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의 대(代)를 이은 이순풍(李淳風), 예언문화의 맥 이어받아
글/ 성연(聖緣)
[밍후이왕] 사부님께서는 거듭 대법제자를 위해 수련 시간을 연장하셨다. 이에 많은 제자는 소중함을 알고 정진에 박차를 가했지만, 또 적잖은 사람은 이제 듣기 귀찮아하고 시간의 연장에 대해 반신반의하며 거듭 해이해져 중사(中士)가 도를 듣듯이 했으며 심지어는 믿지 않고 동요해 정법에서 떠났거나 혹은 반면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것은 모두 대법에 대해 믿는 듯 믿지 않는 듯했기 때문이며 근원을 추적해보면 구세력이 중화 신전(神傳)문화를 파괴해 현대인이 대법을 인식하는데 장애물을 조성한 것이다.
본 시리즈 문장은 천상문화의 정교함과 정확함을 펼쳐 보임으로서 한 번, 또 한 번 정법시간을 연장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동시에 관련된 거짓 역사를 폭로함으로서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역사의 진상을 최초로 보여주려 한다. 기이하고 다채로운 인간세상에 정신이 팔려 정진하지 못하는 제자들, 심지어 대법을 이탈한 예전 수련생들이 처음 보여주는 이번 문장에서 역사가 다진 진정한 천기를 깨닫고 다시 대법으로 돌아오기 바란다.
진정한 훌륭함은 진정하게 대법을 수련하는 중에서 모두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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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이어)
전편에서 우리는 천상의 각도에서 ‘추배도’의 예언이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밝혔다. 이번에는 예언문화의 근원을 탐구하고자 하는데 그럼 반드시 ‘추배도’의 작자 이순풍의 조사(祖師) 제갈량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동서고금 종래로 밝혀지지 않은 진상과 제갈량의 진짜 모습이 여기에서 처음 드러날 것이다.
1. 널리 알려진 반신반인(半神半人) 제갈량, 신적(神跡)을 감추다
‘죽을 때까지 온몸이 다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나이다.(鞠躬盡瘁 死而後已)’ 1700여 년 동안, 역대 황제와 장군, 대신, 문인들은 모두 제갈량을 칭찬했다. 근대 소설 삼국연의, 널리 알려진 연극에서도 제갈량을 중화 지혜의 화신, 점을 잘 치는 득도인, 충성스럽고 의리가 있는 도덕적 모범인물로 묘사했다. 제갈량은 후세에 널리 알려졌고 그와 관련된 고사성어, 민간속담, 소설 연극은 도처에 있었는데 연극만 해도 500여 편이 된다. 예언문화를 믿지 않는 사람도 예언을 ‘사후 제갈량(事後諸葛亮: 사건 이후에 예언하다라는 뜻)’이라고 폄하하는데 이유는 제갈량이 점을 잘치고 후사를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정말 그토록 신통한가? 현재 신중한 과학자들은 모두 제갈량에 대한 묘사가 갈수록 신격화됐다고 여긴다. 역사상 진실한 제갈량은 천상을 볼 수 있었는데 이건 역사서에 증거가 있기에 거짓이 아니고, 글재주가 뛰어난 것도 여러 명작이 대대로 전해졌기에 거짓이 아니지만 그렇게 신통하지는 않다고 여기고 있다. 소설과 전설이 그를 신격화했다고 여기는데 이런 결론은 마침 거짓 역사가 사람들을 오도(誤導)한 것이다.
내가 혜안통으로 역사 장면을 추적 조사해보니 진실한 제갈량은 신격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짓 역사에 의해 크게 덮어 감추어진 것이다. 제갈량은 병들어 오장원(五丈原)에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수행해 득도한 사람이기에 어찌 병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천상을 받들고 54세 때 거짓 죽음으로 몸을 뺀 후 산림에 은둔해 계속 25년 수행하면서 중화 예언문화를 떠받들 중대한 사명을 또 다시 완성했다. 제갈공명의 지혜와 능력은 세인의 이해능력을 훨씬 초월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기적을 창조했고 세인들이 풀지 못할 그렇게 많은 수수께끼들을 남긴 것이다.
