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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시련 속에서 더 확고해지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1. 입문해 법을 얻다

그때는 1996년 11월이었는데 회사 남자 동료 옷장에 크라프트지로 싸맨 작은 책 한 권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동료에게 빌려줄 수 있냐고 물은 후 책을 들고 보았다. 손이 가는 대로 펼쳐보았는데 마침 ‘수련자 금기(修者忌)’를 보았다.

‘명(名)에 집착함은 유위(有爲)의 사법(邪法)이라, 세간(世間)에 이름을 날리려 필연 말은 선하게 하나 마음에 마(魔)가 있어, 중생을 미혹하게 하고 난법(亂法) 한다.

돈에 집착함은, 재물을 구하는 거짓 수련이라, 교(敎)를 파괴하고 법을 파괴하여 백년을 헛되게 보냄이니, 부처수련이 아니다.

색(色)에 집착함은, 악한 자와 구별이 없으며 입으로는 경문을 읽으면서도 음흉한 눈길을 마주치니 도(道)와는 너무나 먼 것이라, 이는 사악한 속인이다.

육친정(親情)에 집착함은, 기필코 그로 인해 지치고 얽매이며 마에 사로잡히게 됨이라, 그 정사(情絲)를 잡아 쥐어 일생토록 방해받으니, 나이가 들면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이다.’[1]

이 경문을 본 후 깜짝 놀라면서 온 몸이 흠칫했다. 전생의 기억이 열렸는데 전생에 이런 것들에 집착해 수련 성취하지 못했다. 즉시 이것은 보서(寶書)로서 수련을 이끌어주는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당장 수련하고 싶은 마음이 매우 강렬했다. 동료에게 다른 책이 더 있냐고 묻자 그는 ‘전법륜’이란 책이 있다고 해서 그에게 책을 빌렸다. 하지만 당시 법을 얻을 인연이 아직 닿지 않았는지 그는 뭐라 해도 책을 빌려주지 않았다.

한 달 뒤 어느 날, 작업 현장에서 동료들은 일을 마친 후 어떤 사람은 트럼프를 하고 놀았고 어떤 사람은 뜨개질하거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몇 명 언니들이 하는 말이 단번에 귀에 들어왔는데 듣고 나서 매우 신기했다. 그들에게 무엇을 말하냐고 묻자 파룬궁이라 했다. 그래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도 파룬궁을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 사부님의 법신은 나를 법공부 팀으로 이끌어주셨고 연공장을 찾게 됐다.

막 법을 얻었을 때 심성 수련을 매우 중시했다. 그때 나는 시내 대형 국유기업에 출근했는데 대형 제약공장이었다. 직원들은 모두 약을 제멋대로 집에 갖고 갔고 친구나 친척들도 돈을 내지 않고 공짜로 따라서 약을 먹게 됐다. 우리 회사에서 생산한 약은 치료 효과가 매우 좋아 감기약이든 진통제든 아주 잘 팔렸고 약국에서도 인기가 매우 많았다. 어떤 직원들은 남몰래 약을 훔쳐 약국에 팔아 돈을 벌었다. 법을 얻기 전, 나도 이런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특히 내가 맡은 부분이 알약을 압축하는 마지막 제조 절차여서 전부 완성품이기에 가져가기 더 편했다. 그때 내 부모와 친척, 친구들은 모두 내가 가져다 준 약을 먹은 적이 있었다.

대법을 수련하기 시작한 후, 약 한 알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가 나보고 약을 달라고 하면 그에게 말했다. “저는 파룬궁을 수련하기에 약을 가져와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 친척이나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더 이상 나보고 약을 달라 하지 않았다. 부모님도 병이 있으면 약방에 가서 약을 사드셨다.

2. 혹독한 시련 속에서 더 확고해지다

법을 얻은 지 3년 가까이 됐을 때 중국공산당은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산당의 사악한 기세는 폭풍 전야였고 온 도시는 먹구름에 깔려 있었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거대한 난을 앞두고 있었고 그때 나는 25살 미혼 처녀였다.

1) 베이징으로 법을 실증하러 간 수련생들과 함께 한 나날들

1999년 10월 9일, 나는 현지 수련생과 함께 베이징에 법을 실증하러 갔다. 당시 베이징에 갈 때 법리가 똑똑하지 않았는데 다만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날 톈안먼 광장 부근에서 몇 명 외지 수련생을 만났고 그들은 나를 사전에 예약한 방으로 배치했다. 거기는 베이징 시외 단층집이었다.

