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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그물에서 벗어나 신을 향해 달려가다

글/ 산둥 대법제자 차이훙

[밍후이왕] 나는 금년에 60세다. 자신이 정(情)의 그물에서 벗어나 신을 향해 달려가는 체험을 써 내어 사존께 보고하고 수련생과 교류하고자 한다.

1. 나는 한 군인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군인이고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11살 연하이다. 아버지는 성격이 온화하여 집에서 종래로 큰 소리로 아이를 훈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잘못하여도 아이들 앞에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 번도 다투지 않았는데 나는 온화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내가 시집가서 이룬 작은 가정은 지옥이었다. 남편에게 별명이 있는데 “위안삼사(袁三邪 원씨이고 형제 중 셋째)”라 한다. 술을 즐기고 마시기만 하면 취해 물건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는다. 마지막엔 나를 때리고 아이들에게 욕하며 냉장고를 밀어 넘어뜨리고 텔레비전을 박살냈다. 문과 창문의 유리를 부수고 부수고는 또 맞춰 놓고 그리고는 또 부쉈다. 집안엔 온종일 아내가 울고 아이가 소리를 질러 매우 혼란스러운 아수라장이었다. 결혼 전에는 부모님께서 온화한 가정에서 자라는 환경을 주셨는데 결혼해서 이런 상황이 되니 정말로 견딜 수가 없었다. 죽고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자주 맴돌았다. 몇 번은 죽으려고 강가에까지 갔다가 두 아이가 걱정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 왔다.

나중엔 직장이 파산되어 실직했다.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나는 한 상가의 자리를 임대해 가구를 팔기 시작했다. 매일 억지로 웃는 얼굴로 출근했다. 동료들이 깔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1998년 하반기 어느 날, 동료네 집에 갔다. 그녀는 친절하게 물었다. “최근에 어때? 몸은 괜찮아?” 나는 말했다. “그저 그래, 사람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매일 허리가 시큰거리고 등이 아파. 전신에 안 아픈 데가 없어.” 그녀는 말했다. “내가 최근에 책을 한 권 봤는데 엄청 신기해. 너도 한번 봐봐. 보고나면 보증코 어디도 안 아프고 안 시큰거려.” 책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보구서 좋으면 한 권 사줄게.” 이렇게 나는 “전법륜”을 집에 갖고 왔다.

연속 사흘 저녁을 보았다.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다 보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별로 없고 그저 “眞(쩐)ㆍ善(싼)ㆍ忍(런)” 세 글자만 기억했다. 속으로 이 요구가 너무 높아 누가 해낼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나는 장사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고객에게 진실한 말을 하지? 착하면 어떻게 돈을 벌어? 참는 건 더욱 못한다. 매일 몸부림을 쳐도 남을 이길 수 없는데 어떻게 참겠는가? 그런데도 이 책이 좋다고 생각되었고 신체도 확실히 많이 홀가분해졌다. 하여 동료에게 ‘전법륜’ 한 권을 구매해 달라고 했다. 동료는 나에게 파룬궁 사부님의 설법비디오가 있으니 설법을 들을 수도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5장 공법과 연공장도 알려 주면서 아침에 나 혼자 거기에 가서 배우라고 했다. 책을 보면 졸리기에 동료에게 사부님의 설법비디오를 사 달라고 했다. 5장 공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할 시간이 없는 것 같아 내내 배우러 가지 않았다.

책과 비디오가 생긴 후 나는 집에서 틈만 나면 책을 본다든가 아니면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다. 끊임없이 법을 배워 서서히 대법은 사람들에게 수련을 가르치는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직 대법 속에서 수련해야만 고달픈 인간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어느덧 1999년 여름이 되었다. 하루는 상가 이웃집에 물 뜨러 갔다가 그 집 큰 오빠네 내외가 거실에서 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바로 가부좌인가 봐? 단번에 공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아주머니에게 가르쳐 달라고 했다. 약속한 날짜에 갔더니 아주머니는 말했다. “직장에서 사람이 왔는데 못하게 해요. 책도 그들이 가져갔어요. 공안은 사람을 붙잡기 시작했다누만.”