2. 신공(神工)이 숨겨 있는 팔진도(八陣圖), 천수(天數)가 억제해 뜻을 이루지 못하다
팔진도(八陣圖)
공은 천하 삼분을 뒤덮고, 명성은 팔진도로 더욱 높도다(功蓋三分國,名高八陣圖)
강물 흘러도 팔진도 돌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으나, 오나라 삼키기를 놓친 것이 한으로 남음이어라(江流石不轉,遺恨失吞吳)
당나라 두보의 명시 ‘팔진도’는 당시 어복포(魚腹浦) ‘팔진도’의 유적에 대해 묘사했다. 팔진도 유적은 충칭 펑제(奉節) 창장(長江) 쪽에 1700년간 둥지를 틀고 있다가 1964년에 철거됐다.
그럼 제갈량이 팔진도를 배치한 것인가? 누구도 모른다. ‘삼국연의’에서는 이 팔진도가 강동의 삼군 대도독 육손(陸遜)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고 도망치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예술적 날조라고 여긴다. 고대부터 사람들은 제갈량의 팔진도가 별로 대단하지 않고 팔괘진에 불과하다고 여겼고, 심지어 현대학자들은 제갈량의 팔진도를 평범한 방진으로 여겼다. 제갈량의 군사재능에 관해서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아주 평범하다고 여기면서 사마의보다 못하다고 여겼다.
이런 인식에 대해 후세사람들을 탓할 수도 없다. 모두 거짓 역사가 만들어낸 여파인데 이 시리즈에서 말한 ‘거짓 역사’란 완전히 거짓된 역사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꾸미고 덮어 감춘 역사를 말한다. 거짓 위(僞)는 ‘人+爲’, 바로 인위적이란 뜻으로 세인이 조작했다는 뜻이다.
위촉오 삼국이 진(晉)나라에 의해 소멸된 후 진나라에서 쓴 ‘삼국지’는 황실 사마씨(司馬氏)의 안면을 봐서 사마의를 높이 받들고 감히 제갈량을 칭찬하지 못했다. 게다가 삼국 때 위나라와 오나라 역사 자료는 자국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당연히 제갈량의 대단한 부분을 덮어 감출 수밖에 없었다. 또한 촉나라는 유비의 지시 하에 사관(史官)을 설치하지 않았고 게다가 제갈량이 매우 겸손하고 자신의 능력을 한 번도 과시하지 않았기에 수많은 진상들이 역사서 밖 전설로 남아버렸다.
시공을 넘어 제갈량의 팔진도를 내려다보면 외관은 평범하고 특이한 것이 없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비할 바 없는 위력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것은 고대 병법가의 최고 작품이자 신전(神傳)문화의 정화(精華) 중의 정화다. 만약 제갈량이 시공을 넘어 오늘날에 팔진도를 꺼내놓는다면 당대 10만 명 현대화된 보병들이 들어가도 모두 안에서 지쳐 죽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 데는 전혀 과장이 없다. 고대 어복포의 팔진도 바위진은 제갈량이 설치한 것이 아니라 촉나라 장병이 기억을 더듬으며 복원한 팔진도 모형이다. 진정한 팔진도는 제갈량이 형주(荊州)에서 성도(成都)로 이전하기 전, 촉나라 진입 시 반드시 거쳐야 할 여러 큰 산 사이에 산천 지형에 따라 설치한 것이다. 그것은 제갈량이 수련해 낸 용 모양 호법(護法)으로서 숭산(崇山)의 높고 험한 고개 사이에 서리고 있다가[공명의 도호(道號)가 ‘와룡’인데 그 이름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10년 뒤 유비군이 여기에서 패배했을 때 주공의 생명을 구하려 준비한 것이다.
