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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온가족이 대법을 지지하자 연이어 복을 받다

/ 산둥 대법제자

[밍후이왕](경축 5.13 밍후이 특집) 나는 올해 66세로 20년 파룬따파를 수련하면서 몸도 건강하고 원기가 왕성하다. 이 몇 년 동안 우리 온가족은 모두 대법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직접 목격했고 또 모두 대법을 믿고 전력으로 대법을 지지해 많은 혜택을 받았다.

남편이 정의를 견지해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다

1999년 장쩌민 무리가 대법을 박해한 후 나는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다. 우리 온가족은 이것 때문에 대법과 나을 원망하지 않았고 파룬궁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박해는 착오적이라고 말했다.

거대한 압력에도 남편은 내가 계속 수련하는 것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대법과 나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남편은 나에게 알리지 않고 내가 제명당한 일로 노동 부서를 찾아가 민원을 제기하고 그들이 나를 제명한 근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남편은 여러 차례 민원실을 찾아가 명문 규정이 없이 나를 제명한 것은 불법이며 복직을 요구했다. 또 시장 접견일 제도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시장을 찾아가 시장에게 문건과 정책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결과가 어떻든 그는 한 마디 공정한 말을 하려 했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민원으로 아무런 소득이 없자 남편은 또 법률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2005년 남편은 나를 제명한 직장을 고소했다. 당시 사악의 박해가 극히 잔인한 상황에서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법정이 열렸다. 나와 남편은 함께 원고석에 섰다. 나는 당시 파룬궁의 진상과 내가 무엇 때문에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지 말했으며, 그들이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나를 제명한 것은 박해이며 반드시 나를 복직시켜야 한다고 천명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듣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동정과 찬성하는 눈빛을 보냈다. 피고가 많은 돈으로 로비한데다 또 당시의 사악한 형세에서 나는 패소하고 또 500위안의 소송비를 지불했다. 그러나 나는 정정당당하게 진상을 말했고 남편도 한 사람의 힘으로 박해자를 피고석에 세워 그들의 직권 남용과 부패를 폭로했다.

2008, 나는 산둥성 법제일보사 편집장과 연락이 닿았고 그도 나에게 박해받은 관련 자료를 써 보내라고 했다. 그는 상황을 알게 된 후 나에게 무상으로 법률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즉시 퇴직수속을 해줄 것을 요구하고 만약 퇴직수속을 해주지 않으면 이 사실을 신문에 폭로하겠다는 한 부의 자료를 작성해 내 자료와 함께 우편으로 우리 지역의 시위원회에 발송했다. 시정부는 폭로되는 것이 두려워 사회보장처 사람을 우리 집에 보내 직접 나의 퇴직수속을 해주었다.

남편은 직업적인 원인으로 늘 모 지역으로 출장을 나간다. 남편은 항상 개인 여관에 투숙하게 되어 여관 주인과 익숙하게 됐다. 여관 주인은 항상 몸이 불편하고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며 가정형편이 평탄하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남편은 그에게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의 큰 변화에 대해 말해주면서 진심으로 그들도 대법을 수련하고 진심으로 파룬따파 하오를 외우며 대법을 배울 것을 권했다. 원래 이 집안사람들도 이전에 대법을 수련했고 박해가 심해지자 수련을 포기했었다. 남편이 그들에게 새롭게 수련할 것을 권하자 그들은 아주 두려워했다.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서 나에게 이 일을 말하면서 그들을 위해 아주 애석해 했다. 그 후 남편이 매번 그 곳으로 출장 갈 때마다 나는 진상자료와 그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남편에게 주어 그들에게 전해주도록 했다. 끝내 그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나에게 대법서적을 달라고 했고 대법수련으로 다시 돌아왔다.

