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불(滅佛)해 천벌 받다, 아주 정확한데 예언을 보라
글/ 성연(聖緣)
[밍후이왕]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를 위해 거듭 시간을 연장하셨다. 많은 제자들은 소중히 여길 줄 알고 끊임없이 정진하지만 이미 지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시간을 연장했다는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중사가 도를 듣는 사람으로 되거나 심지어 믿지 않고 동요하거나 정법을 이탈해 반면으로 나간 사람도 있다. 이는 모두 대법을 믿는 둥 마는 둥 했기 때문이다. 근원은 구세력이 중화 신전문화를 파괴해 현대인이 인식 착오가 생겨 대법 인식에 장애가 생겼기 때문이다.
본문은 천상 문화의 가장 낮은 시각에서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천인합일의 정묘함을 밝히고자 한다. 현대를 분석하면 시간을 매번 연장한 것이 천상에 매번 표기를 남겼다. 그것은 미래에 남긴 증거일 뿐만 아니라 지금 시기 사람에게 주는 하늘의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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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문장에 이어)
세인은 역사에 대한 인식이 역사 표면에만 국한되어 깊은 인과 관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늘 천도를 위반한다. 본 편의 주인공인 후주(後周) 세종 시영(柴榮)은 근면하게 나라를 다스리고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변경을 개척해 영토를 확대하고 전공이 혁혁한 보기 드문 현군으로 알려졌지만 39살 장년에 돌연 사망했다. 옛부터 지금까지 인간 세상에는 줄곧 청장년 시기에 시영이 일찍 별세했다고 한탄하며 애석해하지만 천도로 가늠하면 그는 하늘을 거스른 제왕이다. 두 차례 아주 위험한 천상으로 시영이 하늘을 거스른 큰 죄를 천상에 새겨 넣었다.
1. 화성이 태미(太微)에 머문 것은 멸불의 죄를 예고
태미성은 조정 정부를 대표한다. 화성인 형혹(熒惑)은 천벌을 일컫는다. 화성이 태미에 머무르면 제왕에게 천벌을 내린 것이거나 제왕이 운명하거나 조정이 전복될 징조다.
954~955년 아주 위험한 천상인 화성이 태미에 머물다.(후주 세종이 제위에 오른 후 현덕 원년~2년)
후주 세종 시영은 954년 초에 제위에 올랐다. 그해 한력(漢曆) 연말(955년 초)에 화성이 태미에 머무른 아주 위험한 천상이 나타나 시영이 하늘을 뒤덮을 큰 죄를 지어 천벌을 받을 징조였다. 화성이 태미에 머무른 천상이 지난 후 다시 태미성을 지날 955년 여름 5월, 시영은 전국적으로 불교를 소멸하는 멸불(滅佛) 정책을 시행했다. 조서를 내려 사찰을 부수었고 경내 불법 사찰은 황제 제언을 남긴 사찰을 보류한 이외 현마다 사찰 하나만 남기게 하고 나머지는 다 부숴 전국에 모두 30,360개의 사찰을 부수고 2,000여개 중점 사찰만 남겼다. 불상을 망가뜨려 동전으로 만들고 근 1백 만 명 승려를 환속하도록 핍박했다.[1][2]
멸불은 굉장히 큰 죄다. 시영 이전에 세 명의 황제가 멸불해 모두 장년에 급사했고 자손에게도 재앙이 미쳤다. 멸불한 이 3명의 제왕은 각기 북위(北魏)의 척발도(拓跋燾), 북주(北周)의 우문옹(宇文邕), 당나라의 이염(李炎)이다.