당시 제갈량은 이 일대 산봉우리를 발판으로 길을 뚫고 보루를 세워 자연 지형을 팔진도로 만들었다(구글 지도 캡처)
10년 뒤, 유비가 전국의 병사를 동원해 오나라를 공격했을 때 강동의 육손은 촉의 진지를 모두 불살랐고 유비는 대패해 이 진까지 도망쳐왔다. 제갈량은 주공을 먼저 떠나게 한 후 육손의 대군이 여기에 뛰어 들어오자 성도에서 팔진도를 움직였다. 거대한 용은 머리와 꼬리를 빙빙 감돌면서 10만 강동의 대군을 여기에 포위해 버렸다. 팔진도는 저승의 병사를 동원해 작전에 참여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무서운 것은 사람의 사유를 통제할 수 있었다. 자기편끼리 서로 죽이게 만들고 영원히 출구를 찾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현대 보병이 들어가도 모두 나오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유가 완전히 통제돼 무기가 아무리 발달해도 소용이 없고, 전자기기가 아무리 고급스러워도 팔진도가 빨아들인 강대한 우주 에너지 작용 하에 효력을 잃게 된다.
육손이 인솔한 10만 강동 정예부대는 군수 물자를 지니지 않고 간편한 장비로 급행했다. 사유가 통제돼 허둥지둥하면서 더는 출구를 찾지 못했다. 사람 중 일정한 비례는 선천적으로 음양안(陰陽眼)이 있어 천목으로 볼 수 있는데 고대에는 이 비례가 더욱 높았다. 당시 육손의 이 10만 명 중 일부 사람들은 대낮에 저승 병사와 이상한 영체들을 볼 수 있었고 밤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저승 병사와 귀신을 보았다. 그래서 오나라 군사들은 모두 혼비백산했고 게다가 배고프고 지쳐서 사흘 밤낮 안에서 맴돌면서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었다. 도로 표지를 해놓아도 전혀 소용이 없었는데 저승의 병사가 고대 전설 속의 ‘눈 가림수’를 설치할 수 있고 심지어 공간도 움직여 산 지형과 도로가 끊임없이 변했으며 도로 표지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마지막에는 ‘삼국연의’에서 말한 것처럼 ‘제갈량의 장인이 진(陣)을 벗어나도록 육손을 구해준 것’이 아니다. 팔진도는 제갈량 외에 누구도 파헤칠 수 없었다. 배치로 수 백 년 전부터 여기에서 도를 닦은 한 요괴가 돌아갈 수 있는 출구로 이 10만 명을 이끌어준 것이다. 제갈량은 이것 역시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막지 않고 그들이 떠나게 했다. 강동이 치욕을 당한 이런 일들을 역사서에 기재하지는 않았지만 민간에서 유전되는 것은 막지 못했다.
이후에 제갈량은 또 광야에서 싸울 수 있고 군사들로 나열된 움직이는 팔진도를 만들었다. 그것도 군사 중에 저승 병사를 배치하고 우주의 에너지를 모을 수 있었기에 언제나 승리했다. 제갈량은 예전에 말한 적이 있다. “팔진도를 잘 익히면 이후 싸움에서 질 수가 없다.” 이 말은 3백여 년 후의 ‘수경주(水經注)’[1]에 기재됐지만 천수(天數)가 내리누르고 있어 줄곧 발휘하지 못했다.
제갈량은 뛰어난 역학 고수로서 매번 출병 때 정해진 승부를 뻔히 알면서도 반드시 패할 싸움에도 하늘의 뜻에 따라 그 한 단락 ‘실패’를 연의(演義)하며 문화를 만들고 사명을 완성했다.
