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주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사부님께서는 각지 법회에 보내는 축사 4편에서 “수련은 사람 마음을 닦는 것이고 자신을 닦는 것이다.”[1] “오직 자신을 잘 수련해야만 비로소 대법제자의 사명을 잘 완성할 수 있다.”[2] “수련자는 영원히 자신을 닦는 것이다.”[3]라고 거듭 강조하셨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경고는 ‘자신을 잘 수련한다’는 것에 깊은 내포가 있음을 깊이 느끼게 했다. 나는 사부님의 법상을 마주 보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제자는 알게 됐습니다. 저는 반드시 자신을 잘 수련하겠습니다.” 열심히 찾아보니나에게는 늘 다른 사람을 보고 자신을 수련하지 않으며, 의존심, 쟁투심, 질투심, 지적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 좋은 말을 듣기 좋아하는 마음, 일을 함에 구함이 있는 등 법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 마음이 정말 많았다. 또 아직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집착심도 있는데 어쨌든 법에 부합되지 않는 마음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1. 남편에 대한 자비심을 수련해 내다
먼저 가정 수련에서 말해 보겠다. 남편은 내성적이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는, 속인들이 말하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조금만 실수를 해도 계속 잔소리를 해댔다. 나는 원래 덜렁대는 성격이라 무슨 일을 잘하지 못해도 남편은 오히려 이해해줬는데, 나는 그런 남편의 포용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한 수련생은 이런 상황을 알고 나에게 이야기를 하나 해줬다. 옛날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있었는데 며느리는 도를 닦는다고 시간만 나면 부지런히 경을 읽었다. 집안일은 모두 시어머니가 했는데,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이것도 잘 하지 못하고 저것도 잘 하지 못한다고 불만스러워했다. 시어머니는 변명하지 않고 원망도 없이 며느리가 만족할 때까지 지적한 것을 고쳤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께서 오셨는데 시어머니를 데리고 갔다. 며느리는 급히 부처님에게 말했다. “잘못 데려갔어요. 수련은 제가 하고 있어요. 저는 매일 경을 읽었어요.” 부처님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시어머니를 데려갔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바로 그 며느리가 아닌가? 나는 이야기를 들려준 수련생에게 정말 감사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나는 남편 앞에서 정말 잘 수련하지 못했는데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은 얼마나 큰 누락인가? 밖에서라면 수련생이든 속인이든 얼마나 험한 말을 해도 나는 잘 참을 수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식견을 같이 하지 않고 안으로 찾아 자신을 수련할 수 있으니 스스로 수련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 앞에서는 달랐는데 이것이야말로 나의 진실한 모습이다. 그러면 그것은 가짜 수련인이 아닌가? 표면으로 잘하는 것은 체면을 위한 마음이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수련해 버려야 한다.
국내에 있을 때 남편은 가끔은 나를 따라 법공부를 하고 진상을 알렸다. 각지 협조인이 우리 집에서 법공부하고 소형법회를 열 때도 그는 모두 잘 협력해 줬다. 그런데 내가 출국한지 4년 만에 남편은 많이 변했다. 그래서 나는 반감이 생겼는데 그가 오성이 차하다고 생각하며 무의식중에 깔보는 마음이 생겼다. 이런 마음은 겉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남편은 느낄 수 있었다. 하루는 그가 나에게 말했다. “대법이 좋으면 혼자 잘 수련해요. 속으로 늘 다른 사람을 질책하거나 불만을 갖지 말고. 내가 보기에 당신은 전혀 사부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요. 자신을 수련하지 않고 참을성도 없고 늘 다른 사람이 모자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말하지 않을 뿐이지 다른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에요. 나는 뭐든지 참을 수 있어요.”
나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그렇게 잘 참을 수 있으면 당신도 수련하면 얼마나 좋아요. 저보다 잘 수련하고 저보다 빨리 수련할 수 있으니 말이에요. 우리 함께 수련해요.” 그러자 남편은 “당신은 수련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그렇지 않네요. 당신 스스로 잘 생각해 봐요!”라고 대답했다.
남편의 말에 나는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대법을 수련하고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가장 신성하고 바른 것인데 뭘 더 생각하라는 말인가? 수련을 잘하든 못하든 나는 그래도 수련하려는 마음이 있다. 당신은 그런 마음도 없지 않은가? 잘 수련하지 못한 것은 안으로 찾아 잘 수련하면 된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수련을 잘 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지적해줘요. 고치면 그만이죠. 그럼 참 고맙겠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수련하지 않는 것은 오성이 나쁘고 대법의 수승함과 내포를 모르는 것이다. 오히려 당신이 잘 생각해봐야 한다. 천지개벽 이래 처음이자 만고의 기연인데 수련하지 않으면 너무 아쉽다. 나에게 생각해 보라니, 참 어이가 없다. 나는 이렇게 속으로 남편을 질책하면서 미워했다.
