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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의 장애를 타파하고 신사신법하다

글/ 안후이(安徽)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중등 전문학교 영어교사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문법을 깊이 연구하기를 즐기고 글자 파고들기를 즐겼다. 심지어 국어 선생님과 문법문제를 논쟁한 적도 있다. 나는 한평생 결점을 들추는 것을 좋아하고 동반자든, 학생이든, 사회나 가족, 다른 사람, 자신이든 지간에 결점을 많이 보았다. 틀린 것을 알고 고치면 진보가 있다고 인식했다.

몇 십 년 동안의 이 습관은 초기에 법공부 할 때 문법을 파고들고 글자를 파고들며 또 이것을 의심하고 저것을 의심하는 상태를 조성했다. 비록 이것이 사부님을 존중하지 않고 법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도 말이다. 나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법을 배우는 것은 많은 전문지식(후천관념)이 있고 더욱 많은 소위 과학사유 훈련으로 무턱대고 따르지 않는다. 늘 자기도 모르게 후천적인 소위 과학의 관념으로 대법을 가늠했고 나의 문법지식으로 사부님의 설법을 보았다. 때문에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믿음에 영향을 주었다.

문법에 대한 문제를 놓고 말하면 설령 속인의 언어 학습이론으로 말하더라도 어법 역시 일반대중에 의해 인정된 어법이며 그 주관성과 임의성이 있다. 단지 일단 약정을 하면 그것은 일정한 규칙이 있으며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여러 사람 모두 준수한다. 언어규칙의 이런 약정은 대중적인 습성으로 그것은 늘 언어를 사용하는 중 변화되고 개변된다. 특히 특수한 역사시기, 특수한 장소, 특수한 인물은 언어규칙의 속박을 벗어나며 따라서 언어규칙이 개변되고 언어학자가 인정하면 최종적으로 새로운 규칙이 된다.

역사적인 오늘, 사부님께서는 중문으로 우주대법을 전하시고 있다. 어떤 시기, 장소, 인물이 이것보다 더 특수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어떠한 특수한 것도 만 분의 일도 비교할 수 없다! ‘오늘’, ‘대법’, ‘창세주’ 오직 우리 대법 수련자만이 비로소 이해할 수 있고 그 중의 위대하고 심각함은 어떠한 단어로도 서술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 사실 언어규범 문제에 관해 사부님께서는 전문적으로 설법하셨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으로 보면, 속인의 언어규칙의 표현방식이 어떻게 사부님께서 우주대법을 전하시는 것을 제한할 수 있겠는가?

내가 법을 배우는 것에 영향준 것은 나의 낡아빠진 문법관념, 또 소위 과학, 상식 등 관념이 늘 법에서 말한 일부 현상과 사실에 의혹이 충만되게 하고 믿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내가 속인 서적을 보는 습관은 사고, 연상, 질의를 좋아하기에 초기 법공부를 할 때 늘 의문을 찾는 마음으로 법을 배웠다. 거의 매번 ‘전법륜(轉法輪)을 한 번 읽으면 나는 일부 새로운 의문을 발견하고 당연히 의문이 해결될 때도 있었다. 한 가지 의문이 해결될 때 나는 매우 기뻤고 그 무신론자가 자신의 무지를 조소하는 것처럼 최종적으로 틀린 것은 여전히 자신이었다.

사실 나는 초기 법을 배울 때 늘 이것을 의심하고 저것을 의심했고 속인의 ‘일체를 의심’하는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일체를 의심하는 것은 속인 중에서 특히 지식계에서는 옳은 것이며 심지어 필요한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사람의 사상, 지식과 과학은 모두 완벽하지 않으며 모두 끊임 없이 진보와 발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보와 발전을 하려면 반드시 일체를 의심하는 과학정신이 있어야만 이전의 최고경지 혹은 이전 성과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다. 신이 사람에게 준 것은 사람으로 말하면 가장 완벽하다. 사람은 더는 그것을 발전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신을 초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중의학 고전 ‘황제내경’은 바로 신이 중국인에게 전한 것이다. 후세에 얼마나 큰 의학자가 나타나도 중의의 기본 이론 ‘황제내경’을 초과한 적이 없다. ‘주역’, ‘팔괘’ 등 역시 모두 후세 사람들이 초월할 수 없다. 때문에 사람은 신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 된다.

나는 잠겨서 수련하기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연공 중 마땅히 나타나는 현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법에 대한 의혹을 조성했다. 이때 나는 생각했다. 수련을 하기 전, 병원에서도 치료하지 못하던 병이 어떻게 좋아졌는가? 이것은 과학이 해석할 수 없는 기적이 아닌가? 신의 기적이라 말해야 한다. 때문에 모든 의문과 불신은 모두 우리가 어려서부터 주입된 무신론 사상과 후천적으로 공부하고 생활 중에서 형성된 관념이 방해하는 것이다.

사상에 관념이 형성되면 그것은 뿌리 깊게 사람의 사상에 박혀있고 심지어 일종 잠재의식이 된다. 비록 나는 일찍이 무신론 사상을 버렸지만 무신론 관념은 늘 무의식중에, 부지불식간에 작용을 일으킨다. 이 무신론 관념을 제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예수가 법을 전할 때 그를 따르던 사도들은 직접 많은 기적을 경험했다. 그러나 위험과 곤란에 직면하자 그들의 첫 번째 반응은 도망가는 것이며 스승도 돌보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지식 없는 민중이 매일 예수를 따르던 사도보다 더욱 믿었다.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착오적인 관념의 교란이 적기에 더욱 쉽게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신(迷信)’, 미혹 중에서 여전히 확고히 믿는 것은 사실 일종 오성이다. 사람은 미혹 중에 있기에 눈으로 보아야 명백하다고 여기고 과학이 명백하게 자신을 이해하게 한다고 여기며 바로 그의 눈이 자신을 속이고 과학의 관념이 자신을 속인다는 것을 모른다. 사람은 신을 ‘미신’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내가 여러 해 동안 인식한 믿음과 의심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치는 중 얻은 결론이다. 나는 깊이 인식했다. 이 ‘미신’을 하려면 여러 해 동안 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 많은 후천관념이 있는 사람, 특히 소위 총명한 사람으로 말하면 매우 어렵다. 나는 늘 여러 사람이 아는 그 ‘금부처’ 이야기 중 기름 솥에 뛰어든 이야기가 생각나 늘 자신에게 묻는다. 만약 사부님께서 나에게 뛰어들라고 하면 나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들 수 있겠는가? ‘끓는 기름은 사람을 죽인다’의 관념은 나를 겁나게 하고 망설이게 할 수 있다. 그렇다. 끓는 기름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당신을 뛰어들라고 할 때 당신이 신사신법하고 생사를 내려놓으면 성불할 수 있다. 부처가 뜨거워 죽을 수 있겠는가? 아마 당신이 본 그 끓는 기름은 변화된 가상일 수 있으며 사부님께서 그것으로 당신의 ‘믿는 정도’를 고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대법제자는 모두 안다. 대법이 전해진 이후, 대법은 무수한 신의 기적을 나타냈다. 이런 것이 어찌 석가모니와 예수의 당시 보인 기적과 비길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매 대법자자의 몸에 거의 기적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야말로 모두 열려서 수련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개인의 인식이며 층차의 제한으로, 한계와 착오가 있는 것을 피하기 어렵기에 자비롭게 시정해주시기를 바란다.

문장발표: 2016년 11월 23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1/23/33712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