3. 한 생의 두 운명(一生二命), 먼지처럼 사라지고 다시 한 번 당나라 성세로 거듭나다
위촉오 삼국 정사에는 모두 제갈량이 위나라를 토벌하러 마지막으로 출병했을 때 피로가 쌓이고 병들어 오장원에서 죽었다고 기재됐다. ‘출병하여 승리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죽으니 천하영웅의 옷깃을 눈물로 적시네(出師未捷 身先死,長使英雄淚滿襟).’ 당나라 두보의 이 유명한 시는 심금을 울리고 천고의 시간 동안 눈물짓게 했다. 하지만 사실 제갈량은 죽지 않았는데 그가 마지막에 기산(祁山)을 떠나고 ‘거짓’ 죽음 후 은둔한 일체는 그의 가족마저 몰랐다. 이때부터 인간세상의 제갈량은 ‘죽고’ 산 속 깊은 골짜기에 계속해 도를 닦는 대도(大道) 은사가 한 명 늘어났다.
이후에 제갈량은 두 어린 사내를 제자로 삼아 재능을 전부 전수해주었다. 그가 이 두 제자에게 준 교재 중 하나가 바로 ‘마전과(馬前課)’[2]다. 이 유명한 예언은 삼국시대 이후 현대까지 연역해왔는데 확실히 제갈량의 친필 작품이다.
둘째 제자는 속세에 미련이 남아 수련 성취하지 못했고 이후에 윤회하고 환생하면서 간혹 도를 닦았다. 줄곧 ‘마전과’를 마음에 두고 잊지 못했으며 생생세세 끊임없이 ‘마전과’와 ‘우연히’ 만났다. 청나라 때 ‘마전과’를 인간세상에 전해준 승려 수원(守元)[3]이 바로 제갈량의 둘째 제자다.
큰 제자는 배경이 심상치 않은데 과거 그는 대우(大禹)의 중신 백익(伯益)이었고, 이후에 예수 열두 제자 중 시몬으로 환생했으며, 전생에는 제갈량의 조카였다가 이후에 양자로 삼은 제갈교(諸葛喬)로서 남벌 전장에서 희생됐다. 환생한 후 제갈량은 그를 찾아 제자로 삼았다. 그는 정진해 도를 닦아 원만 공성했고 도가 이 문(門)의 계승자가 됐다. 이후에 몇 세 환생하면서 모두 이 문에서 도를 닦고 대를 맺으며 제고하다가 수나라 때 이순풍(李淳風)으로 환생했다.
이순풍은 10살 때 가족을 따라 거처를 옮기면서 13살 이세민과 소꿉친구가 됐다. 얼마 후, 그 문의 도가 계승자(전생에 그의 제자) 눈에 들어 진수(眞修) 제자가 됐고 이 문에서 도를 닦았다. 16살 때 거의 다 배운 후 명을 받들고 이세민의 천하 통일을 보좌했다. 말로는 이세민의 ‘기실참군(記室參軍: 기록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벼슬)’이라 하지만 사실은 ‘비밀 참모’였다.
사부님의 점화 하에 나는 제갈량과 이세민이 원래 일체(一體)의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즉 제갈량이 자신의 신통력으로 인간세상에서 400여 년 연화하고 수련한 후 이순풍을 통해 다시 돌아와 이세민을 도와 당나라 신기원을 열어놓았다. ‘마전과’와 ‘추배도’를 본 독자들은 두 가지가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마전과’는 아주 간단하고 ‘추배도’는 ‘마전과’를 넓히고 이어나간 것 같다. 삼국 이후 400년 동안 기초를 다지다가 역사의 최고봉 – 당나라에 이르러 예언문화를 눈부신 절정에 올려놓았다.
4. 이순풍-수학, 역학, 천문학, 천상학자
우리 이 시리즈 문장은 고금천상을 접점으로 하기에 천상을 기초로 여러 곳에서 천상의 눈금판을 보여준 ‘추배도’가 없어서는 안 될 증거물이다. 그러므로 이순풍이 이 방면에서 다진 기초를 소개할 수밖에 없다.