빠르게 하늘땅을 뒤덮는 탄압이 시작되었다. 텔레비전에서는 24시간 끊임없이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위협하였다. 그리고 또 소위 ‘천안문 분신자살사건’을 조작하여 대법을 모독하였다. 남편은 우리 집의 ‘610’이 되어 내가 집에서 법공부하면 방해하고 술을 마시고는 위협하였다. “또 배우면 때려죽일 테다! 그리고 나서 휘발유를 붓고 태워버릴 거야. 남들이 물으면 당신이 주화입마하여 죽었다고 하면 누구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 며칠 그는 매우 광분하여 나의 책과 비디오를 찾으러 온데를 다 뒤졌다. 나는 그가 찾아 낼까봐 책을 강물 속에 숨겨 누구도 찾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비닐봉지로 한번 또 한번 싸서 침수를 방지하고 또 벽돌을 주워다 함께 묶었다. 그리고 큰 비닐봉지로 봉해서 강가로 갔다. 남편은 내가 뭘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소리 지르면서 쫓아 왔다. 거의 다 왔을 때 나는 자그마한 골목길로 꺾어들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모퉁이 한곳에 놓고 신속하게 피했다. 남편은 나를 따라잡고 물었다. “책은?” 당시 나는 남편이 좀 두려웠고 책을 놓은 자리도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알려 주었다. 그는 나를 끌고 거기에 갔지만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내 손으로 여기에 놓았는데, 또 나는 멀리 가지도 않았고 누가 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어떻게 없어졌단 말인가? 남편이 보니 없는지라 내가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하고 나를 때리려 했다.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났다.

이러한 가정환경이니 아들도 집에 있기 싫어했고 18세도 되기 전에 군에 갔다. 딸은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집에는 나와 남편만 남았는데 그는 더욱 심해졌다. 내가 집에 있으면 그는 내가 법공부를 못하게 지켰고 결국에는 책을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출근하면 직장에 와서 난리를 쳐 동료와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경하였다. 나는 머리를 들 수 없었고 장사도 할 수 없어 문을 닫고 다른 곳에 알바를 하러 갔다. 그는 또 술을 마시고 내가 알바 하는 곳에 와서 난리를 쳐 일을 못하게 했고 후에는 아예 집 자물쇠를 바꾸어 나를 집에 못 들어오게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밖에다 셋방을 얻었다. 그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수소문하여 찾아와 더욱 심하게 난리를 쳤다.

2002년의 어느 날 친한 동창이 찾아와 말했다. “여기에 있으면 네 남편을 피할 수 없어. 아예 베이징에 있는 내 남동생네 집에 가서 아이를 봐 줘. 동생이 마침 나에게 사람을 찾아 달라고 부탁 하던데. 너의 모녀가 함께 가. 동생네 집은 널찍해서 괜찮아.” 나는 말했다. “좋아. 남편을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에 가도 다 돼.” 그때 딸아이는 병원에서 실습하고 있었다. 남편을 피해 그날 저녁으로 딸을 데리고 베이징에 가서 아르바이트 하면서 수련하는 나날을 시작했다.

2. 베이징에 온 지 1년이 되어가던 어느 날 이웃 할머니가 놀러 왔다가 친구 남동생네 작은 아들이 바닥에서 가부좌하고 노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너 가부좌할 줄 아니? 나도 안단다.” 말하면서 소파에 결가부좌하고 앉았다. 남동생의 아내가 물었다. “무슨 공이에요?” “좋은 공이지.”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신 걸 알았다. 이 노인을 통해 나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나는 수련생을 찾았고 그녀에게서 공을 배워 정식으로 수련하였다.

그날 이후 나는 기회를 봐서 이웃 노 수련생을 찾아가 공을 배웠다. 후에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우루무치 사람이고 현지의 ‘610’이 체포하려는 대상이며 베이징 딸네 집에 피신하러 온 것이었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산장 별장이라 비교적 외지고 조용했다. 우리 둘은 자주 함께 교류했다. 그녀는 2003년 사부님의 설법을 나에게 가져다주었고 후에는 사부님의 설법이 있기만 하면 곧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나에게 5장 공법을 가르쳐줬을 뿐만 아니라 보서(寶書) ‘전법륜(轉法輪)’을 모셔다 주었다. 베이징에 그녀의 고모가 있는데 ‘7·20’전에 법을 얻었다. 대법이 박해받은 후 법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책을 나에게 주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이 사람이 법을 얻어야 한다고 정해졌다면 그의 일생이나 심지어 세세생생 이 일을 위해 고생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1] 나는 전전하여 베이징에 왔다. 사부님께서 법을 얻으라고 안배하신 것이라 믿었다.

