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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모의 담당

글/ 헤이룽장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의 첫 결혼은 아버지가 독단으로 성사시킨 것인데, 결혼 후 3년 만에 남편은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당시 내 나이는 30세였고, 3세의 딸이 있었다. 나는 원래부터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데다가 남편마저 사망했고 생활형편도 좋지 않아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어려움을 받았으며, 날이 갈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 되었다. 특히 건강상태가 안 좋았는데, 위장병, 담낭염, 편두통, 류머티즘, 저혈당, 사지무력증 등등의 질병으로 일 년 내내 약을 달고 살았다. 나는 그처럼 병마에 시달리면서 늘 생각했다. ‘불치병도 아닌데 왜 낫지 않을까? 누가 나를 구할 수 있겠는가?’

내가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울 때 어떤 사람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성실하고 고지식한 좋은 사람이었지만 비축한 돈은 한 푼도 없어서 생활이 여유롭지 못했으며, 또 슬하에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응석받이로 키워서 제멋대로의 성격이었다. 그러므로 그 아이는 나에게 큰 부담이 되었는데, 살림도 넉넉지 못해 아이 둘을 키우다보니 나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살림살이였다.

나는 1997년 친척의 권유로 ‘전법륜(轉法輪)’을 읽게 되었는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의 구절마다 내 생명의 미시적인 곳에까지 닿았다. 그 때 나는 책을 받쳐 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으려고 했던 바로 그것이다. 오직 사부님께서만 나를 구해주실 수 있으니, 나는 영원히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수련을 시작하자마자 사부님께서 내 몸을 정화해 주셨고, 한 동안의 수련을 거쳐 내 일신의 병은 전부 사라지고 정상상태에 도달했다.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렸던 나는 드디어 무병상태의 쾌적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부담스럽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일을 하면서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정말 사람을 구하러 오셨다. 대법이 없었다면 나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재혼해서 새롭게 가정을 꾸렸기 때문에 전실 자식에 대해서는 전형적인 계모였고, 계모노릇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세인의 눈으로 보는 일반적인 계모의 인식은 마음씨가 악독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법제자이므로 모든 사람을 착하게 대해야만 했다. 결혼 후 전실 자식은 나를 엄마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어떤 호칭으로도 부르지 않았다. 그 애의 마음속에는 오직 자기를 낳은 엄마뿐이었으므로 나를 배척했고 냉대했으며, 무슨 일이든지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그래서 한번은 “얘야, 그렇게 말하는 건 예절이 없는 거야. 남이 본다면, 너를 교양 없는 애로 볼 것이다. 네가 날 이모라고 불러도 괜찮아.”라고 말해주었는데, 그 애는 무작정 울기부터 한다. 내가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대해주어도 그는 매번 그랬다.

초등학생인 내 딸애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아직 퇴근 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전실 딸이 내 딸을 늘 괴롭혔는데, 심지어 딸애를 집안에 있지 못하게 해서 숙제도 못하고집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지치면 쭈그려 앉아 나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내가 퇴근할 시간이될 무렵이면 전실 자식은 내 딸애를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식으로 아주 지능적으로 괴롭혔다. 한 번은 딸애가 병이 나서 퇴근해 딸애를 데리고 병원을 가려고 집에서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왔는데, 그때 전실 딸애가 집안에서 화를 내며 ‘탕’하고 문을 걷어차 열고는 나와딸애의 책가방을 마당에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책가방을 집어 들고 집안에 들어갔다. 그때 전실 딸애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가져가요!” 어디로 가져가느냐고 묻자,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또 울어댔다. 나는 그에게 “잘 생각해 보라”고 말했을 뿐이다. 하루는 내가 퇴근해 돌아와 보니, 전실 딸애가 세수 대야에 양말을 빨고 있다가 내가 돌아온 것을 보고 양말과 함께 더러운 물통에 쏟아 붓고 대야를 바닥에 내동이치는 것이었다.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화가 치밀었고, 참을 수가 없어서 몸이 떨렸다. 그래도 겨우 참으면서 말했다. “대야를 그렇게 내동댕이치면 망가지지 않겠니?” 그녀가 말했다. “내가 자주 그러는 것도 아닌데?” 나는 그래도 수련생이니 참자고 생각했다.

그녀는 중학생인데, 학교에 가지 않았다. 말로는, 돌아다니다가 늘 PC방에 간다고 했다. 그녀는 키가 늘씬하고 얼굴도 예뻐서 어디를 가든 남의 이목을 끌었다. 한 번은 자기 엄마한테 간다며 나갔는데, 이틀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그의 학교친구가 찾아와서 “걔는 자기 엄마에게 갔다”고 알려주었다. 학생의 말로는 그녀는 당일로 돌아왔다고 했다. 좀 걱정이 돼서 어디에 가서 애를 찾아야 할지 난감했다. 그 애는 “아마 PC방에 있을 거예요.”라고 했다. 나는 직장에 휴가를 내고 전실딸애를 찾으러 나섰다. PC방이 어디 있는지 몰라, 택시기사에게 부탁해서 PC방에서 그녀를 찾았다. 내가 앞에 나타났어도 그녀는 조금도 놀라거나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내게 물었다. “당신, 왜 왔어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집에 가자. 그만 놀아라. 네 아빠가 널 찾는다. 아빠가 일도 나가지 못했다”(남편은 삼륜택시를 몰았다). 그녀는 놀던 것을 마치고 가겠다고 했다. 이번엔 화가 좀 났다. 그 애 아빠는 평소 그녀를 설득할 수도 없고, 관리할 수도 없는 상태라,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네가 집에 있을 수 없는 것도 아닌데, 네가 밖으로만 돌아다닌다면 되겠느냐? 나를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아빠를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니냐? 아빠는 50이 넘은 사람인데도 아직 차를 몰고 있다. 네가 그렇게하면 운전하다가 정신이 산만해져 무슨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넌 후회하지 않겠니?” 그녀가 말했다. “내가 집을 나온 것은 바로 당신 때문이야!” 그때 나는 화가 치밀어 온 몸이 떨렸다. 마음을 움직이지 말자고 했지만, 그래도 움직인 것이다.

