동화되고 착실히 수련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구세력의 이념 혹은 관념이 먼저 작용을 일으킨다.
내가 이것을 명백히 알았을 때 수련생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나는 다 받아들일 수 있고 마음이 불편하거나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시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말하는 언변이 좋은 나, 그것은 차분하지 않고 선량하지 않으며 강압적이며 혹은 구세력이 배치하거나 조성한 하나의 관념인 ‘가짜 나’일 뿐이다. 나는 명백히 알았고 마음이 훤하게 탁 트였고 자연적으로 그것을 통제했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2] 마지막에 완전히 그것을 소멸했다.
간혹 이치에 맞게 말하고 단지 온화하지 않고 선량한 어조가 부족하다고 여겨 줄곧 그것을 돌파하지 않았다. 간혹 방법이 없고 간혹 자신이 능력이 있고 다른 사람보다 강하거나 인식이 좋다고 여겨 득의양양하며 즐거워했다. 오늘 마침내 자신의 가장 큰 결점, 말할 때 온화하지 못하고 선하지 못한 하나의 요소를 돌파했다. 정말 사부님의 자비로운 점오에 감사를 표시할 방법이 없다. 동시에 약간의 자비에 대해 알았다. 우리의 표현이 좋고 나쁘든지 막론하고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의 그 진수(眞修), 선을 향하는 마음을 아끼시고 여전히 우리를 자비롭게 보호하시고 점오하신다. 비록 인식했지만 또 하나의 착실한 수련의 과정이 요구된다. 상처를 입은 사람, 혹은 수련생의 많은 이해와 관용을 바란다.
우리는 오직 법공부를 많이 하고 자신을 착실히 수련하고 사람의 과시심, 질투심, 쟁투심, 환희심 등 부패물질을 제거하고 사부님의 진선인 표준으로 자신의 일사일념을 지키자. “진정한 선과 악ㆍ좋고 나쁨을 분별해내며 인류의 층차를 벗어남과 동시에, 비로소 진실한 우주 및 부동한 층차, 부동한 공간의 생명을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다.”[7]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지설법4-2004년 시카고법회 설법’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파룬궁–제3장 心性(씬씽) 수련’
[4]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경지(境界)’
[5]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오스트레일리아 법회 설법’
[6]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9-씬탕런방송 토론회 설법’
[7]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 논어(論語)
문장발표: 2017년 5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5/8/3472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