거기에 도착하자 모두들 함께 교류했으며 매일 법공부를 했다. 법공부와 교류를 통해 왜 베이징에 법을 실증하러 왔는지 알게 됐는데 그것은 대법제자로서의 책임이었다. 대법이 비방을 당할 때 우리에게는 대법을 수호할 책임이 있었다.

비록 셋방 생활이 매우 힘들었지만 전국 각지에서 온 수련생들은 모두 매우 정진했다. 모두들 고밀도(高密度)로 법 공부했고 나도 거의 하루에 ‘전법륜’한 권을 읽었다. 그 당시 법공부를 할 때 머리가 열린 것처럼 법리가 직접 머리에 들어왔다. 법공부를 할수록 법리가 더 똑똑해졌고 마음이 더 평온해졌다.

각지에서 온 수련생 가운데 무슨 연령대든 다 있었다. 전혀 문을 나선 적이 없는 시골 수련생, 노년 수련생과 유아도 있었다. 나와 기타 몇 명 수련생은 자발적으로 ‘책임자’ 역할을 맡아 물건을 구입하고 밥을 하는 등 여러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돌봐주었다. 동시에 끊임없이 톈안먼에 가서 베이징에 법을 실증하러 온 각지 수련생들을 우리 여기에 먼저 안착시켰다. 법공부와 교류를 한 후 한 무리 또 한 무리 수련생들이 셋방에서 출발해 베이징 국무원, 민원처리 사무실 등 곳곳에 가서 대법을 실증했다.

어느 날, 집 생각이 났고 어머니가 생각났다. 집을 떠나 베이징에 올 때 집에 편지 한 통을 썼는데 내가 베이징에 갔다 얼마 뒤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후에 아버지께서 들었는데 어머니는 내 편지를 받은 후 매일 울면서 물통으로 눈물을 받을 정도였다고 했다.

정마(情魔)에 교란 받은 그날, 또렷한 꿈을 하나 꾸었다. 꿈에서 재난이 닥쳤는데 사람마다 모두 안전한 곳으로 달아났고 나와 부모님, 그리고 남동생이 앞장서 달렸다. 가장 앞에서 달리다 뒤를 돌아보니 홍수가 터지고 화산이 폭발해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다. 갑자기 앞에 하늘로 향하는 사다리 하나가 나타나 나는 힘껏 기어 올라갔다. 뒤돌아보니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쳐다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는 사부님의 점화와 격려라는 것을 알고는 집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끊임없이 법공부를 하면서 며칠 뒤 정을 내려놓았다. 이후에 또 꿈을 하나 꾸었는데 한 여자가 가위로 서슴없이 내 긴 머리를 단번에 잘랐다. 이것은 얽히고설킨 정을 자르는 것으로 마땅히 가족정을 내려놓고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법을 실증하러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은 후 나는 각지 수련생과 함께 계속해 법공부를 했다. 어느 날 ‘전법륜’ 제6강을 배울 때 갑자기 베이징에 법을 실증하러 온 목적과 어떻게 법을 실증해야 하는지에 관한 법리를 보았다. 그때 사부님의 법신이 바로 내 곁에서 시시각각 가호해주신다는 것을 느꼈다.

이후에 집에 돌아온 후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금방 베이징에 갔을 때는 매일 울면서 거의 아무 것도 못하고 매일 나를 생각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생각하지 않게 됐는데 마치 딸이 없는 것 같았다고 한다.

2) 정정당당하게 법을 실증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다

많은 수련생들이 톈안먼 혹은 민원처리 사무실에 갔을 대 나도 마땅히 법을 실증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몇 명 수련생은 국무원 민원처리 사무실에 가서 대법을 실증하기로 결정했다. 떠나기 전, 속으로 반드시 민원처리 사무실에 들어가 내 마음속 말을 해 진정으로 법을 실증하는 목적을 이루겠다고 생각했다.

민원처리 사무실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입구에 있었는데 나와 같이 온 수련생과 다른 곳에서 온 수련생들이 있었다. 모두 신분증을 갖고 왔기에 순조롭게 사무실에 들어갔지만 들어간 후 다짜고짜 현지 경찰이 붙잡았다.