이순풍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역학자이자 손에 꼽히는 천문학자다. 또한 당나라 유명한 수학자이자 역사학자다.
[혼천의(渾天儀)를 개량]
오늘날 우리가 본 고대 혼천의는 이순풍이 장형(張衡) 이중고리 구조 기초 위에 개량 발명한 삼중 고리 혼천의다. 이는 고대 천체 현상 관측에서 가장 정밀하고 기본적인 측정기다.
대만 가오슝 국립과학공예 박물관의 고대 삼중고리 혼천의는 이순풍에서 시작됐다
[정사(正史)에 최초로 기록된 정밀한 일식(日食) 계산]
역사서 기재에 의하면 이순풍이 양력을 수정한 후 태종에게 곧 일식이 발생한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고대에 일식은 황제로 말하면 불길한 징조였기에 누구도 감히 예보하지 않았다. 당태종은 좀 언짢아하면서 이순풍에게 말했다. “만약 일식이 없으면 경은 어찌하리오?”
이순풍은 “만약 일식이 생기지 않는다면 신하를 죽여주십시오”라고 답했다. 예정된 날, 태종은 정원에서 기다렸지만 일식의 조짐이 보이지 않아 우스갯소리로 이순풍에게 “집에 돌려보낼 테니 가서 아내와 애들하고 작별인사를 하게”라고 말했다.
이순풍은 “아직 일각이 남았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해시계 지침 그림자를 가리키며 “여기까지 오면 일식이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과연 말한 대로 일식이 나타났고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4]
역사서 고증과 결합해 천문 프로그램으로 고대 천상을 되돌려보니 정확하게 일식을 예측한 시간이 바로 639년 (정관 13년) 9월 3일이라는 것을 확정할 수 있었다. 이는 정관 연간 유일한 개기일식이었다.
정관 13년(639년 9월 3일) 장안의 일식 약도. 정확한 일식 예측이 역사적으로 처음 기재됐다.
[탁월한 수학자]
이순풍은 ‘주비산경’, ‘구장산술’, ‘해도산경’, ‘손자산경’, ‘오조산경’ 등 10부 수학 전문 저서를 편집하고 주석했다. 그가 자세하게 추론하고 연역한 결과 심오하고 난해하던 고대 산경은 배우기도, 이해하기도 쉽게 됐고 이후에는 당나라 국자감 수학당의 수학 교재가 됐다.[5]
이순풍이 주석한 산경은 현 시대와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영국 학자 조지프 니덤 박사는 그를 ‘전반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 주석자’라고 칭했다.
[역사학 전문가]
고대 문인들은 줄곧 사서 편찬을 최고 성취라고 여겼다. 당태종은 대량의 역사책을 사서 편찬하고 편저했는데 이순풍은 자신의 전문 부분에 참여했다. ‘진서’, ‘오대사’ 중의 ‘천문지’, ‘율역지’, ‘오행지’를 정리하고 저술했으며 ‘양서’, ‘진서’, ‘북제서’, ‘주서’, ‘수서’ 등 천문 부분에도 참여했다.
[천문학, 역학 전문 저서 ‘을사점’]
이순풍의 ‘을사점(乙巳占)’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고대 천문학, 역학 전문저서다. 그 중 혼천의 구조를 자세히 기술했고, 겨울에 태양이(지구를 상대로) 빠르게 운행하고 여름에 느려지는 수치를 정확하게 정량하고 계산했는데 이는 유명 천문학자 승일행(僧一行)보다 더 빨랐다. 또한 책에서는 처음으로 풍속에 등급을 매겼다. ‘을사점’의 점괘, 음양, 예측 등 내용을 근대에서는 찌꺼기라 부르지만 사실 그야말로 신전(神傳)문화의 진수 중 하나다. 이런 진수에 근거에 이순풍은 털끝만큼의 착오도 없이 일식 시각을 추산해내고 역법을 연구 제작했으며 미래를 예견했다.