북위 태무제 척발도는 전공이 혁혁한데 친히 기병대를 거느리고 사방 제후국을 쳐 북방을 통일했다. 그는 도교를 숭배해 ‘천사도’를 북위에 전파하도록 추진했지만 31세 때 한족 중신인 최호의 꼬드김을 받고 국사 ‘천사도’ 창시자인 구겸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서를 내려 50세 이하의 승려를 환속하게 하고 군인, 노역, 농지세를 증가했다. 39세 당시 가장 엄격한 멸불 조서를 내리고 전국적으로 불상을 때려 부수고, 불경을 불태우며 사찰을 허물고 승려들을 생매장했다. 척발도가 도교를 숭배하긴 했지만 도교는 중생을 제도할 수 없었기에 도를 성행시킨 공덕이 법을 성행하게 한 공덕보다 작았고 멸불의 하늘 같은 큰 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척발도는 45세에 환관에게 살해됐고 두 아들(태자와 공종)도 잇따라 환관 손에 죽었다.
북주 무제 우문옹도 전공이 탁월했고 북방을 통일했다. 그는 32세 때 불도를 함께 소멸하고 사찰 4만 개를 약탈했으며 불적(佛跡)을 불사르고 강제로 300만 승려를 환속하게 하여 북방에 불법이 거의 흔적을 감추었다. 36살 때 득의양양해 하며 직접 출정하려 할 때에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얼마 되지 않아 우문 황족은 멸절되어 강산은 수나라로 대체됐다.
당나라 무종 이염도 전공이 있다. 병사를 파견해 번진(藩鎭)의 반란을 평정하고 위구르족을 패배시키고 외몽골을 안정시켰다. 그는 도교를 진심으로 믿었지만 부처를 믿지는 않았다. 26살에 제위에 오른 후 불교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32살에 정식으로 조서를 내려 멸불하게 하고 명을 내려 사찰 4600여 개를 허물고 작은 사찰 4만개를 허물었다. 매 군(郡)에 사찰 하나만 남기게 하고 불경을 불사르고 불상을 녹여 동전으로 만들었으며 강제로 26만여 명 승려를 환속시켰다.[3] 이것을 역사상 회창(會昌)시기 멸불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 번진 세력이 컸고 부처님을 믿는 사람도 많아 멸불의 성지는 일부 지방에서 거부됐다. 두 번째 해 무종은 33살 나이에 돌연 사망했다.
후주 시영은 상술한 3조대의 이런 역사 교훈을 모르고 강제로 멸불을 추진했다. 하늘을 공경하고 부처님을 존경하는 수하에게는 심지어 “부처는 부처고 상은 상이다. 부처는 육신의 살과 눈도 시주하는데 불상을 부수어 돈을 만드는 것을 부처도 동의할 것이다. 내 몸으로 민중을 구제할 수 있다면 나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시영은 천하의 불상으로 돈을 만들겠다는 명을 내리고 집에 5근 이상의 동 불상을 사사로이 감추고 바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해순식간에 천하의 불상이 거의 사라졌다. 진주(鎭州-지금의 허베이 스자좡 정딩현) 대비사에 동으로 만든 대관음보살상이 아주 영험해 불상을 부수러 간 사람이 손목이 부러져 죽었기에 아무도 다시는 건드리지 않았는데 시영은 ‘직접 출정’해 본인이 도끼로 보살의 흉부를 찔러 훼손하고 직접 멸불 운동을 추진했다.
멸불 4년에 더 위험한 천상을 맞이했다.