한 무리 사복 경찰은 나를 담모퉁이로 데려가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다. 내가 말하지 않자 이때 한 경찰이 “그녀는 하늘에서 왔어요”라고 말했다. 나 역시 “맞아요. 나는 하늘에서 왔어요”라고 말했다. 많은 사복경찰들이 나를 에워싸고 어느 성에서 왔는지 캐물었다. 그들은 모두 내가 그들 지역 사람일까 봐 걱정했다. 그들이 아무리 캐물어도 나는 답하지 않았고 민원처리 사무요원을 만나 내가 청원하러 온 목적, 파룬궁이 좋다는 것과 TV에서 날조한 거짓말을 알려준 후 내가 어디 사람인지 말하겠다고 했다. 이때 그들은 내 몸을 수색하기 시작했는데 심지어 신발 밑창까지 모두 뒤집어 보았지만 그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 이때서야 나는 그들이 각 성에서 온 사복 경찰로서 전문적으로 베이징에서 대법제자 방문을 가로막는 경찰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때 두려운 마음이 올라왔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갑자기 사부님의 경문 ‘대법 확고히 수련하며 마음 움직이지 않나니 층차를 제고함이 근본이로다 고험(考驗) 앞에 진성이 보이나니 공성원만하면 불도신(佛道神)이로다’[2]가 생각났다. 이 단락 경문을 외운 후 즉시 떨지 않았고 두렵지 않았다. 법을 실증하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면 절대로 내가 어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신념을 확고히 했다.

이후에 베이징주재 산둥사무소 경찰이 강제로 나를 그들 경찰차에 밀어 넣고는 나와 다른 한 산둥 수련생을 베이징주재 산둥사무소 호텔로 데리고 갔다. 그 날 나와 함께 민원처리 사무실에 간 수련생 가운데 산둥 수련생이 몇 명 있었기에 그들은 나를 그들 성 사람으로 여긴 것이다.

호텔에서 한 40여 세 경찰이 내 앞에 앉았다. 나보고 산둥 어디냐고 묻자 나는 산둥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들은 후 그는 화를 내면서 “산둥 사람이 아니면서 왜 여기에 왔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당신 부하한테 산둥 사람이 아니라고 얘기했어요. 그는 믿지 않으면서 기어이 나를 여기로 데리고 왔어요.” 이때 그는 “기왕 당신이 산둥 사람이 아니면 어디에서 왔는지 알려주세요. 당신을 풀어드릴게요.”, “당신을 믿지 못하겠네요. 만약 당신에게 알려주면 당신은 즉시 정문에 있는 경찰에게 전화해 나를 붙잡아가라고 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이때 그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에게는 남을 의심하는 마음이 있어요. 나는 그들의 상사이니 내가 한 말에 책임질 수 있어요. 오늘 당신이 어디 사람인지만 말하면 즉시 풀어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후 나는 즉시 안으로 찾아보았다. 나에게 의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사부님께서는 그의 입을 빌어 나를 점화해주신 것이다. 그의 손을 가리키며 “당신은 그들 상사죠? 한 말에 책임져야 하는데 만약 책임지지 못하면 이후 어떻게 일 처리를 하고 누가 당신 말을 듣겠어요?”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세요. 만약 당신이 산둥 사람이 아니라면 풀어줄 것입니다”라고 하자 나는 모모 성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즉시 가라고 했고 이렇게 나는 정정당당하게 나를 가두었던 호텔을 떠나 베이징 시외 거처로 돌아왔다.

베이징에 2달 반 있은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3. 큰 난 앞에서 확고부동하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후 직장이 발칵 뒤집혔고 나도 직장에서 유명해졌다. 예전에 나를 아는 직원이 얼마 없었지만 곧 회사에서 유명해졌다.