5. 천상(天象)문화의 대성(大成), 예언문화의 절정
뉴턴의 일체 과학적 성과가 사실 그의 신학성과를 위해 길을 닦아놓은 것처럼 이순풍의 학술 성취도 모두 그의 ‘추배도’를 위해 기초를 닦아주었다.
[작자 발견]
지금 보편적으로 ‘추배도’는 원천강(袁天罡)과 이순풍이 공동 집필한 것으로 여기지만 역사책에는 오직 ‘당나라 이순풍이 추배도를 저작했다’[6]고 기재돼 있다. 내가 역사 장면을 추적해보니 이 기록이 정확했다. ‘추배도’는 원천강과 관계가 없었고 이순풍 혼자서 집필한 것이다. 하지만 삽화는 친구를 청해 그의 뜻대로 그린 것으로 이런 삽화들은 모두 그가 설계한 한 폭 한 폭의 그림 수수께끼였다. ‘추배도’ 마지막 편의 두 사람이 바로 그 둘의 뒷모습이다.
[구세력이 파괴]
‘추배도’는 전부 각 조대(朝代)의 대사건과 교체를 예언했고 천백 년의 검증을 거치면서 너무 정확한 나머지 각 왕조 통치자들이 두려워해 금서에 속했다. 하지만 금지할수록 더욱 널리 전해져 북송 때는 이미 집집마다 모두 있을 정도에 이르렀다.[7]
악비(岳飛)의 손자이자 남송 역사학자 악가(岳珂)의 저작 ‘정사(桯史)’에는 정부에서 ‘추배도’를 거짓으로 꾸민 이야기가 적혀있다. 송태조가 예언서를 금할 때 민간에는 숨겨둔 책이 많아 금할래야 금할 수 없었다. 조보(趙普)가 ‘추배도’를 저장한 사람이 너무 많고 연좌된 사람도 너무 많다고 상주하자 태조는 ‘자꾸 금할 필요 없이 거짓으로 만들어 섞어 넣으면 되느니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명을 내려 구본 ‘추배도’를 받아온 후 이미 들어맞은 부분 외에 뒤편 순서를 뒤바꿔 위본 100부를 만들어 유전되게 했다. 그래서 다들 어느 것이 진본인지 몰랐고 간혹 ‘추배도’를 보존한 사람들도 더 이상 적중하지 않아 보관하지 않았다.
공능으로 추적 조사해보니 이번 거짓 조작은 송태조 조광윤이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동생과 형을 죽이고 황제 자리를 빼앗은 조광의가 한 짓이다. 북송 때 정부에서 파괴한 후 뒷면 예언을 해독하려면 어려움이 아주 컸는데 이는 전통문화에 대한 한차례 파괴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추배도’는 예언문화의 절정으로서 제갈량이 직접 관여한 것이다. 안에는 파룬따파에 대한 예언이 아주 많고 구체적이며 직접적이다. 1300여 년의 검증을 거쳐 ‘추배도’는 이미 충분한 신뢰를 쌓았는데 그 중에는 사악의 대법 박해가 반드시 실패하고 성인의 정법이 반드시 성공한다고 자세히 기록돼 있다. 상생상극의 낡은 이치에 근거하면 만약 당시 순서를 뒤바꾼 파괴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사람들이 대법을 인식하기가 아주 쉬웠을 것이다. 그럼 누가 하늘의 뜻을 어기고 악과(惡果)를 맛보려 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감히 대법을 박해하지 못할 것이다.
[위본이 가라앉고 진상이 드러나다]
현재 가장 널리 전해진 것은 청나라 황궁 김성탄(金聖歎)이 평어 주해한 ‘추배도’다. 추적 조사해보니 그것은 순서가 뒤바뀐 책 가운데서 가장 진본과 비슷한 책이다. 시간의 검증 하에 대량의 위본을 도태시키고 끝내 이 가장 진본에 가까운 책을 드러나게 했다.