끊임없이 ‘전법륜’과 사부님의 각 지역 설법을 배우면서 대법을 수련할 신념이 점점 확고해졌다. 자신의 금생은 곧 법을 위해 온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후부터 더 이상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신이 정법시기의 대법제자이고 조사정법의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은 자주 함께 나가서 인연 있는 사람에게 진상을 알렸다.

2005년 동창의 남동생네가 캐나다로 이민 갔다. 나는 베이징에서 또 가사도우미 일을 찾았다. 이때 할머니네 집과 멀어져 편도만 버스로 3시간 걸렸다. 하지만 사부님의 신경문이 있으면 나에게 가지러 오라고 알렸는데 한 번도 일을 그르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2007년 할머니는 병업관을 넘지 못해 구세력에게 육신을 빼앗겼다. 나는 단번에 줄 끊어진 연이 되었다. 이렇게 큰 베이징에서 어디 가야 수련생을 찾을 수 있을지 몰랐다. 베이징은 대법을 박해한 사악의 오랜 소굴로서 도처에 사복경찰이 깔려있어 수련생들은 모두 매우 조심했다. 나는 집에서 법공부를 강화하고 연공과 발정념을 견지했다. 낮에는 아이를 데려오고 장을 보고 상점에 가는 기회에 인연 있는 사람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했다. 배포할 자료가 없어서 스티커를 사다가 스스로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써서 붙였다. 이렇게 혼자 3년을 수련했다.

2010년 진상을 알리다가 한 대법제자를 만났다. 공교로운 것은 안휘 사람인 그녀가 나와 한 아파트단지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우리 둘은 시간만 나면 함께 법공부하고 휴일에는 함께 정거장, 공원, 도매시장 등 사람이 많은 곳에서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했다. 매일 적어도 7, 8명 많으면 몇 십 명을 탈퇴시켰다.

2011년 8월 20일은 일요일이었다. 우리 둘은 베이징 “현대쇼핑몰”에서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했다. 1층에서 5층까지 갔는데 언제인지 모르게 상가의 한 직원이 우리를 신고했다. 쇼핑몰의 보안은 모두 검은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가 계단을 찾아 막 내려오려는데 한 무리 보안에게 에워싸여 파출소로 납치되었다.

3. 파출소에 들어가자 우리 둘은 갈라졌다. 경찰이 물어도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경찰 한 명만 남아 나를 지켰다. 나는 곧 그에게 진상을 알렸다. 그들에게 파룬궁은 불법(佛法)이고 사람들에게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며 이미 세계 5대주 백여 개 나라와 지역에 홍전했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톈안먼 분신자살은 거짓이고 외지인들은 모르지만 우리 베이징의 경찰은 소화기를 메고 순찰하는 톈안먼경찰을 어느 누가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이 경찰은 말했다. “이건 나도 다 압니다. 어쩔 수 없어요. 지금 세상에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에게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진선인은 좋습니다.’를 기억하고 대법수련생을 선하게 대하면 온 가족이 복을 받는다고 알려 주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잇따라 사람들이 들어와 나에게 수갑을 채우고 수련생과 함께 경찰차에 태웠다. 야심한 밤에 얼마동안 갔는지 몰라도 날이 밝을 무렵 차는 한 대문으로 들어갔다. 출입문 위쪽에 베이징하이뎬구 구치소라 쓰여 있었다.

