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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심을 제거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지금 다른 사람이 잘못해 나에게 괴로움, 번거로움, 불편을 가져다주면 나는 이렇게 한다. 첫째, 우선 먼저 원망하지 않고 상대방이 나에게 심성을 닦으라는 기회를 제공해준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본다. 둘째, 타인의 각도에 서서 생각한다. 그가 고의적이 아니기에 그를 이해해주고 용서해준다. 혹은 그가 이미 매우 노력했기에 내가 또 그를 원망하면 그도 견디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셋째,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고려한다.

원망은 사전에서 마음속의 불만이나 증오라고 해석한다. 나는 원망하기를 좋아한다. 상대는 주로 남편과 언니인데 그들과 많이 접촉하기 때문에 생활 중에서 자주 원망하게 된다. 예를 들면 남편이 채소나 과일을 많이 샀는데 신선하지 않으면 나는 즉시 원망한다. ‘왜 이렇게 많이 샀지? 언제 다 먹지? 이렇게 시든 채소도 사가지고 오다니!’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또 예를 들면, 점심 혹은 저녁에 그가 늦게 퇴근하면 한참을 기다리다 안 오면 할 수 없이 전화로 물어본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또 이렇게 생각한다. ‘미리 나에게 먼저 알려주면 내가 급하게 밥을 짓지도 않고 또 밥을 데우지도 않았을 텐데.’ 이런 유사한 일이 매우 많다.

수련 이후, 일에 부딪히면 참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다시 위에서 말한 일에 부딪치면 점차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바로 자신에게서 찾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온 것만 해도 괜찮은데 트집 잡지 말자고 생각했다. 법리에서 인식하지 않았는데 이 집착심을 제거해야 했다.

원망의 배후는 무슨 마음인가

왜 원망하게 되는가? 자세히 생각해보면 채소, 과일을 많이 사면 냉장고에 넣어 보관해야 한다. 시간이 길면 변질돼 신선하지 못하고 또 고르기도 번거롭다. 또 남편이 늦게 오면 그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갔는지, 차가 고장 났는지 등 이런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과 정, 그리고 짜증나는 마음이 있어 원망한다.

다시 아래로 찾아보니 이런 마음의 배후에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 왜 귀찮을까? 배후에는 조바심이 있다. 왜 조바심이 날까? 무슨 일을 하기도 전에 마음속은 이미 행동의 시작과 끝날 시간 및 과정에 대해 이미 예상하고 있다. 만약 예상대로 완성하지 못하면 마음속은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이때 스스로 좁은 울타리에 갇히게 되면 감정이 조금씩 격앙되고, 말하는 속도도 빨라지며, 목소리도 높아지고 심지어 초조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어느 일요일 오전, 우리 집에서 수련생 언니와 법공부를 다한 후 오후에 자료를 배포하려 했다. 남편과 20여세 아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밥을 하고 반찬을 많이 하려고 했다. 나 혼자 주방에서 바삐 보내고 그들은 각자 자기 일을 했다. 평소 나는 전기밥솥에 밥을 할 때 늘 동시에 계란찜도 밥솥에 같이 한다. 밥이 거의 될 때 계란을 푼 그릇을 밥솥 안에 넣는다. 왼손으로 뚜껑을 열고 오른손으로 그릇을 넣는데 될수록 빨리 해야 한다. 나는 집게로 그릇을 집어 밥솥 안에 넣을 때 실수해 그릇을 솥 가장자리에 부딪치고 말았다. 계란이 한꺼번에 쏟아져 안팎으로 다 흘리는 바람에 화가 치밀었다.

내 비명소리를 듣고 그들은 모두 와서 보았다. 나를 달랠수록 화가 더 치밀어 원망하는 말도 쏟아져 나왔다. 밥과 반찬을 또 다시 해야 하는데 세 사람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누구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자료를 배포하는 일도 물거품이 됐다.

‘가정 문제’로 원망하다

나는 왜 늘 원망하기를 좋아하는가? 이것은 아마 어머니와 관련 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예를 들면 어머니가 아버지 집에 시집갔는데 동서들이 순번을 정해 아침밥을 했다. 그때는 등잔불을 사용했다. 첫날 저녁, 아버지는 쌀독에 수수를 넣었는데 이튿날 아침에 어머니는 수수를 수수쌀인줄로 알고 큰가마로 밥을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수수를 넣었다고 말하지 않아 쓸데없이 힘들게 했다고 아버지를 원망했다. 또 예를 들면 아버지의 반대로 어머니는 그해 직장에 다니지 못해 이후에 공장에서 줄곧 임시공으로 일하는 등등이었다.