집에 돌아온 이튿날 회사에 출근하러 갔다. 오후, 외삼촌, 어머니와 남동생은 나와 함께 회사 상사를 만나러 갔다. 이때 우리 회사 서기, 노사(勞資) 처장, 보위처 처장과 우리 부서 주임, 그리고 다른 부서 주임 등 열 몇 명이 회의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회사 서기는 내 앞에서 책상을 두드리며 이래라 저래라 정치 수업을 해주었다. 반나절이나 실컷 현재 형세를 말했는데 내가 주위를 돌아보니 모두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이때 나는 “서기, 당신이 반나절 말했으니 내가 말해도 되나요?”라고 묻자 그는 나보고 말하라고 했다. 내가 각성하고 자신을 반성하는 말을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내가 붙잡히거나 갇힐 위험을 무릅쓰고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것은 사람들에게 파룬따파가 좋고 TV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으며 TV에서 대법을 중상했기에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서기는 화를 내며 책상을 힘껏 두드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감히 여기에서 이렇게 반동적인 말을 하다니! 담이 너무 크구나!” 이때 현장 주임과 노사 처장은 모두 얼굴을 붉히며 나갔고 외삼촌과 남동생도 얼굴을 붉히며 매우 두려워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마음 속 말을 했기에 마음이 편했고 전혀 두렵지 않았다.

이튿날 보위처에 출근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들은 내가 거기에서 ‘공부하고’ ‘자신을 반성한 후’ ‘보증서(파룬궁 수련을 포기하겠다는 보증서)’를 쓰라고 했지만 나는 협조하지 않았다.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법을 실증하는 자료를 썼다. 내용은 내가 연공한 후 심신, 관념의 변화와 파룬궁이 대체 무엇인가 등인데 이런 형식으로 진상을 알렸다. 쓴 후 서기에게 주었다. 며칠 뒤 원래 작업 현장으로 돌아왔지만 예전의 ‘약을 으깨는’ 팀에서 ‘포장팀’으로 이직됐다. 포장팀은 근무시간이 길고 월급이 적었는데 이는 회사의 경제적인 박해였다.

포장팀에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 보위처 처장은 늘 나를 찾아 얘기를 나누었고 현장 주임도 늘 내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나보고 대법 신앙을 포기하라고 했지만 나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나를 지키고 더 이상 베이징에 청원하러 못 가게 하기 위해 어머니는 외지에서 우리 시에 왔고 우리 회사 부근 아파트를 세 맡아 나와 함께 생활했다. 동시에 회사에서는 나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는데 그들은 우리 셋방 1층 밖에서 잠복근무하고 감시했다. 내가 또 베이징에 갈까 봐 두려워했고 나도 전례 없는 압력을 느꼈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어머니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어머니도 대법을 수호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약 누가 어머니보고 책을 달라고 하면 주지 마세요. 책은 내 것이고 돈을 지불하고 샀기에 그 누구도 책을 달라고 할 권리가 없어요.” 어머니는 “한 권 정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주자”라고 하자 나는 “안 됩니다. 한 권도 안 돼요. 저는 목숨을 걸고 베이징에 가 대법을 실증할 수 있고 일체를 걸고 대법을 수호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결과 그날 점심, 회사 단(團: 공청단) 지부 서기는 지부위원 한 명을 거느리고 우리 집에 와서 수색했다. 어머니는 그들에게 책이 없다고 하면서 호되게 경고했다. “당신들이 늘 우리 딸을 찾아 얘기를 나눈다고 하는데 만약 우리 딸이 또 베이징에 간다면 바로 당신들이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신들을 찾아가 딸을 내놓으라고 할 겁니다.” 단 지부 서기와 위원은 무안해하며 떠났다.

수련 전, 나는 회사 공산당 단 지부위원으로서 늘 회사의 크고 작은 행사를 조직하고 참여했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산당 단 지부서기는 나를 찾아와 연공을 선택할지 아니면 공청단에서 탈퇴할 것인지 물었다. 나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즉시 공청단에서 탈퇴하겠다는 성명을 썼다. ‘저는 파룬궁을 수련해 좋은 사람이 되려 하지만 회사에서 못하게 하기에 공청단에서 탈퇴합니다. 대법을 끝까지 확고히 수련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단 지부서기에게 주었다. 당시 내가 쓴 내용을 보고 그는 얼굴색이 다 변했는데 내가 이렇게 단호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비록 당시 ‘9평 공산당’이 아직 발표되지 않았고 ‘삼퇴’가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공청단 조직에서 탈퇴하겠다고 성명했다.

회사의 박해는 계속됐고 부서, 주임 등은 사흘이 멀다 하고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매번 모두 내가 말하고 그들이 들었는데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진상을 명백히 알게 됐고 나에게 탄복했다.