2. 화성이 방수(房宿)에 머문 것은 하늘의 뜻을 거스른 왕에게 주는 천벌
많은 사람이 ‘형혹수심[熒惑守心-화성이 심수(心宿)에 이르다]’란 역사상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천상은 알지만 ‘형혹수방(熒惑守房-화성이 방수에 머무르다)’이란 말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시살 ‘사기’는 ‘화성이 심수에 머문 것과 방수에 머문 것’을 동등하게 대했다. ‘사서-천관서’에는 말했다. “(화성이 방수, 심수에 머물면 왕자(王者)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화성이 방수에 머문 것도 제왕의 큰 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 959년 천상 사진, 화성이 역행해 방수에 머물렀다. 시영이 멸불해 천벌을 받던 시기
천상은 예언이고 역사의 공과를 판정하는 천도(天道)다. 화성이 순행해 심수에 머물렀을 때 대응한 제왕은 황위가 가장 바른 진시황, 당태종과 같은 황제다. 화성이 역행할 때 대응한 제왕은 대역무도한 하늘의 뜻을 거스른 양무제 소연(蕭衍), 후양태조(後梁太祖) 주온(朱溫)이다. 마찬가지로 역행해 방수에 머물고 미수(尾宿)에 머문 천상에서 재앙을 받은 제왕 역시 하늘의 뜻을 거스른 자이다. 방수에 머물러 있으면서 심수를 이탈한 천상에 대응한 제왕은 황위가 바르지 않은 것이고 하늘의 명시이자 그에게 내린 정론(定論)이다.
사서에는 시영은 후주 태조 곽위(郭威)의 유서를 받고 제왕이 됐다고 말했고 현대인도 모두 이렇게 여기고 있지만 사실 진상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시영은 곽위의 부인 시(柴)씨의 친 조카인데 곽위가 양자로 받아들이고 곽영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시영은 황위에 오늘 후 시씨 성으로 다시 고쳤는데 양부가 주신 성을 배반한 한 것이다. 양부 선황제가 주신 성을 어기고 버렸으니 어찌 선황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혜안통 공능으로 당시 천상에 대응한 역사를 추적해 보았는데 시영의 황위는 빼앗아 온 것이었다. 후주 태조 곽위의 성년 아들은 모두 전대 황제에게 살해됐다. 태조와 후비는 황위를 어린 친아들에게 물려주려했지만 태조가 죽은 후 대권을 잡고 있던 시영은 먼저 영구(灵柩) 앞에 가 황위에 올랐다. 황위가 바르게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영은 본인의 성씨로 바꾸고 양부 곽위의 친자식을 역사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천하를 시씨 강산으로 바꾸려 했던 것이다.
진실한 역사는 모두 천상 속에 담겨 있다. 인간이 알고 있는 역사가 천상과 맞지 않은 것은 후세 사람이 기록할 때 바꾼 것이다.
시영이 멸불한 후 5년 째 되는 해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거란을 북벌하고 유운 16주를 수복했다. 42일 동안 칼날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싸워 이겨 연속 3관 3주 17현을 수복하고 유주(幽州)를 탈취하고 누각에 올라 군사를 둘러볼 때 누각 이름이 ‘병용대(病龍臺)’라는 말을 듣고 시영은 순간 말을 못하고 말을 타고 누각에서 내려갔다. 그날 저녁 시영은 이상한 병에 걸렸는데 가슴에 악성 종기가 생겼다. 모든 사람이 예견한 대로 군사의 사기가 가장 왕성할 때 시영은 신속하게 철수하고 후사를 안배했다. 이때가 959년 한력 하(夏) 5월이었다. 바로 화성이 방수에 머문 때이다.
3. 전력을 다해 예언 타파했지만 천벌에서 벗어나지 못해
시영은 철수할 때 3척(尺) 되는 나무 하나를 얻었는데 위에 ‘점검(點檢)이 천자가 된다’[4]라는 글이 있었다. 그는 크게 놀라며 이 참언(讖語)은 그의 주위에 있는 점검 장영덕(張永德)이 황위를 찬탈할 것임을 예시한 걸로 알았다. 장영덕은 후주 선대 군주인 개국 황제 곽위의 사위이고 시영은 곽위의 내질이고 양자다. 5대 시기 선제 사위가 선제 아들 황위를 빼앗은 일이 있다. 석경당(石敬瑭)이 바로 이렇게 후진왕조를 세웠다.