남편은 또 말했다. “당신은 말은 잘해요. 하지만 지적해준들 소용이 있어요? 당신이 수련해도 나는 별로 좋지 않아요. 당신은 아이와 다른 가족들에게 다 잘해주고, 밖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잘 대해주는데 나에게만 그렇지 않아요. 나는 자유가 없고 뭐든 못하게 하지요. 속인 노래를 해도 안 되고 속인 TV를 봐도 안 되고 속인 활동에 참가해도 안 되고, 하여튼 뭘 하든 잔소리를 들으니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왜 나를 옭아매려 해요? 좋으면 당신 혼자 수련해요. 나는 당신을 상관하지 않는데 당신은 왜 나를 수련하라고 강요해요? 나도 ‘전법륜’을 본적이 있어요. 사부님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어요. 당신은 전혀 사부님 말씀을 듣지 않아요.”
나는 당황해하며 말했다. “대법책이 그렇게 많은데 당신이 한 번 보고 다 알아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표준대로 저를 단속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자 남편은 “그렇다면 그렇게 해주지요.”라고 대답했다.
한동안 남편은 정말로 나와 함께 열심히 법공부를 하고 내가 잘하지 못한 것을 지적해 주었다. 나는 정말로 기뻤다. 하지만 환희심이 올라온 데다 성급한 마음에 그가 속인 콘서트에 가려는 것을 막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남편은 나에게 “수련을 그만둬야겠어요, 더 이상 못하겠어요. 사부님께 먹칠만 하겠어요.”라고 말하고는 그 후 더 이상 나와 함께 법공부를 하지 않았다. 나는 자신이 잘못 처신한 것을 후회하면서 또 남편을 원망했다. 이렇게 좋은 법, 만고의 기연, 천지개벽 이래 처음으로 사람이 신이 되는 길인데 모르다니? 당신에게 수련하라는 것은 진심으로 당신을 위한 것인데 왜 이리 힘들까?
하지만 정말로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무 높게 요구하고 급한 마음을 가져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부님, 수련과 사람을 구하는데 있어서 도를 잘 파악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요?!” 나는 사부님의 법상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남편은 다시 나와 함께 법공부를 하려고 할까? 깊은 후회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나는 사부님께 부끄러웠다. 그 때 사부님의 법이 머리에 떠올랐다. “내가 당신들에게 법 공부를 많이 하고 집착심을 많이 제거하여 사람의 각종 관념을 내려놓으라고 함은,”[4] 사부님께서 내가 뉘우친 것을 보고 점화를 주신 것이다. 법공부를 많이 하고 법을 잘 배워 이 관을 잘 넘기자. 나는 합장하고 위대하고 자비로운 사부님께 감사드리면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이 제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남편이 한 말이 표면의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라 남편 배후의 생명이 내가 참을 수 있는지, 남편과 다투는지 다투지 않는지 보는 것임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함정을 간파하고 나는 심성을 지켰다. 또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열심히 법공부를 하고 자신을 수련했다. 나는 급히 컴퓨터를 켜고 법을 외우는 채팅방에 들어갔다. 마침 ‘전법륜’ 제4강을 외우고 있었다. “우리 연공인(煉功人)에게는 모순이 갑자기 생길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이 평소 늘 자비로운 마음과 상화(祥和)한 심태를 유지한다면, 문제와 마주쳐도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충적인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늘 자비롭고 선(善)으로 남을 대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하여 매번 문제와 마주칠 때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이 감당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가 안 되는가를 우선 생각한다면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연공(煉功)함에 높은 표준, 더욱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5] 사부님의 법에 대조해 찾으니 자신이 잘하지 못했고 남편의 각도에 서서 생각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출국한 지 4년이 됐고, 남편과 아들은 호주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난 4년 간 남편은 아들을 데리고 혼자 생활하느라 정말 쉽지 않았는데, 호주에 온 후 말도 통하지 않아 답답해하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가 수련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은 각자 자기 운명이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는 돈을 좀 많이 벌어서 집을 잘 안정시켜 놓으면, 나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나는 다시 도를 닦겠다. 나는 당신이 망상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생활을 간섭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우지할 수 없다. 아내와 자식, 부모형제를 포함한 그들의 운명, 그것이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5] 그렇다. 나는 남편이 수련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인가? 남편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정이다. 반드시 이 정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 수련생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뼈를 깎는 각오로 자신을 개변해야 해요. 남편의 입장에서 남편을 배려해 주고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해요. 당신이 잘 수련해야 그를 개변할 수 있어요. 그가 수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고집하는 것은 정이 아닌가요? 사악은 죽을힘을 다해 당신을 끌어내리려고 해요. 당신을 끌어내리고 남편도 망치게 하는데 일석이조죠. 어리석지 말아야 해요.” 수련생과 교류한 후 나는 명석해졌다. 같은 법을 배우면서 다른 사람은 이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데 나는 왜 깨닫지 못하는가? 나는 다른 수련생과의 격차를 보고 반드시 자신을 잘 수련하겠다고 다짐했다.