회사 단 지부 서기는 우리 집에 와서 책을 수색하려 했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공청단에서 탈퇴하는 것으로 협박하려 했지만 내가 수련을 포기하지 않자 회사 상사에게 나를 일러바쳤다. 어느 날 출근했을 때 보위처 처장은 또 나를 불렀다. 가보니 가장 처음 나를 찾았던 그 사람들인데 회사 서기, 보위 처장, 노사 처장 등이 있었다. 보위 처장은 나에게 “○○○, 아직도 연공하나요?”라고 묻자 나는 연공한다고 했다. “책이 있나요? 아직도 책을 보고 있나요?”라고 묻자 나는 본다고 했다. “책을 내놓으세요”라고 하자 나는 “배우고 싶나요? 그럼 한 권 드릴게요. 돈은 받지 않아요”라고 했다. 그는 “나는 배우고 싶지 않아요. 당신보고 책을 내놓으라고 할 뿐이에요”라고 했다. 나는 아주 확고하게 말했다. “그럼 칼을 가져와 내 마음을 빼내 가져가세요. 법은 내 마음 속에 있어요.” 그들은 모두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일이 있나요? 다른 일 없으면 일하러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위처를 떠났다.

그때 나는 젊은 아가씨여서 이렇게 여러 형식의 박해를 겪으면서 심리적 압력이 매우 컸다. 몇 명 수련생은 회사에서 이렇게 나를 박해하는 것을 보고 놀라 감히 연공하지 못했다. 어떤 동료는 나를 동정했고 어떤 사람은 사당(邪黨)의 거짓말을 믿고 나를 무시했다. 그때 열등감이 들었고 압력이 매우 컸다. 박해가 발생하기 전, 우리 작업 현장에서 열 몇 명이 대법을 수련했는데 그때 우리는 점심에 작업장에서 법공부하고 연공하면서 매우 즐거웠고 평화로웠다. 이번 박해를 거치면서 그들은 이 젊은 처녀가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두려움으로 연공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한동안 소침하다 갑자기 어느 날 법공부할 때 정념이 나왔다. 속으로 ‘나는 사부님의 제자이고 주불(主佛)의 제자로서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됐다는 것은 비할 바 없는 최고의 영광이다. 진상을 명백히 모르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것으로 그들은 미래를 잃게 되므로 그들이야말로 가련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자신이 정말 운이 좋고 너무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후부터 매일 기쁘게 출근했고 누구도 비할 바 없는 긍지를 느꼈다. 나에게 지고지존(至高至尊)의 사부님이 계시고 나 자신은 정법시기 대법제자이기 때문이다. 그 후부터 나에 대한 박해가 흐지부지 됐고 개인 생활, 심지어 여행 중에서도 사존의 가호를 느낄 수 있었다. 늘 거침없이 순조로웠다.

사부님께서는 ‘그러므로 대법제자를 놓고 말하면, 우리가 아무리 엄혹한 한 단락의 역사를 거쳤다 하더라도 슬퍼할 가치가 없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자신이 법을 위해서 온 생명이라는 것과 당신이 여기에 온 의의를 실천하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감스러워할 것이 없다. 대법제자를 기다리는 것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다. 가장 슬픈 것은 바로 그런 박해를 받은 세인과 구세력 그 자신이다. 그들의 끝장이야말로 진정으로 슬픈 것이다.’[3]

이러한 수련 경험은 공산당 박해 초 처음 몇 년간 발생한 것이다. 이 단락 역사를 돌이켜보면 매우 기쁘고 안심됐다. 나는 사부님과 대법에 먹칠하지 않았고 그 어떤 형식의 고난 속에서도 사악에게 타협하지 않았다. 당초의 확고함 때문에 사부님께서는 나를 위해 공간장을 청리해주셨고 크나큰 업력을 감당해주셨다. 그래서 이 10여 년 정법수련 가운데서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든, 진상자료를 배포하든, 현수막을 걸고 진상 스티커를 붙이든, ‘삼퇴(중국 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조직에서 탈퇴)’를 권하든 모두 무사했고 거의 교란 받은 적이 없었다.

사존의 자비로우신 고도(苦度)에 감사드리고 제자는 오로지 정진실수(精進實修)하고 수련초기의 상태와 강대한 정념을 유지해야만 자신의 서약을 실현할 수 있다.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하는 동시에 자신을 잘 닦아 원만해 사부님을 따라 돌아갈 것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수련자 금기’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진성이 보이노라’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4-2003년 워싱턴DC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6년 12월 4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진상을 알려 세인을 구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2/4/3380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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