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대형 화물차에서 불을 끄다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2003년 정월대보름 나는 수련생과 경공업시장에 있는 다른 한 수련생 집에 갔다. 경공업시장에는 남자애들 여럿이서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는데 잠깐 사이 길옆에 세워놓은 대형 화물차에 불이 붙었다. 차 옆에는 백여 명이 둘러서서 구경만 할 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기사와 차주, 그리고 차주의 아내가 불을 끄고 있을 뿐이었다. 불길은 점점 세졌다. 화재의 원인은 폭죽이 화물차 위에 있는 솜이불에 떨어진 것이다.

이 상황을 보고 나는 주저 없이 대형 화물차 위에 올라갔다. 당시 차주의 아내는 5, 60m 떨어진 집에 가서 한 대야 한 대야씩 물을 길어 왔는데 너무 적고 거리가 멀어서 별로 소용이 없었다. 당시 나는 3백여 위안(한화 약 6만 원) 나이키 흰 구두를 신고 있었다. 불은 적재함 측면 윗부분에 붙어서 차에 엎드려서 발로 불을 밟아야 했다. 어떤 곳은 발이 닿지 않아 기사에게 나를 당기게 하고 몸을 아래로 내려 발로 불을 찼다. 나의 온몸은 연기에 그을려서 옷이 엉망이었고 흰 구두도 본색을 알아볼 수 없었다.

40여 분 구조하여 불길은 거의 잡혔고 소방차도 왔다. 나는 차주에게 말했다. “형씨 소방차가 왔으니 나는 가요.” 차주가 물었다. “형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말했다.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진선인은 좋습니다만 기억하면 됩니다. 나는 대법제자요.” 말을 마치고 떠났다.

대략 10여 일이 지나서 다른 한 수련생 집에 갔다. 수련생의 어머니가 말했다. “대법제자는 정말 좋아. 불을 끄고도 이름을 안 남기고 그저 대법제자라고만 했다네.” 나는 자신을 가리키면서 수련생에게 말했다. “아주머니가 말한 일은 바로 내가 한 좋은 일이야.” 수련생이 나에게 말했다. “아이고 형님, 그 사람들이 십여 일을 찾은 ‘소화영웅’이 원래는 형님이었군요!”

수련생이 연락하여 차주네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차주의 아내는 나를 보더니 격동되어 말했다. “아저씨, 드디어 아저씨를 찾았어요. 돈을 좀 드려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 나는 말했다. “안 받겠습니다. 이건 대법제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까요?”

그녀는 과일 쟁반에서 사과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말했다. “사과 하나로 됐습니다.” 그는 또 말했다. “아저씨 이담에 돈 쓸 일이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당시 기사는 아저씨가 우리 친척인 줄 알았대요. 애쓰셨어요. 아저씨, 본래 저의 남편은 텔레비전의 선전을 보고 파룬궁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오늘은 현실 중에서 파룬궁을 배우는 사람을 보았네요.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이렇게 좋다니요!”

나는 차주의 아내에게 파룬궁의 기본 진상을 좀 알려 주었다. 내가 떠날 때 그녀는 말했다. “아저씨, 시간 되면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여러 해 동안 수련과정에서 대법이 나를 개변하여 씬씽(心性)과 경지가 끊임없이 제고되었다. 만약 대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나도 무사(無私)하게 다른 사람을 도와주지 못했을 것이다. 수련의 길에서 가장 깊이 깨달은 것은 ‘신사신법 하기만 하면 뚫고 나가지 못할 난관이 없다’ 이다.

교도소에서 수련생을 구타하는 경찰을 제지하다

1999년 중국공산당 장 씨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한 이래 나는 모두 11차례 납치당했다. 불법적인 강제노동을 4차례에 걸쳐 모두 3년 1개월(강제노동 미수는 미포함) 했고, 불법적으로 세뇌반을 3차례에 걸쳐 3개월 감금당하고 어쩔 수 없이 5년 동안 떠돌아다니고 7차례 가택을 수색 압수당했다. 아내는 랴오닝(遼寧)성 여자 교도소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2000년 3월 초의 어느 날 나는 파룬궁에 대해 공정한 대우를 요구하러 베이징에 갔다가 불법적으로 1년 동안 강제노동을 당했다. 전화(轉化)하지 않아 만기 후 반년 연장됐다. 교도소에서는 우리에게 죄수복을 입으라고 했지만 거절하자 경찰은 대법제자들을 한 사람씩 끌고 나가 구타했다. 수련생 샤오위(小於)를 구타할 때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소리쳤다.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 대법제자 몇 명과 복도에 뛰쳐나가서 소리쳤다.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 교도소 부원장 야오촹(姚闖)은 악경 10여 명을 이끌고 와서 나를 땅에 누르고 강제로 수갑을 채우고 나의 바지를 벗겼다. 교도소 과장 왕승리(王勝利)는 나의 허리띠로 나를 때리고 경찰 퉁리융(佟利勇)은 전기봉으로 충격을 주었다. 간사(幹事) 궈아이민(郭愛民), 쑹중톈(宋忠天), 쎄버(謝博), 차오쉐(曹雪)등 10여 명은 구둣발로 신체부위를 가리지 않고 마구 걷어찼다. 교도소 부 과장 장푸썽(張福勝)은 나의 머리카락을 거머쥐고 머리를 시멘트 바닥에 힘껏 박았다.

나의 두 손이 뒤로 채워졌기에 신체 어느 부위도 손으로 가리지 못했다. 하여 온몸에 어느 한 곳도 안 맞은 곳이 없었다. 발에 차여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침침하며 이명에 온몸이 아팠지만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나는 10여 쌍 구둣발 아래서 크게 소리쳤다.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 “당신들은 법률과 인의도덕을 지키지 않는다.” 외치는 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들은 두렵기도 하고 악이 받치기도 해서 양말로 나의 입을 막고 목을 졸랐다. 구타도 더욱 심해졌다. 장푸썽은 때리면서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법을 안 지킬 테다, 인의도덕을 안 지킬 테다, 네가 어쩔 건데!” 야오촹은 떠나기 전에 나의 머리를 힘껏 걷어차고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저 사람의 자료를 만들어, 먼저 판결하게!” 그들은 구타로 지쳐서 앉아 숨을 몰아쉬었고, 내게 바지를 입혀 독방에 19일 가두었다.

이번 구타에 나는 4, 5일 동안 돌아눕지 못했다. 늑골 세 곳이 부러지고 왼쪽 귀 고막에 출혈이 있어 반년 동안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흉부, 아랫배 부위가 2, 3개월 아팠다(교도소에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고 의사에게 보이지도 않았으며, 나 자신도 흉부와 복강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상했는지 모른다). 오른쪽 어깨의 통증은 견디기 어려웠고 견갑골이 1치나 높이 솟아올랐다. 어깨에 손상을 입었고 근육이 수축하여 반년 동안 들지 못했고 1년이 지나서야 좀 호전되었다. 구타당한 후 반년 넘게 자주 두통이 있었다. 불법적 강제노동 1년 만기 후 교도소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법적으로 반년 연장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대법을 배웠다는 이유로 몇 년 동안 많은 고생을 겪었고 아줌마는 박해로 사망까지 했는데 후회되지 않아요?” 나는 말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천만년을 기다려서야 얻은 불법(佛法)인데 끝까지 수련할 겁니다. 후회할 거 없고 별로 고생스럽지 않습니다. 대법이 홍전(洪傳)할 때 불법을 들을 수 있는 것에 비할 바 없이 행복합니다.”

문장발표: 2017년 2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언행으로 대법을 실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2/15/3430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