구치소로 가는 길에서 나는 줄곧 집에 있는 대법서적과 이 몇 년래 탈퇴시킨 명단을 걱정했다. 아무리 해도 다른 방법이 없어서 사부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교도소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사부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이 옳은 것이었다. 사부님께서 나의 아들에게 베이징에 있는 대법책과 삼퇴명단을 빠짐없이 산둥 고향에 가져가게 하였다. 집에 돌아간 후 삼퇴명단을 현지에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수련생에게 주었다. 아들은 나에게 알려 주었다. “당시 이 물건들을 가져올 때까지만 해도 매우 주저했어요. 후에 생각해 보니 이것은 어머니가 아끼는 물건인지라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가져 왔어요.” 나는 사부님께서 아들에게 그렇게 생각하게 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구치소에 들어오니 한 경찰이 전기곤봉을 들고 우리 두 사람을 하나 또 하나의 철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야말로 층층의 철문이었다. 거기에 가서 우선 우리에게 건강검진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동료수련생을 남구(南區)에, 나는 북구(北區)5호 감방에 가두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5호실은 환자를 가두는 감방이다. 나의 혈압이 180/100, 혈당이 12 이기에 이 환자 감방에 들어온 것이다.

여기에 40여 명이 갇혀 있는데 우두머리는 28, 9세 된 대학생이었다. 인터넷상에서 사기를 쳐서 들어온 것이었다. 여기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무서워했다. 구치소에서 나에게 약을 가져왔고 우두머리가 감독했다. 나는 병이 없다고 생각하여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는 강제로 먹게 했다. 나는 약을 가져다 단번에 소매 속에 감췄다. 감방에는 또 2호, 3호, 4호의 작은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함께 달려들어 나의 몸을 수색했다. 나는 대법제자는 일체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뿌리치고 일어나 그녀들을 보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약을 먹고 안 먹고는 내가 결정하고 당신들과는 상관이 없다. 오늘부터 나는 절대로 약을 가지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나를 강요하지 못한다! 나는 이 방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떠들썩하게 해서 반장에게 번거로움을 가져다주지 말라! 반장이 벌을 받을 거니까!” 그 후부터 나에게 약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사람이 없었고 혈압을 재고 혈당을 재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방의 우두머리에게 진상을 알렸고 그녀는 서서히 진상을 알고 대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했다. 나는 또 기회를 타 그녀에게 연공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일요일에 연공하라고 했다. 왜냐면 일요일엔 감방 안에 반나절은 자유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화장실 옆에 유리벽이 있는 곳에서 연공하면 감시카메라에서 당신이 뭘 하는지 똑똑히 볼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연공할 수 있게 되었다.

전체 감방에 파룬궁수련생은 나 혼자였다. 밤이 깊어 조용해지면 일어나 연공했는데 서서히 나를 상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50일 지나 베이징시 톈허(天河)여자교도소로 이감돼 2년을 갇혀 있었다.

교도소에서 가장 사악한 네 번째 구역에 갇혔다. 새로 들어온 사람은 모두 여기에서 분류한다. 오자마자 ‘삼서’를 쓰라고 했다. 내가 쓰지 않자 즉시 독방에 갇혔다. 그래도 쓰지 않자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작은 쪽걸상에 앉게 했는데 매일 18시간 앉게 했다. 두 발뒤꿈치를 붙이고 두 손은 두 무릎위에 가지런히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움직이기만 하면 바오쟈(죄수 중의 감시자)가 때렸다. 물을 못 마시게 하고 화장실에 못 가게 했는데 바오쟈가 교대로 지켰다.

그들이 어떠한 수단을 쓰든지 나는 줄곧 진상을 알리고 대법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쉬지 않고 알리고 끊임없이 알려 바오쟈가 그리 흉악하지 않게 되었다. 경찰이 보니 바오쟈가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지라 바꿨다. 바꾸면 나는 또 말하고 그들은 또 바꾸었다. 세 번째 바오쟈는 들어온 후 내가 진상을 알리자 수건으로 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진선인은 좋습니다!” 복도의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바오쟈는 놀라서 수건 한 장을 더 가져다 나의 입을 막으려 했다. 몸싸움 끝에 뿌리치고 나와서 침대에 가부좌하고 앉아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진선인은 좋습니다!”

쌩!하고 경찰 4, 5명이 들어와 나를 땅에 눌렀는데 누군가 나의 목을 졸라 숨을 쉴 수 없었다. 사악이 어떻게 혹형을 가해도 나는 ‘삼서’를 쓰지 않았다.