나도 결혼 후 남편을 원망하기 좋아했다. 특히 그해 겨울, 나는 병원에 입원해 아이를 해산했다. 저녁, 떠나기 전 남편은 내 슬리퍼를 침대 밑에 넣었다. 밤중에 침대에서 내려 소변을 보려고 했는데 발이 슬리퍼에 닿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두발을 먼저 차가운 시멘트바닥을 밟을 수밖에 없어 마음속으로 남편을 원망했다. 또 퇴원 날 집에 와서 남편은 동료들을 배웅하러 나갔다가 열쇠를 갖고 나가지 않는 바람에 나는 솜신을 질질 끌고 신고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 결과 발꿈치가 아파 땅을 밟지 못했고 아주 오랜 시간 치료해서야 나았는데 이 일로 인해 나는 더욱 원망했다.

한 마디로 말해 자신의 생각, 기대, 의향에 부합되지 않거나 자신에게 고통을 조성해주기만 하면 나는 모두 원망했다. 그것이 유래가 깊고 또 익숙해서 하기 쉽거나 관계가 매우 밀접해도 원망했다.

사실, 원망은 결과를 조성한 책임과 원인을 모두 상대방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마치 책임이 없다거나 무고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다. 타인을 부정하면 틀림없이 자신을 스스로 높이게 되고 이로 인해 생기는 원망은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친다.

법리를 깨닫고 원망심을 버리다

사부님의 설법, “악자(惡者)는 질투심의 소치로 자신을 위하고, 화를 내며, 불공평하다고 한다. 선자(善者)는 늘 자비심이 있어, 원망도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 각자(覺者)는 집착심이 없으며 세인들이 환각(幻)에 미혹됨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1]를 공부하고 나는 생각했다. 7~8년을 수련했는데 아직도 이 원망심을 제거하지 못하고 선자마저 못되다니, 또 고생을 낙으로 삼지 않으면 각자와 거리가 얼마나 멀까, 그래서 나는 서둘러 수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사부님께서 나의 이 소망을 보셨는지 나에게 하나의 기회를 배치해주셨다. 며칠 전 나와 언니는 쇼핑을 하면서 인연 있는 사람에게 진상을 알렸다. 길에서 나는 언니의 재촉 하에 잘 보지 않고 치마 한 벌을 샀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치마 지퍼가 고르지 않아 울퉁불퉁한 것을 발견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또 원망했다. ‘왜 뒤에서 잘 봐주지 않았지? 이렇게 분명한 흠집을 왜 보지 못했을까?’ 그러다가 나는 문득 크게 깨달았다. ‘아, 언니의 세심하지 못한 것을 갖고 원망하기 좋아하는 내 마음을 폭로했구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그것을 발견하고 제거할 수 있단 말인가?! 제대로 사지 못한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구나!’ 나는 갑자기 사부님이 말씀하신 “옳은 것은 그이고 잘못된 건 나이니”[2]를 명백히 알게 됐다. 이 점을 인식하고 나니 내 마음은 단번에 홀가분해졌다. 동시에 나는 과거의 그런 여러 차례 비슷한 경험을 모두 무시해 기회를 놓쳐버린데 대해 매우 후회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이 도덕적 규범과 단속이 없는 가운데서 한 일은 곧바로 마성이다. 부처수련이란 바로 당신의 마성을 제거하고 당신의 불성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3]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사람의 불성은 선(善)으로서, 자비로 표현되며 일을 함에 우선 남을 고려하고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3] 법에 대조해보니 이 원망도 마성이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인식했다! 나는 열심히 노력해 일을 함에 우선 남을 배려하기로 했다.

그날, 나와 언니는 똑같은 라디오를 하나씩 샀다. 이튿날, 언니는 우리집에 와서 그 라디오가 메모리 기능이 없다고 나에게 알려줬다. 나는 매우 놀라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말했다. 실험해보니 정말로 없었다. 순간 생각이 떠올라 나는 “나는 언니가 먼저 사서 시험해보라고 했는데 기어코 나까지 사라고 하다니”라고 말했다. 이렇게 또 원망하면 안 된다고 나는 바로 깨달았다. 그러자 언니는 “그러면 우리 가서 다른 걸로 바꾸자”고 말했다. 나는 가서 바꾼다면 틀림없이 상가에 번거로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니에게 라디오로 뭘 하느냐고 묻자 연공한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이고 이 메모리 기능은 필요가 없으니 우리 바꾸러 가지 말자고 했다. 언니도 그럼 그러자고 해서 일은 이렇게 해결됐다. 내 마음은 매우 평온했다. 나는 마침내 이 원망하는 마성에서 벗어났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경지’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홍음3-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불성과 마성’

원문발표: 2016년 3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3/19/34447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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