만약 새롭게 순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면 현대와 미래의 예언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예언한 일이 발생한 후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대응되는 예언을 이해할 수 있는데 즉 순서를 되돌리는 것은 다만 ‘사후제갈량’으로서 누가 순서 되돌리기를 앞당길 수 있겠는가?
다행히 천상의 도움이 있기에 연결된 시간 좌표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러면 ‘추배도’에서 예언한 현대 사건들을 천상의 표기에 근거해 시간순서에 따라 바로 잡음으로서 정법(正法)에 관한 부분으로 현대 사람들을 경계할 수 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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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 천상에서 정법수련의 연장을 보다(4)
-천운에 의외가 발생하고 천상이 화려함 보여줘
1. 오성(五星)이 짝을 이루니 길인가 흉인가?
2. 967년 오성이 구슬을 꿴 것처럼 일렬로 늘어섰고 송태조가 9년 수명을 연장하다
3. 고금 종횡으로 성세를 바라보니 겉모습 뒤에 근원이 있다
주)
[1] 역도원(북위) ‘수경주(水經注)’: ‘말하기를 팔진이 세워지면 앞으로 싸움에서 지는 일이 없을 것이고, 병세(兵勢)가 마음대로 출몰해도 앞으로 누구도 파헤치지 못할 것이다’
[2] ‘마전과’는 중국 역사 상 가장 유명한 3대 예언서 중 하나로서 ‘추배도’보다 400여 년 앞섰다. 청나라 가경 시기 86세 승려 수원에 의해 전해졌는데 이 예언은 시간 순서에 따라 14과를 배열했다. 매 과는 사언 예언시(讖詩)의 풍격으로 간단명료하게 큰 역사시대를 예언했다. 삼국 후기부터 현재까지 관통했고 미래로 직통했는데 현재까지 100% 적중이다.
[3] 승려 수원은 ‘마전과’ 앞부분에 한 단락 부연설명을 적었다. ‘공명의 ‘마전과’는 군사 여가시간에 만든 것으로 이로서 후세 사람들에게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이 14과는 ‘마전과’에서 감별해 취사선택한 것으로 매 과는 한 조대를 가리킨다. 흥망성쇠는 더 말할 필요 없이 14과로 끝낸 이유는 두 순환 주기이기 때문이다. 그 후는 천지가 새로운 기원으로 갱신하기에 더 이상 예측할 수 없다.
‘자연의 순환 이치는 총명하든 어리석든 모두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다 인연관계가 있는 법이다.’
‘86세 노승 백학산 수원지(八六老僧白鹤山守元志)’
[4] ‘수당가화(隋唐嘉話)’: 당나라 집현전 학사 유수(劉餗)의 저작으로 중요한 역사학 가치 때문에 후대 역사학 고서에 많이 인용됐다.
[5] ‘구당서(舊唐書)·이순풍전(李淳風傳)’
[6] ‘정사’ 악비의 손자인 남송 역사학자 악가가 저술한 역사자료 기록
[7] “집집마다 ‘추배도’가 있다”는 북송 신종이 한 말이다. 북송 장작(莊綽)의 ‘계륵편’ 기재에 의하면 왕안석 변법 때 정적(政敵)을 엄하게 공격해 충직한 대신들을 모두 배척했다. 그가 범순인(범중엄의 둘째 아들)을 공격하고 심지어 범씨 온 가족까지 연좌하려 했지만 이유를 찾지 못하자 범씨네 집에 금서(禁書) ‘추배도’가 있다고 말했다. 신종은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이 책은 사람마다 갖고 있으니 연좌할 이유가 없다네”라고 말했다.
원문발표: 2017년 1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29/3419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