그들은 혹형도 나에게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자 수법을 바꿔 나의 수련 의지를 약화시키려 했다. 하루는 갑자기 면회실로 가라고 해서 갔더니 아들이 왔다! 아들이 내 앞에 나타나자 우리 모자는 유리창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면서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오직 눈물만이 흐를 뿐이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아들에게 물었다. “내가 여기에 갇힌 줄은 어떻게 알았느냐?” 아들은 말했다. “여기의 사람이 저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어머니가 가장 완고해서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고 나더러 어머니를 좀 권고하라고 했어요. 어머니, 우선 썼다가 집에 가서 다시 연마해요. 눈앞의 불이익을 당하지 말구요.” 나는 말했다. “아들아, 어머니는 훔치지도 빼앗지도 않았단다. 당당하게 불법을 신앙하고 진, 선, 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는데 잘못이 있단 말인가? 잘못이 없으면 당연히 아무렇게나 쓰면 안 되지. 너는 이담에 그들에게 이리저리 불려 다니지 말거라. 나는 사부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걱정 말아. 내가 먼 길을 한번 떠났다고 생각하거라.” 아들은 나를 위안해 주었다. “어머니, 어머니가 아무 일 없이 잘 있으면 저는 마음이 놓여요.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면 저는 결혼하겠습니다. 자신을 잘 돌보십시오. 2년은 아주 빨리 지나 갑니다.”

사악은 아들을 이용하여 나에게 ‘삼서’를 쓰게 하려 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4구역에서 나를 엄격히 단속하더니 반년 후에 2구역으로 이감되었다. 2구역은 천천히 세뇌하는 곳이다. 우리에게 대법과 사부님을 모독하는 비디오와 책을 보게 하고 비판문장을 쓰게 하였는데 사람마다 관을 넘어야 했다. 그들이 어떻게 세뇌해도 나는 다만 ‘홍음2 – 別哀(슬퍼하지 말라)’를 외웠다. “몸이 감옥에 갇혔다고 슬퍼하지 말라 정념정행하면 법이 있도다 조용히 생각해 보니 집착한 일 얼마이더냐 사람 마음을 덜면 악은 스스로 패하리라”. 그리고 또 매일 끊임없이 속으로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진선인은 좋습니다’를 하루도 멈추지 않고 외웠다. 이렇게 나는 한 관(關) 또 한 관을 넘었다.

하루는 교도관이 새로 들어온 대법제자에게 대법을 모독하는 책을 보여 주려고 했지만 책이 부족해 우리 방에 와서 빌렸다. 나는 마침 입구에 있다가 그에게 알려 주었다. “우리 여기에는 이런 책이 없어요.” 이는 나에게 내 손에 있는 이런 책을 없애버려 다른 사람을 해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청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감시카메라를 피하고 바오쟈를 피해 책을 적신 다음 찢어서 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렸다.

2013년 강제노동교양소가 금지되어 나는 2개월 앞당겨 집으로 돌아왔다.

4. 내가 6월에 집으로 돌아오자 아들은 8월 6일에 결혼했다. 아들의 혼사가 끝나자 나는 아들이 베이징에서 가져온 대법책을 꺼내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했다. 나는 교도소에서 지체한 법공부를 보완하고 사부님의 정법진도에 따라가고자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지의 수련생이 나를 찾아 왔다. 나는 처음으로 현지의 단체 법공부팀에 들어갔다. 정말로 감개가 무량했다. 자신이 법을 얻은 것은 쉽지 않았다. 사악의 오랜 소굴 – 베이징에서 거의 11년을 혼자 수련했다. 이 기간에 교도소에 2년 감금된 적도 있었다. 지금은 드디어 정체 속에 스며들 수 있게 되었다! 내심의 감격은 형용할 수 없었다.

아주 빨리 나는 자료점에 들어가 자료를 만들게 되었는데 밖에서 11년간 있으면서 갈망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또 다른 대법제자와 함께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스티커를 붙이고 현수막을 걸고 전시판을 붙였다. 걸어 나가서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하고 사부님께서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을 했다. 이때 누군가 나에게 밍후이왕에 접속하는 방법을 알려 주어 드디어 확실하게 전 세계 대법제자의 정체 속으로 스며들 수 있었다.

