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캐나다 청년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1998년 초에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고 2009년에 해외에 나왔다. 출국하기 전 나는 개인 수련을 비교적 중시하고 나에게 좋은 수련 상태를 유지하면서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배포할 것을 요구했다. 출국한 후 각 항목에 일손이 필요했기에 나는 일부 항목에 참여했는데 최근 몇 년은 주로는 션윈 홍보와 관광지 진상 알리기를 했다. 한 동안 오랜 시간 ‘일을 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겼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내가 아주 정진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늘 바쁘게 일했지만 내심은 ‘수련을 처음과 같이 하면’[1]의 그런 상태를 찾지 못해 괴로웠다. 고난에 부딪히면 나에게 집착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늘 외재적인 요소를 강조해 자신이 법과 점점 멀리 떨어진 것 같았다. 그 때 한 생명이 법을 얻었지만 법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내심이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작년 어느 날 한 수련생이 나와 교류할 때 나에게 최근 몇 해 개인 수련을 중시하지 않아 많은 집착이 아주 분명하게 표현된다고 일깨워주었다. 나는 처음에는 놀랐지만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세하게 생각했다. 수련생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수련을 20년 가까이 했지만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집착이 여전히 아주 완고했다. 이기심, 체면을 중히 여기는 마음, 질투심, 쟁투심, 원망심, 명리를 구하는 마음, 당문화 등. 그 다음 한 동안 자비로운 사부님의 배치로 나는 다른 수련생이 일상생활 속에서, 작은 일에서 마음 닦은 사례를 보고 듣고 자신을 대조해보니 내가 격차가 너무 크고 최근 몇 해 수련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을 느꼈다.
한 동안 나는 늘 유사한 꿈을 반복해서 꾼 생각이 난다. 꿈속의 나는 여전히 학생이었다. 평소 공부를 잘하지 않고 학과목을 잘하지 않아 시험을 칠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고 조급해하고 당황했다. 시험 치는 날 다른 일이 있어 나는 시험 치러 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생각났지만 시험을 놓쳐버렸다. 유사한 꿈이 한 동안 지나면서 반복해 나타났지만 나는 줄곧 무슨 뜻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이후에 어느 날 법공부를 할 때 나는 갑자기 그 꿈의 뜻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나에게 수련인의 가장 기본 ‘학과목’은 법공부, 연공, 발정념이라는 것을 점화해주신 것이다. 나는 모두 잘 완성하지 못했다. 법공부는 늘 형식에 치우치고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연공을 제때에 하지 않았고 발정념은 늘 사상이 딴 데로 갔다. 평소 작은 일에서 마음을 닦지 않는 등, 이런 것을 의식하고 나서야 내가 오랫동안 이렇게 많은 ‘학과목’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착실한 수련을 중시하지 않고 시험이 왔을 때 항상 의식하지 못하고 놓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련이란 心性(씬씽)의 경지와 대법제자가 중생을 구도하는 책임과 태도를 가리킨다.”[2] 이전에 나는 항상 뒤 단락에만 주의했다. 나에게 중생 구도에 대한 태도도 수련의 일부분이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앞 단락 “心性(씬씽)의 경지”를 홀시했다. 그래서 자신을 조정하고 착실하게 ‘세 가지 일’을 하고 작은 일에서부터 마음을 닦기로 했다.
질투심을 닦아버리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질투심이 아주 강했다. 부모가 다른 아이를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안 됐고 친한 친구가 다른 사람과 사이가 좋으면 마음이 불편했으며 늘 다른 사람을 깔보고 잘난 척했다. 수련한 이래 많은 시련이 모두 ‘질투심’을 겨냥해 온 것이었지만 줄곧 잘 넘지 못했다. 작년 어느 날 수련생이 밍후이 문장 ‘질투심을 닦아버리다’는 문장을 보내왔는데 글 속에 질투심을 묘사한 많은 부분이 나를 말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을 했다는 말을 들으면 속으로 의심했고 다른 사람이 나쁜 일을 했다는 말을 들으면 믿어마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이익을 얻은 걸 보면 자신이 무엇을 잃은 것처럼 괴로웠고 다른 사람이 손실을 보면 자신이 무엇을 얻은 것처럼 편안했다.” 질투심의 괴이한 심태를 남김없이 그려냈다. 나는 처음으로 심각하게 이상의 이런 심리 표현의 근원이 모두 질투심에서 온 것임을 의식했다. 오만하고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며 남보다 낫다는 등 심태가 질투심에서 온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면 사람이 수련한 모든 마음이 모두 아주 취약하게 변해 버린다.”[3] 다른 집착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 역시 완고한 질투심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전법륜’ 중의 질투심에 관한 그 장절 마지막 단락을 외웠다. 어떤 땐 출근하는 길에서 한 번 외우고 정념을 강화했다.