시영은 변경(汴京)에 돌아간 후 전전도(殿前都) 점검 장영덕의 직무를 해제하고 제일 충실한 대장 조광윤(趙匡胤)을 전전도 점검으로 승진시켰다[4]. 시영은 본인이 이렇게 하면 ‘점검이 천자가 된다’는 예언을 깰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결국 예언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가 바로 하유월(夏六月)이었는데 화성이 방수에 머문 위태로운 결말이었다. 화성이 심수를 범한 것은 천자의 하늘 구역을 대표한다. 시영은 위독했다. 화성이 심수를 떠나려 할 때인 7월 27일(사진 중의 붉은 점 위치)에 시영은 붕어했다. 시영의 어린 아들은 즉위 반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 다음 해 정월 초삼일에 전전도 점검인 조광윤이 진교병변(陳橋兵變)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후주를 대체하는 송나라를 세워 ‘점검이 천자로 된다’라는 예언이 맞아떨어졌다.
시영은 원래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믿으며 도교를 믿었지만 부처님을 믿지 않아 하늘을 거스른 멸불의 길을 걸었다. 그는 천명을 믿었기에 술법에 능통한 간의대부(諫議大夫) 왕박(王樸)에게 물은 적이 있다. “짐의 황위는 몇 년인고?” 왕박은 말했다. “신은 식견이 좁아 배운 것으로 추측하면 30년 후는 알 수 없습니다.” 시영은 아주 기뻐했다. “경의 말대로 짐이 10년은 천하를 개척하고 10년은 백성을 부양하고 10년은 태평하면 만족하겠네![2]” 그러나 그의 황위는 5년 6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오륙에 삼십이 바로 미혹적인 방식의 참언에 딱 맞는 것이다.
시영은 예언을 아주 믿었지만 진정한 예언을 그는 예견하지 못한 것이다. 5대 시기 당나라 ‘추배도(推背圖)’가 중국에 유행했다. 그때 책을 모두 사사로이 전사했는데 ‘추배도’는 의도적으로 가짜를 만든 위본이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 시간 순서대로 배열한 예언인데 아주 정확해 점점 성행했다. 5대 난세에 많은 사람들이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아이가 예언대로 벼락출세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추배도’에서 글을 선택했다. 야심 있는 많은 사람들은 ‘추배도’를 깊게 연구하면서 미래 천명이 본인에게 올지 보고 모반을 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했다. 시영이 열심히 ‘추배도’를 보았다면 본인에게 정해진 운세를 보아냈을 것이다.
4. 하루도 차이 없는 예언, 정교한 천도(天道)가 드러나다
금비본(金批本) ‘추배도’ 제14상
이 예언은 보기에는 간단하고 알기 쉬운 것 같다. 이 예언은 5대 10국을 예언한 것이고 주인공은 시영이라고 청나라 천재 김성탄(金聖歎)도 이렇게 해독했지만 1300여 년 동안 이런 표면적인 해석은 오차가 있을 뿐만 아니라 천기를 놓친 것이다!
[오얏나무 싹이 트고 석류가 만개하다(李樹得根芽 石榴漫放花)]: ‘이(李)’, 5대 시기 사타인(沙陀人) 이존욱(李存勖)이 수많은 전쟁으로 후량을 멸하고 후당을 건립해 뿌리내리고 싹이 튼 것이다(황위가 수 대 전해졌다). ‘석(石)’, 석경당(石敬瑭)이 연운(燕雲) 16주를 할양하고 거란 군사력을 빌려 후당을 멸하고 후진을 건립했는데 2세에 망했다. 후진의 성(姓)이 석씨다. ‘류(榴)’, 음이 같은 것은 ‘류(劉)’이다. 유지원(劉知遠)이 후한을 건립하고 후진을 대체했다. 류한(劉漢) 왕조도 2세에 망했다.
[고목이 봄을 만난 것은 순간일 뿐(枯木逢春只一瞬)]: ‘고목’은 장작(柴)이다. ‘봄을 만나다는 것은 싹이 트고 꽃이 핌을(榮發) 말하는데 후주 세종 시영을 비유한 것이다. 사진과 상응하게 사진 속의 장작이 꽃이 폈는데 시영을 비유한 것이다.