2015년 5월 정법노정이 앞으로 추진됨에 따라 대법제자는 재빨리 장쩌민을 고소하는 붐을 형성했다.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속에 뛰어 들었다. 장 마두가 나를 박해한 사실이 그 속에 있는데 누구도 내가 장쩌민을 고소하는 결심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나는 성질이 급해서 한다면 곧 하고야 만다. 결정하자 즉시 장쩌민 형사고소장을 작성하여 바로 송부했다. 사악이 아직 차단하지 않을 때라 양고(최고인민법원과 최고인민검찰원)로부터 착오 없이 받았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나는 또 주변의 사람들을 도와 고소장을 썼다. 두려운 마음이 있는 대법제자와 장 고소의 중요성을 교류하여 상대방이 즉시 행동에 옮길 수 있게 하고 사부님의 정법노정에 따라올 수 있게 하였다.

5. 나는 세가지 일에 전념하는 동시에 집에서 좋은 어머니, 좋은 시어머니가 되는 것도 지체하지 않았다. 집밖에서 오래 지내서 늘 아들에게 너무 많이 빚진 것 같아 일부 보상을 하고 싶었다.

아들이 금방 결혼한데다 며느리도 출근을 하기에 나는 모든 가사일과 일체 생활 지출을 도맡았다. 2014년 말에 어린 손주도 맞이해 일가족은 정말이지 화기애애했다.

눈 깜짝할 사이 손자는 8개월이 되었고 며느리의 1년 출산 휴가도 끝날 때가 되었다. 촌에다 새로이 지은 층집의 열쇠도 갖게 됐다. 나는 정리가 다 되면 이사 가려고 했다. 일부 물건을 포장해 놓고 아들에게 시간 내서 우선 좀 옮기자고 했다.

그런데 아들은 말했다. “바로 옮겨요.” 나는 급하지 않다고, 저쪽에는 아직 정리를 못했다고 했다. 며느리가 말했다. “얼른 옮겨요, 여기에 놓으면 거추장스러워요!” 내가 들으니 말투가 영 아니기에 아는 척하지 않고 나갔다. 돌아오니 나의 물건은 모두 복도에 나와 있었다. 왜지? 나는 단번에 속이 꽉 막힌 것처럼 괴로웠다. 하여 혼자 다시 옮겨놓고 아들에게 왜 이렇게 조급해 하냐고 물었다. 아들은 말했다. “어머니는 아이를 볼래요, 아니면 파룬궁을 연마할래요?” 나는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파룬궁을 연마해도 아이 돌 보는 데는 지장이 없어. 너도 알다시피 내가 파룬궁을 연마한지는 십 몇 년이 되었잖아. 공산당이 나를 교도소에 가두어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지금 어떻게 포기한단 말이냐?”

또 며칠 지나 밖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이 말했다. “내가 어머니의 책을 다 버렸어요!” 집안을 보니 책이 정말로 없어졌고 사부님의 법상도 보이지 않았다. 조급해졌다. “이런 농담하면 안 돼! 베이징에서도 책을 버리지 않았는데 지금 어떻게 이런 일을 하냐?” 나는 말을 하는 한편 온 데를 찾아봤다. 며느리가 말했다. “찾을 필요 없어요. 쓰레기 못에 버렸어요!” 나는 더욱 조급해졌다. 막대기를 하나 찾아서 쓰레기 못을 뒤졌다. 한창 더운 때의 점심시간이라 태양이 내리쬐어 악취가 코를 찔렀고 마음도 조급하다보니 잠깐 새에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하지만 책을 찾지 못했다. 속으로 사부님께 요청했다. “사부님, 모두 제가 잘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업을 짓지 않도록 아이들이 책을 저에게 돌려주게 해 주세요. 저는 아이들과 다투지 말아야 했어요. 곧 이사를 가겠습니다.”

새집에는 침대도 없고 주방기구도 없었다. 바닥에서 자고 밥은 밖에서 사 먹었다. 이튿날로 아들은 책을 나에게 보내 왔다.

