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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에 대해 가볍게 논의

글/ 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경문 검색창에서 ‘엄숙’을 검색할 때 나온 문장은 9페이지였고 모두 85편 문장에서 언급되었다. 수련 중의 ‘엄숙’이란 단어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오늘 나는 무엇이 엄숙인지를 교류하려 한다.

1. 생활 중의 작은 일에 엄숙하지 않다

세 가지 일은 사람을 구하는 큰 일 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은 명확히 알고 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법에서 명확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작은 일에서 수련생이 느슨해진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가족을 위해 애완동물을 기른다. 입으로 자신은 어떻게 싫어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아주 좋아한다. 그 동물이 굶고 추위에 떠는 것을 볼 수 없다. 또 어떤 수련생은 꽃을 기르고 매일 생각하고 사부님께서 식물을 기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사부님께서 전에 인도 바라문교의 수련인이 사슴을 기르는데 집착해 수련해 내지 못하고 죽고 난 뒤 한 마리 사슴으로 전생해 자신의 수련을 망친 이야기를 하시지 않았는가? 우리가 동물을 기르고 식물을 기르면 걱정하고 그것을 보호하고 사랑하지 않는가? 이것은 수련 중의 큰 장애가 아닌가?

어떤 수련생은 감주를 마시고 알코올이 함유된 음식을 먹으며 “사부님께서 단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셨지 알코올이 들어있는 음식을 먹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한다.

어떤 수련생은 TV를 보는 것이 좋지 않음을 알면서도 끊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사부님의 법을 왜곡해 ‘사부님께서 이지력이 확고하지 않는 사람은 쉽게 교란당하니 보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는 모든 나쁜 물질을 저애할 수 있고 바른 에너지를 받아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부류에 속한다는 것이다. TV는 속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안에 칠정육욕이 포함되지 않으면 속인을 흡인(吸引)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말하는 바른 에너지도 정의 일종이다. 어찌 수련에서 수련해낸 자비심과 논할 수 있겠는가? 사실 사부님께서 명확히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구실로 삼아서는 안 되고 당신이 수련에 엄숙한 마음이 있는가를 봐야 한다. 작은 일도 수련원만의 길에는 장애가 될 수 있다. 당신이 시종일관 정진하고 원만하려 생각하고 엄숙하게 수련을 대한다면 자신에게 장애를 만들 필요가 있는가?

2. 불이법문에 대해 엄숙하지 않음

주변의 일부 수련생은 불이법문의 문제에 대해 아직 다른 종교의 것을 접촉하지 않는 것에 만 머물러 있다. 그리하여 일부 방면에서 엄숙성을 소홀히 한다.

어떤 수련생은 띠와 별자리, 점을 보는데 흥미를 가지고 자주 주변 수련생에게 올해 자신의 운세가 어떠하고 어떤 띠와 접촉하면 재수가 없다고 한다. 그의 이유는 우리가 수련하지 못한 육신이 있으면 삼계 중의 요소의 제약을 받으므로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당신이 띠를 믿고 점 보는 것을 믿으면 그 문에 입문한 것이 아닌가?

수련생은 생활 경험을 굳게 믿어 겨울에는 영양탕을 먹어야 하고, 여름에는 녹두 탕을 먹어야 무더위를 이기며, 봄과 가을에는 보습제를 발라야 하고, 화병이 나면 무엇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이유는 우리 신체가 완전히 고에너지 물질로 대체하기 전에는 모두 사람 세포가 존재하므로 속인처럼 보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듣기에는 이치에 맞는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수련인의 세포에는 에너지 물질이 존재하기에 인체의 세포를 억제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이것은 일종 속인 생활의 경험을 믿는 것이 아닌가?

불이법문에 대한 나의 이해는 당신이 어느 한 문을 믿으면 그 문의 요구를 유일한 표준으로 삼아야지, 이렇게 엄숙한 것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3. 원만에 도달하는 요구를 대할 때 엄숙하지 않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법(法)은 엄숙한 것으로서 대법제자마다 처해있는 매 한 경지의 표준에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바 이는 엄숙한 것이다. 수련 과정 중에서 마땅히 제거해야 할 것은 제거해야 하며 그럭저럭 해서는 안 된다.”[1]

이 문제에서 많은 수련생은 다른 사람이 그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지적해 줄 때 그는 매 사람의 원만 층차가 다르고 요구도 다르며 그가 지금 많은 마음을 제거하지 못해도 그가 도달해야 할 요구에 도달하면 되므로 그렇게 엄숙하게 자신에게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심지어 수련생은 말한다. “내가 지금은 집착심이 있어도 그것은 사부님께서 나에게 좀 남겨 주어 삼계에 남아 생활하게 하는 것입니다. 법정인간 그 시각 사부님께서 이런 집착심을 제거해 주시면 그때 나는 표준에 부합됩니다.” 사부님께서 제거해 주신 것은 당신이 수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람 이 층에서 당신은 하늘에서 떡이 떨어지는 것을 환상하고 있고 지불하려 하지 않고 단지 얻으려는 그런 인류다!

‘원만에 대해 왜 엄숙하게 대하지 않는가?’에는 자연히 집착심을 피하려는 마음이 있다. 수련은 착실히 해야 하는 바, 한 걸음 한걸음 수련해 올라가야 하고 어떤 관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고 피해서도 안 된다. 만약 한 손으로 사람의 집착심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부동한 층차의 원만을 환상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가? 삼계를 벗어난 첫 번째 과위는 나한인데 속인의 모든 집착심이 없다. 당신은 집착심을 제거하려 하지 않고 이것을 지니고 원만해 삼계를 벗어나려는 이것은 현실인가?

4. 극히 작은 이익을 대할 때 엄숙하지 않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작디작은 파리 대가리만 한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고, 조금 얻으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조금 잃으면 고통스러워 어쩔 줄 모르면서, 이 때문에 잘 먹지도 못하고 잘 자지도 못하여 온몸에 병을 얻는데, 당신은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가!”[2]

큰 재물이익에는 엄숙하게 대하고 경각심을 높이지만, 작은 이익에 대해서는 세상물정의 심태가 우세를 차지한다. 일부 수련생은 무슨 물건을 구매해도 값을 흥정하고 심지어 몇 십전을 위해 따진다. 어떤 수련생은 다른 사람이 쓰지 않는 물건을 가져오고 주워 와서 사용한다. 어떤 수련생은 다른 사람의 작은 선심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어떤 수련생은 한 턱 내기를 좋아하고 초대받기도 좋아한다. 흔히 이런 작은 이익을 얻을 때 스스로 좋아한다. 그들은 큰돈은 버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수련인은 사람 마음을 본다. 당신은 작은 이익을 얻어도 좋아하는 것은 아직 이익지심을 철저히 버리지 못해서다. 이 우주에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이치가 있다. 작은 이익이라서 봐주는 것은 없다. 수련은 엄숙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일부 수련생은 자신에게 문제를 지적해 주는 수련생에게 극단으로 가지 말라고 말한다. “사부님의 법에서 비록 말했지만 필경 속인 사회에서 생활하고 최대한 속인에 부합돼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극단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속인을 초월한 것으로 자신의 수련에 책임져야 한다. 천리 둑도 개미구멍으로 인해 무너진다는 말이 있다. 사실 어떤 일에서도 대법을 첫 위치에 놓는 수련생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법 최후의 매 한걸음도 엄숙하게 대해야 하고 빗나가면 안 된다.

원문발표: 2017년 3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3/14/3441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