이 구절 뜻이 가리킨 것은 시영이 힘을 다해 나라를 다스리고 문화적 업적과 군사적 공적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후주의 번영은 한 순간뿐이라는 것이다. 시영은 황위에 오른 후 5년 반에 질병으로 죽었다. 그의 7살 아들이 황위에 오른 후 반 년만에 송나라에 의해 평화적으로 대체됐다.
사진 중에 싹인 핀 것은 한 그루(株)뿐이다. ‘주(朱)’의 비슷한 음으로서 왕조를 세운 주(朱)씨 성을 가진 후량 황제 주온(朱溫)을 비유한 것이고 5대 난세에 한 그루[一株(一朱)]에서 시작해 종결이 시영임을 비유했다.
[그에게 천하 영화를 다투게 하다(讓他天下競榮華)]: 5대 시기 천하가 혼란하고 군웅이 할거하고 영화부귀를 얻으려고 다투면서 황제나 왕으로 자칭한 현상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907~960년 사이 중국은 5대 10국 시기에 진입했는데 중원대지에는 잇따라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 5개 조대가 나타났다. 그밖에 중원 이외 지역에서도 잇따라 전촉, 후촉, 오, 남당, 오월, 민, 초, 남한, 남평(형남), 북한 10개의 작은 정권이 나타났다.
[금목수화토는 이미 끝났다(金木水火土已終)]: 금목수화토 오행으로 5개 조대 교체가 끝났음을 비유한다.
[십삼동자 오왕공(十三童子五王公)]: 5대에 모두 황제 13명이었는데 13명의 군주는 모두 50여 년을 통치했다. 평균 계산하면 군주 일인 당 황위가 3년 남짓해 재위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동자’로 비유한 것이다.
김성탄이 13황제를 해석했지만 마지막 주공제(周恭帝) 시종훈(柴宗訓)을 계산에 넣지 않았는데 착오인 것이다. 시종훈은 허세(虛歲)로 7살 때 즉위하고 8살에 어쩔 수 없이 송태조 조광윤에게 양위했지만 황제로 치지 않을 수 없다. 시종훈이 황제가 아니었다면 그의 양위는 불법인 것이고 송나라 황제도 불법인 것이다. 시종훈의 황위는 송나라에서 승인했었다. 공제라는 시호는 바로 송나라가 준 것이다. 때문에 그는 역사가 인정한 제왕이다.
그럼 5대는 황제가 14명이지 않는가? 지금 사서에도 5대 시기에 황제가 14명이라고 인정했는데 오차가 있다. 이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제위를 찬탈한 후량 영왕 주우규(朱友圭)도 황제로 쳤기 때문이다. 주우규는 아버지 주온을 살해한 후 스스로 황제라 자칭했는데 10개월밖에 가지 못하고 남동생의 정변으로 죽었으며 죽은 후 서민으로 파면됐다. 역사상 줄곧 그의 황제 지위를 승인하지 않았는데 현대인이 그를 황제로 여겼을 뿐이다. 이는 원세개(袁世凱)를 황제로 인정한 것과 다름없다. 황위를 찬탈한 것을 바로 잡았다고 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이로부터 ‘추배도’에서 13동자로 5대 13명의 제왕을 비유한 것은 아주 정확한 예언으로서 근대에서 인지한 역사를 초월했다.
[영명하여 다시 태평한 날을 맞이하다(英明重見太平日)]: 백성들은 마침내 영명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를 만나 편안하고 태평한 나날을 보냈다.
[오십삼 삼에 운이 불통하다(五十三參運不通)]: 지금은 모두 김성탄식 해석에 때라 ‘5대에 모두 53년’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데 천기를 잃은 것이다.