올해 션윈 매표 기간 내가 편견을 가진 그 수련생이 티켓을 괜찮게 팔았다. 거의 매일 팔았는데 나는 당시 거의 티켓을 팔지 못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의 최근 수련 상태를 보렴. 거의 매일 티켓을 파는데 너는 자신이 어찌된 일인지 찾아봐.”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명백한 일면은 질투심이 작용한 것임을 알고 그것을 부정하고 제거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심하게 부글거렸다. 그 후 사부님의 점화로 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들어왔다. “모든 대법제자가 다 수련을 잘 해야 우주는 완벽하고 번영할 수 있다.” 순간 나는 흠칫했다. 질투심 그런 물질이 많이 약화됐고 다른 사람을 낮잡아보던 마음도 없어졌으며 수련생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잇따라 사부님께서는 또 질투의 ‘질(嫉)’의 오른쪽 부분이 질병이라는 ‘질(疾)’, 일종 심리상 병태라는 것을 점화해주셨다.
시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다
요 몇 해 인간세상은 재미가 없다고 여기면서 줄곧 정법이 빨리 끝나 빨리 인간 세상을 떠났으면 했다. 이런 상태는 내가 수련을 잘 해서 집착이 없어서가 아니라 속세의 덧없음을 꿰뚫어 본 듯 인간세상에서 고생을 감당하지 않으려는 소극적이고 해이함인 것이다. 이는 시간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줄곧 여기에 머물러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다.
작년 여름 늘 관광지에서 진상을 알리면서 항상 시간이 부족하고 구한 사람이 너무 적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사부님의 법이 머리에 떠올랐다. “일명(一名)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로서 개인의 해탈은 수련의 목적이 아니다. 중생을 구도함이 비로소 당신들이 올 적의 큰 소원(大願)이며, 정법 중에서 역사가 당신들에게 부여한 책임과 사명이다. 그러므로 대량의 중생들 역시 당신들이 구도할 대상으로 됐다.”[4] 나는 내 이전 생각은 이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자아 해탈만 생각했지 중생의 안위, 우주의 번영을 첫 자리에 놓지 않고 소극적으로 감당하면서 차츰 자신의 중생구도 사명을 잊어버렸다. 자아 체험에 집착하면서 사(私)를 닦아버리지 않고서 어찌 원만할 수 있겠는가? 나는 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중생이 구도될 수 있게 제자는 인간세상에서 고생을 기쁘게 하겠습니다. 아무리 길어도 됩니다. 사부님께서 필요하시다면.”
우리가 오로지 자신을 수련하고 중생 구도를 생각할 때면 시간에 집착할 겨를이 없다. 다른 한 방면으로 법공부를 통해 나는 사부님께서 거대한 감당으로 연장해온 시간은 수련을 잘하지 못한 제자에게 기회를 주시고 우리가 집착을 닦아버리고 원만의 표준에 도달하길 기다리시는 것임을 알았다.
안으로 찾아 ‘자아’를 내려놓다
최근 ‘자아’라는 이런 물질이 아주 완고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늘 무슨 생각을 하면 자기를 위한 것이었고 자기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행위이며 생각이었다.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법공부를 하는데 어머니가 자꾸 틀리게 읽으셨다. 처음에는 인내심 있게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는데 여전히 잘 읽지 못하자 귀찮아하며 말했다. “잘 보고 읽으세요!” 그런데도 어머니는 여전히 잘못 읽어 나는 아주 화가 났지만 속으로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정말 상대방을 위한 것인가? 사심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너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계속 법을 읽으면서 나는 아주 빨리 원인을 찾았다. 내가 어머니 문제를 지적했을 때 어머니는 내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잘못 읽으셨다. 나는 어머니가 ‘내 말을 듣지 않아’ ‘내 말을 중시하지 않아’ 화를 낸 것이다. 내 기점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얼른 발정념으로 이 ‘나를 위한’ 마음을 제거했다. 그 후 법을 읽을 때 어머니는 다시는 잘못 읽지 않으셨다. 어머니 표현은 나를 수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수련생의 문제를 보았을 때 상대방에게 정말 문제 있는 것만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상대방의 표현으로 자신을 수련시키신 것이었다. 자기의 집착을 찾으면 상대방도 좋게 변한다는 것을 의식했다.