새집에서 며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시골집은 원래 내 것인데 어떻게 되어 그들에게 쫓겨났지? 내가 안가면 그들이 나를 어찌 할 것인데? 하여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서니 안사돈이 있었다. 인사를 하고 주방에 들어가 밥 지을 준비를 하는데 안사돈이 따라서 들어오더니 말했다. “밥은 내가 지어 놨어요.” 나는 입으로는 “수고했어요”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여긴 오히려 당신 집이 됐네요!” 원래의 내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안사돈의 말소리가 들였다. “할머니에게 밥 잡수시라고 해.” 바깥 사돈이 말했다. “아니 할머니가 아직도 여기 계셔?” 그 말을 들으니 자신이 여기서 확실히 외인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방을 들고 떠나려 했다. 어린 손자는 나를 보더니 안아 달라고 했다. 금방 안았는데 며느리가 나의 품에서 아이를 빼앗아갔다. “파룬궁을 연마하면 나는 어머니가 아이를 안지 못하게 할 겁니다!” 안사돈은 몰래 나의 옷자락을 당기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얼른 안 한다고 하세요.” 며느리는 또 큰 소리로 말했다. “주무시려면 주무시고 식사 하시려면 식사 하시고 가시려거든 가셔요!” 그러면서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눈물을 쉼 없이 흘리면서 집 문을 나섰다.

거리에서 목적 없이 걸었다. 반평생동안 험난했던 장면들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먼저는 남편에게 핍박받아 베이징에 가서 밖에서 떠돌고, 가까스로 해탈될 수 있는 대법을 얻었는데 또 사당에게 붙잡혀 교도소에 들어갔고, 드디어 아들을 장가보내 손자를 낳아 정상인의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또 며느리에게 쫓겨나고… ….

걸으면서 자신의 이 몇 십 년을 회상해 보았다. 남편이 나를 상해한 것은 마음속에 너무나 큰 어두운 그림자를 남겨 놓았다. 수많은 해 동안 늘 자신의 생활은 엉망이여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남들이 비웃을까봐 두려웠고 남들이 깔볼까봐 두려웠다. 뼛속에는 줄곧 사람들 속에서 체면이 서는 생활을 하고 싶었다. 손자가 생기고부터 드디어 이 날이 온 것 같았다!

갑자기 나는 이런 행복한 생활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수련인이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사부님의 법이 한 단락 한 단락씩 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육친정(親情)에 집착함은, 기필코 그로 인해 지치고 얽매이며 마에 사로잡히게 됨이라, 그 정사(情絲)를 잡아 쥐어 일생토록 방해받으니, 나이가 들면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이다.”[2] “속인은 속인이 추구하는 것이 있지만, 우리는 추구하지 않고; 속인에게 있는 것을 우리는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우리에게 있는 것은 속인이 가지려 해도 가질 수 없다.”[3] “나는 여기 속인사회에 와서, 마치 여관에 투숙하듯이 며칠 좀 묵었다가 총총히 간다. 일부 사람들은 바로 이곳에 미련을 두고 자신의 집을 잊어버렸다.”[3]

사부님의 법은 나에게 ‘정’의 밧줄을 풀어 주었고 ‘정’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으며 마음속이 환하게 밝아지게 해 주셨다. 정법은 이미 최후의 최후에 도달했고 대법제자는 한창 온 힘을 다해 구세력에게 ‘사람을 빼앗는데’ 나는 어찌하여 아직도 속인의 정속에 빠져 뒤엉켜서 분명하지 않고 속인의 생활에 미련을 두고 있는가? 아이를 보지 못하게 하고 그들과 함께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정을 내려놓고 속인의 일을 내려놓으라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에 전념하라는 것이 아닌가? 마땅히 그들에게 감사하다고 해야 한다. 나는 속으로 몰래 아이들에게 말했다. “고맙다! 나는 꼭 너희들이 진상을 알고 구도되게 할 꺼야.”

나는 몸을 돌려 자료점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은 침착하고 홀가분했으며 확고했다.

사존님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싱가포르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 – 수련자 금기(修者忌)’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문장발표: 2017년 1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진상을 알려 세인을 구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29/34104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