고대에는 세는 나이로 나이를 말했다. ‘추배도’에도 한 해가 지나가는 시점을 한 연대로 적었다. 예를 들면 제2상 당나라 운세를 예언할 때 ‘29선성실(二九先成實)’이라고 썼는데 ‘29에 곱하기 십(二九乘十)’이라는 말과 비슷한 음으로 290년임을 예언했다. 당나라는 기원 618년~907년이다. ‘추배도’에 적혀 있는 시간도 290년이지만 김성탄의 방법대로 계산하면 289년이다. 5대는 907~960년인데 ‘추배도’는 54년으로 된다. 때문에 김성탄이 해설한 본 구절의 53년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더 깊게 분석하면 송태조가 진교 병변을 일으킨 960년 한력 신년 3일 째 되는 날에 황포를 입었다. 5대 후주의 운수가 불통해 다음 날 조광윤이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때문에 본 구절 해석은 5대는 53년 3일을 경과한 후 운세가 통하지 않았고 진교병변이 일어나 송나라가 시작됐다는 뜻이다.
‘삼(參)’은 은근히 ‘삼(三)’을 말했다. 고대에서 말하는 ‘삼(三)’은 세 필의 말을 한 조로 만들어 마차를 끄는 말을 가리켰다. 때문에 여기에서 ‘오십삼 삼’은 5대 운수가 53년 3일임을 예언했는데 하루도 차이나지 않게 정확한 것이다!
5대 10국은 어수선했다. ‘추배도’의 이 상(象)의 예언 시간은 하루도 차이나지 않았고 문구가 우아하고 기세가 웅대해 중국 고전문학 중에서 신이 쓴 글이라고 보고 있다.
이 절묘한 수수께끼는 ‘추배도’가 책으로 나온 지 1300여년 후 당대에 와 풀이됐다. 이 역시 ‘추배도’는 고대인이 위조한 것이 아니고 김성탄이 편성한 위조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삼(參)’에는 또 한 층의 함의가 있다. 한 글자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삼운(參運)’은 괘로 점을 친다는 뜻이 있다. ‘오십삼 삼 운 불통’의 더 깊은 뜻은 53년이면 운이 불통한다는 뜻이다. 그럼 5대의 53년이면 바로 959년으로서 무슨 운이 있던 걸까? 959년에 화성이 방수에 머무른 천상을 가리킨 것이다. 정확한 천상을 결합해 봐야 예언이 하루도 차이 없이 정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물을 것이다. ‘추배도’ 작가가 그렇게 높은 천문 조예가 있겠는가? 후세 사람이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 아닐까?
이런 것에 그친 것이 아니다. ‘추배도’에서 말한 현대에 대한 예언만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수 있다. 역사적 검증과 역사가 다진 것을 결합해야 확실하게 현대 오늘날 천상이 인간에 대한 진정한 경고를 볼 수 있다. 다음 편에서 우리는 ‘추배도’의 진정한 연원을 밝히고자 한다.
(다음 편에 계속)
다음 편 목록:
고금 천상에서 정법 수련의 연장을 보다(3)
공명이 이순풍에게 대를 전해 예언 문화를 계승하다
1. 반인반신의 제갈량 집집마다 신적(神迹)을 숨기다
2. 팔진도(八陣圖)에 귀신공(鬼神工)이 숨겨 있다. 천수(天數)가 억제해 의지를 달성하지 못하다.
3. 일생에 두 명(命)이 속세를 떠나 찬란한 당나라 풍모를 부흥시키다
4. 수학, 역학(易學), 천문학, 천상학자 이순풍
5. 천상문화의 대성, 예언 문화의 전성기
주)
[1] ‘구오대사, 주서, 세종기(舊五代史·周書·世宗紀)’
[2] ‘신오대사, 주본기(新五代史·周本紀)’
[3] ‘구당서, 무종본기(舊唐書·武宗本紀)’
[4] ‘송사, 태조본기(宋史·太祖本紀)’
원문발표: 2017년 1월 2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28/3419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