‘자아’를 집착하는 데에는 진상 알리는 중에서도 나타난다. 상대방이 삼퇴하거나 내 말을 인정하면 나는 아주 기뻐하고 상대방이 내 말을 무시, 반감하거나 욕을 할 때 나는 아주 속상해하면서 늘 중생의 반응에 기뻐하거나 슬퍼했다. 내심은 사람을 구하는 그런 신성한 감각이 아주 적었다. 이후에 나는 이런 상태가 옳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나는 생명이 구도되어 기뻐하거나 혹은 중생이 진상과 대법과 스쳐지나간 것 때문에 아쉬워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자신의 느낌에 집착하고 중생이 나에 대한 태도 때문에 기뻐하고 슬퍼한 것임을 의식했다. 나는 중생이 진상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모두 그와 이 개인 사이의 일만이 아니라 한 세계가 구도될 수 있는가에 달린 큰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진상을 알릴 때 나는 자신을 대표한 것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파견한 사자이고 중생에게 진상을 전하는 사람인데 개인적인 느낌이 다 무엇인가? 상대방이 진상을 알고 삼퇴를 했다고 하더라도 사부님의 가지가 없으면 작디작은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금생에 대법제자로 될 기회를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세상의 많은 중생들과 무슨 다를 바 있겠는가?
이후에 진상을 알릴 때 나는 자신이 비교적 평화롭게 중생과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심으로부터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겼고 상대방의 표현에 마음이 다시는 이끌리지 않았다. 가끔 움직였다 하더라도 즉시 심태를 조정할 수 있었고 자아가 느끼는 물질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때 상대방도 진상을 듣는 태도가 변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의 관념을 바꾸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과거의 승려, 내가 고대의 그 승려들을 보면, 그는 기본적으로 절 안에 머무르면서 복잡한 사회를 접촉하지 않는데, 그러면 그의 사상은 매우 단일하게 조성된다. 또 그는 항상 선정(禪定) 중이며 출정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매우 단일하게 조성되고,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하는 어떠한 염두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어 사상업력의 생성과 교란을 줄이게 된다.”[5]
이 단락 법을 배웠을 때 깨달은 점은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면 사상업과 관념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관념을 닦아버리려면 반드시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하는 어떠한 염두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어”[5]에 힘을 들여야 한다. 사람의 이치는 바른 법리가 아니라 흔히 반대로 된 이치다. 고비를 잘 넘기지 못할 때는 법을 잘 배우지 못해 사람의 관념이 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의식했다.
이전에는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법공부를 했지 전혀 법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전법륜’을 배운 횟수가 많았기 때문에 너무 익숙해 읽다보면 생각이 딴 데로 가버려 법리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런 상태를 바꾸기 위해 법을 베끼기 시작했다. 몇 단락 베끼고는 다시 돌아와 몇 번 읽었더니 법리가 보였다. 매일 몇 단락 법을 베낀 후 마음을 조용히 하고 다시 통독하니 효과가 비교적 좋았다.
법공부가 마음에 와 닿자 법리에서 어떤 것이 바른 법리인지 알게 되어 고비가 다시 왔을 때 첫 일념이 법을 생각할 수 있었고 마음도 많이 조용해져 사람의 일로 마음을 졸이지 않았으며 정이란 물질도 많이 담담해졌다. 관념을 바꾸는데 첫 걸음은 진아(眞我)를 똑똑히 아는 것이다. 생각이 나오면 먼저 진아에서 나온 것인지를 생각하고 법에 부합되는지 생각한다. 법에 부합되지 않는 생각은 제때에 부정하고 발정념으로 제거해야 한다. 수련인은 자신을 단속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런 것을 방임하지 말고 그런 좋지 않은 관념, 사상을 억제할 줄 알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련한지 이미 20년이 돼간다. 최근 나는 법 얻은 초기에 그런 상태로 돌아간 것처럼 안으로 찾아 마음 닦는 것을 중시하게 됐다. 어떤 때는 자신이 너무 형편없어 몇 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하면서 착실하게 수련하지 못해 사부님께 죄송하다고 생각될 때도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법의 마지막 시간에 사부님의 자비로운 점화로 마침내 나에게 아직도 그렇게 많은 집착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다시는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남은 시간에 빨리 대법에 동화되어 집착을 닦아버리고 심혈을 기울여 사람을 구하려고 생각했다. 걸어온 길을 소중이 여기고 미래의 길을 잘 걸어야 한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점화에 감사드립니다. 수련생의 사심 없는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9-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10-따지웬(大紀元)회의 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3-사람 마음을 내려놓고 세인을 구도하자’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싱가포르 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7년 5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5/11/34754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