사부님께서는 최근 연속 발표한 4편의 축사 경문을 통해 자신을 잘 수련하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하셨다. 나는 놀라 깨어났다. 내가 자신을 잘 수련하지 못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거대한 감당으로 시간을 연장해 제자들이 시간을 다그쳐 자신을 잘 수련하게 하시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다른 각도에서 점화해 주시고 또 수련생을 보내 교류하게 하여 도와주셨다. 사부님께서는 매우 자비로우시다. 나는 자신을 개변하려고 결심하고 자아를 내려놓고 사람 마음을 교란하는 정을 내려놓았다. 그 후 남편이 무슨 일을 하든지 나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고 잔소리도 하지 않았으며 일에 부딪히면 안으로 찾아 자신을 수련했다. 나는 내심에서 남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없애고 생활에서 더 많이 배려해줬다.
그러자 남편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는 시간이 있으면 NTD TV 방송을 보고 속인 방송은 보지 않으며, 말하는 태도도 부드러워졌다. 집에서 만두도 빚어주고 자발적으로 나와 함께 션윈 전단지도 배포했다. 나는 진정으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수련인이 안에서 찾는 이것은 법보(法寶)이다.”[6]를 체험했다. 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5]는 것을 체험했다.
2. 의존하는 마음을 닦아 없애다
어느 하루, 나는 젊은 수련생이 화장실 변기에 냄새 제거용 방향제를 붙여 놓은 것을 보고 하나 사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 밖에 나가요?”하면서 말을 걸었는데 그녀는 “제 사생활을 물으시면 호주에 있으니까 알려줄 수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에게 수련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날 법공부 하러 가는 길에 한 수련생과 교류했더니 그는 “남에게 물건을 사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때 빙빙 돌리지 말고 직접 말하면 상대방이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말했다.
어느 하루, 나는 그 젊은 수련생에게 말했다. “편할 때 화장실 냄새 제거제 하나 좀 사줄 수 있어요?” 그러자 그녀는 “직접 사러 가세요. 이번에 제가 당신을 도와 사주면 1년 365일 모두 제가 당신을 도와 사줘야 해요. 의존심을 키워주면 안 돼요.”라고 거절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만약 내가 그녀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나는 “네, 시간 되면 같이 사러 가요. 그럼 다음부터 당신 혼자 살 수 있으니까요.”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흠칫했다. 이것은 밖으로 찾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 자신을 수련하고 안으로 찾아야 한다. 첫 일념은 무조건 안으로 찾아야 하지 않는가? 아직 그 ‘자아’를 위해, 완고한 ‘의존심’을 위해 구실을 대는가? 이것은 표면의 구체적인 일에서 따지는 것이 아닌가? 아직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고층의 법리 내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수련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이 일을 통해 수련생은 나의 의존심을 제거하도록 도와준 것이 아닌가? 나는 그녀의 방향제를 핸드폰으로 사진 찍어 놓고 스스로 가서 사고 반드시 완고한 의존심을 제거해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딸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모녀의 정으로 딸에게 기대면서 수년 동안 의존하는 마음을 진정으로 제거하지 못했는데 이것은 누락이 아닌가? 딸이 미국에 간 후 사부님께서 이 수련생을 보내 나를 수련하게 도와주셨다. 이것은 좋은 기회가 아닌가? 이번에 나는 그것을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내심에서 사부님께 감사드리고 그 수련생에게 감사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가 가리키는 진정한 깨달음은 바로 우리가 연공(煉功) 과정 중 사부가 말한 법(法), 도가의 사부가 말한 도(道)에서, 수련과정 중 자신이 마주친 마난(魔難)에서 자신을 수련인이라고 깨달을 수 있는가 없는가, 이해할 수 있는가 없는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수련과정 중에서 이 법에 따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5]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명확히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나는 반드시 대법에 따라 자신을 잘 수련하여 사부님의 고심한 구도를 저버리지 않고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배움을 견주고 수련을 견주나니, 일마다 대조하여 해내어야 수련이로다.”[7] “집착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련해야 한다”[8]를 진정으로 해내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잘 수련해야만 사명을 완성할 수 있고 내려올 때의 서약을 지킬 수 있다.
층차의 제한으로 적절하지 않는 점이 있다면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주:
[1]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경문: ‘대만법회에 보내는 축사’
[2]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남미법회에 보내는 축사’
[3]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유럽법회에 보내는 축사’
[4]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법 중에 용해되자’
[5]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6]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지설법9-2009년워싱턴DC국제법회 설법’
[7]리훙쯔 사부님의 시사: ‘홍음-착실히 수련’
[8]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10년뉴욕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7년 3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3/15/34430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