나는 비록 출근을 해도 날마다 마음이 우울하고 답답했다. 하루는 동료가 물었다. “이모,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막 울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사실 그의 말대로 한 바탕 울고 싶었다. 내가 고심하면서 도처로 찾아다닌 것은정말 전실 딸을 생각하고 책임지기 위해서였다. ‘내 딸애도 있지만, 전실 딸 역시 내 슬하에있으니 내 아이가 아닌가? 그런데 그 애는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가?’ 마침 그 시기에 사부님께서 신경문을 발표하셨는데 그 중에 “매우 홍대(洪大)한 관용”이란 한 구절의 법이 있었다. 바로 그 한 구절이, 돌처럼 굳게 막혔던 내 마음을 단번에 녹여버렸다. 나는 마치 창문을 활짝 연 듯이 내가 그녀를 관용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부님의 법은 나를 계발해 주셨으므로,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됐다.

하루는 물만두 빚을 준비를 하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나와 함께 물만두를 빚자. 그녀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물만두 빚기 전에 이모, 당신 하고할 말이 있어. 그 동안 우리 둘은 잘 다투었어. 수련을 몇 년이나 했다면서 수련을 잘하지 못했구나.” 나는 “모두 내가 잘못했다. 내가 수련을 잘하지 못해 너를 너그럽게 대하지 못했구나.” 아직 내말은 다 하지도 못했는데, 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대법의 진상을 알려주고, 사회기풍 등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인정하기 시작했다.

후일 그녀는 또 밖으로 나돌면서 후베이에서 일하러 온 젊은이를 알게 됐고, 은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젊은이가 그녀를 그의 외삼촌댁이 일하는 현장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 가족은 누구도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를 알 수 없었는데, 어느 날 그녀의 학교친구로부터 “후베이 청년을 따라 갔다.”는 말을 듣고 참담했다. 유괴 당했을 거라는 다급한 마음에 그녀의 친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우리 둘이 함께 하얼빈 역에 가서 그녀를 찾았다. 그 때 나는 수련이 성숙되지 못해 ‘정’의 감정이 심했으므로 그녀를 나의 자식으로 생각하며 걱정을 했다. 그래서 차 안에서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자, 오히려 그 애 엄마가 나를 타이르며 위로해주었다. “언니, 울지 말아요. 그 앤 괜찮을 거애요.” 후에 이웃 수련생의 도움으로 수련생의 고향에서 그녀를 찾았다. 찾았을 당시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그녀를 책망하지 않았다. 이런 사유, 이런 마음, 이런 행동을 가진 아이를놓고 나는 몹시 괴로웠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그를 타이르고 설득해서 그녀를 기술학교에 보내 다시 공부시켰다. 그때 그녀가 아직 어려서 너무 일찍 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수련인이니 남을 선하게 대해야 하고, 계모이기는 해도 전실 딸도 내 친딸처럼 대해주고 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전실 딸을 먼저 생각하며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전실 딸애는 나에게 갖고 있던 편견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마음을 개변했고, 대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2003년 가도사무실 주임의 밀고로 610에 납치되어 한 달 정도 박해를 당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전실 딸애가 내게 말했다. 내가 납치당한 후, 즉시 대법책을 책가방에 넣어 학우 집에 가져다 놓았다고 했다. 내가 “누가 너에게 이웃(수련생)이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연락을 했냐?”고 묻자, 그녀는 혼자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라고 말했다.

2014년 전실 딸 부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고속도로에서 브레이크고장으로 분리대를 들이받고 자동차가 전복되는 큰 사고를 당했는데, 전실 딸은 차창 밖으로 튕겨져 나가떨어진 후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 받았다. 우리 부부는 다음날 정오 때야 병원에 도착 할 수 있었는데, 딸애는 왼쪽 눈 주위를 다섯 바늘 봉합을 했고, 좌측 어깨 골절상과 오른 쪽 갈비뼈 두 대가 골절된 그렇게 중하지 않은 상처를 입었을 뿐이고, 그 외, 차에 타고 있던 3명 모두도 생명에 지장 없는 그런 정도였다. 마침 사고처리 경찰관이 기사의 친구여서 사고현장을 보고 울기까지 한 큰 사고였다. 자동차가 전복된 장소가 아주 깊고 또 사고차량은 폐차처분 될 정도로 파손이 심해서 사람들이 모두 죽은 줄로 알았다고 했다. 그런 교통사고라면 통상적으로 사람이 모두 살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딸에게 물었다. “너의 의식이 깨어난 후 생각한 게 뭐냐?” 그녀가 말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사부님께서 그녀를 보호해 주신 것이다.

지금 나의 이 딸은 마음속으로부터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계모인 나도 좋다고 말한다. 그녀의 친 엄마도 나에게 말한다. “당신은 걔를 정말 잘 대해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저작: ‘각지설법2’ ‘2002년 미국플로리다법회설법’

원문발표: 2017년 4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4/16/3427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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