사당(邪黨)이 파룬궁을 박해한 18년 동안 나는 여러 차례 베이징으로 청원 갔다가 불법적인 감금을 당했지만 남편은 한 번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낮과 밤에 어느 때 나가든, 어느 때 돌아오든 그는 한 번도 간섭하지 않았다. 내가 집에 없을 때 그는 아무런 원망도 없이 모든 가사를 맡아했다. 남편은 아이들을 위해 밥을 해줄 뿐만 아니라 항상 나에게 물었다. “당신 외출하지 않아? 내가 전동차 충전해줄까?” 내가 외출하려고 하면 그는 금방 산 새 전동차를 타라고 했다. 어떤 때 남편이 여러 날 출장을 갔다 돌아오면 내 일에 지장을 준 것 같아 미안해하면서 나에게 집안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때로는 나도 미안한 생각이 들어 집안일을 거들려고 하면 남편은 괜찮아. 당신이 할 일만 잘하면 돼라고 말했다. 내가 친구들에게 삼퇴를 권할 때면 그는 옆에서 나를 도와 권하는 말을 했다.

출장가서 대법제자들이 그에게 진상을 알릴 때면 남편은 가족을 만난 것처럼 기뻐하면서 말했다. “저는 진상을 알고 있습니다. 제 아내도 파룬궁을 수련합니다. 아내는 OO라고 부릅니다.” 말 가운데는 자부심이 흘렀다.

올해 68세인 남편은 몸이 건강하다. 퇴직 후에도 직장에서 기술문제에 어려움이 있을 때면 남편을 불러 해결하게 한다. 남편은 퇴직했지만 퇴직월급에 재고용 월급까지 합하면 퇴직 후에 받는 월급이 젊을 때보다 더 많은데 정말 복을 넘치게 받고 있다!

아들이 대법을 지지하자 장사가 잘 되다

중국공산당이 1999‘7.20’부터 대법을 박해한 후 내가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려고 베이징으로 청원을 갈 때 아들은 자원해서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주었고, 또 승용차로 나를 베이징 역까지 실어다 주었다. 나는 베이징으로 다섯 차례 청원을 갔으나 다섯 번째는 베이징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붙잡혀 돌아와 현지 파출소에 감금됐다. 아들은 내 소식이 없자 내가 베이징에서 붙잡혔다고 생각하고 일체를 불문하고 베이징으로 가서 어머니를 찾았다. 아들은 베이징에 도착해 베이징 공안국, 파출소 등으로 찾아가서 내 소식을 알아보았으며 이후에 내가 현지에 감금됐다는 소식을 듣고 또 급히 집으로 돌아와 파출소로 찾아가 석방을 요구했고 나를 면회하려 했다. 파출소에서 모자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자 아들은 나를 감금한 파출소 문 앞에 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그의 효성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

내가 사는 집은 겨울에 난방시설이 없다. 아들은 겨울이면 나를 그의 집으로 데려가고, 또 사부님 법상을 그의 집으로 옮겨다 모시면서 이 방은 어머니 방이니 어머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다.

아들은 또 반() 박해에 참여했다. 한 번은 파출소 경찰이 우리 집에 와서 나를 붙잡아 가려 했다. 당시 아들과 며느리도 집에 있었는데 아들은 나를 붙잡아 가지 못하게 경찰을 막아서서 이치를 따졌다. 화가 난 경찰은 아들과 며느리까지 파출소로 붙잡아갔다. 이후 아들은 조금도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아들은 작은 음식점을 경영하는데 매일 많은 잔돈이 들어온다. 아들은 모인 잔돈을 진상지폐로 바꾸어 거스름돈을 줄 때 모두 진상지폐로 준다. 매년 설이면 집 문과 가게 문 양측에 모두 대법 주련을 붙인다. 현재 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아들의 음식점은 손님으로 붐빈다. 아들도 대법의 진선인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면서 음식재료를 속이지 않고 값도 공정하게 해서 판다. 경제적이고 위생적이며 입소문이 좋아 수익이 매우 좋다. 동업자들은 아들의 장사가 잘되는 것을 보고 그 비법을 알고 싶어 하는데 사실 비법은 아주 간단한바 대법을 지지하는 것이다.

아들은 30세가 되기 전에 사업적인 원인으로 녹내장에 걸렸다. 이 병은 안과에서 불치병이나 또 치료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칭다오에 있는 안과병원에 가서 수술하게 됐다. 의사도 수술 결과를 장담하지 못했다. 주치의의 아버지도 이 병에 걸렸는데 그의 아버지는 우리 지역에 있는 큰 병원의 유명한 의사였다. 그가 자기 아버지 눈을 수술했는데 수술에 실패했다. 아들은 대법의 아름다움을 믿었기에 수술대 위에서 줄곧 파룬따파 하오를 외웠다. 수술은 순리롭게 끝났고 효과가 아주 좋았다. 아들의 눈은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다.

내 손자는 금년에 15살이고 작년에 또 귀여운 손녀가 생겼다. 아들 일가족은 경제가 풍족하고 행복한데 온가족이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딸이 대법을 지지해 복을 받다

딸은 올해 만 30세다. 딸은 대학을 졸업한 후 순리롭게 한 기업에 채용됐고 외국어를 잘하기에  외국무역을 맡고 있다.

딸은 결혼한 후 첫 아기를 4.5되는 여아를 낳았다. 아기는 출생 후 신생아실에 있는 동안 울지 않았다. 의사는 아기가 울지 않으니 다른 의사에게 회진하게 한 후 또 소아과에 가서 관찰하게 했다. 소아과에 간 후 간호사는 아기에게 수액을 놓기 위해 아기의 머리를 깎았다. 나는 아기에게 병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기에게 파룬따파 하오를 쉬지 않고 알려주면서 너는 사부님이 관여하시기에 위험이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사부님께 아기를 구해달라고 빌었다.

아기의 할머니는 걱정되어 괜찮을까라고 물었다. 나는 괜찮아요. 우리 함께 사부님께 빕시다라고 했다. 바로 간호사가 아기에게 머리를 깎아줄 때 아기가 갑자기 왕 하고 크게 울면서 더러운 것을 토해내고 완전히 좋아져 병원에 입원하지 않아도 됐다.

이 일은 의사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미 3살이 되는 아기는 아무 병도 없고 총명하고 사랑스럽다. 우리 온가족은 사부님께서 아기를 구해주셨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올해 3, 딸은 둘째를 낳았다. 병원에 들어간 지 한 시간이 되어 5.5이 넘는 남자아이를 나았다. 의사는 이렇게 큰 아기를 순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지금 산모와 아기도 모두 건강하다.

딸은 어려서부터 나를 따라 수련했다. 딸도 두 번이나 베이징으로 청원을 갔다. 내가 제일 처음 베이징으로 청원을 갔을 때 딸도 가겠다고 해서 내가 물었다. “청원하러 가는 것은 위험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너는 두렵지 않니?” 딸은 앳된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했다. “두렵지 않아요. 우리에게는 사부님이 있거든요!” 우리 모녀는 톈안먼에 가서 해야 할 일을 하고 무사히 귀가했다.

두 번째로 청원을 갔을 때 나는 가지 않고 13세 되는 딸은 한 아주머니를 따라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 이번에 붙잡혀 돌아온 후 다른 파룬궁수련생들과 함께 파출소에 감금되어 박해를 당했다.

딸은 이후에 학교 공부에 바빠지고 대학 진학 후에는 봉폐된 환경에서 점차 수련을 느슨히 하게 됐으나 대법은 이미 딸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2015년 장쩌민 고소 대열풍에 딸도 실명으로 장쩌민을 고소했다. 딸은 자신이 학교에서 받은 박해사실을 써냈다. 나는 이때서야 딸이 학교에서 지명 비판을 받고 많은 사람 앞에서 검토를 하는 등 아주 엄중한 박해를 당하면서 매우 큰 압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딸은 용감하게 이런 것을 폭로해 장쩌민 무리의 죄악을 성토했고 정의를 위해 외쳤다.

내가 무엇을 하던 무릇 대법에 관련되는 일이면 딸은 모두 지지했다.

작년 딸은 중간 간부로 승진했고 월급도 7, 8천 위안이 된다.

딸은 대학을 졸업한 몇 년 동안에 가정이 행복하고 좋은 일이 끊이지 않는다. 30세 되는 딸은 정말 생각만하면 성취됐다. 사실 이 모든 복은 대법에서 온 것이다! 딸은 사부님과 대법의 은덕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문발표: 2017513
문장분류: 수련교류>경축 ‘513’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5/13/34676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