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베이(河北) 대법제자
[밍후이왕]
자비하신 사존,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제13회 대륙 대법제자 법회의 기회를 통해 자신이 수련의 길에서 어떻게 사부님에 대한, 대법에 대한 확고함에 의존해 하나하나의 관, 난을 돌파한 경험 및 약간의 체험을 사부님께 보고해 올리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합니다.
사당의 박해로 집과 가족을 다 잃다
나는 농촌 대법제자다. 우리 두 부부는 모두 99년 ‘7.20’ 전에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사당(邪黨)이 대법과 대법제자를 박해하기 시작해 우리 집은 박해로 집과 가족을 다 잃었다. 2009년에 이르러 꼬박 10년이 됐는데 상황은 다소 개변됐다.
남편은 예전에 세뇌반, 노동교양소, 감옥에 불법 감금당했고 또 여러 차례 향 정부, 악독한 경찰에 의해 불법 연금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 후 장시기 유랑생활을 했다. 나는 여러 차례 구치소, 세뇌반에 감금됐고 두 차례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는데, 나머지 시간은 역시 모두 바깥에서 떠돌며 유랑생활을 보냈다.
박해 시작부터 나의 두 아이(딸은 15세이고 아들은 9세였음)는 곧 주거가 일정치 않은 나날을 보내며 인간세상의 풍상고초를 겪을 대로 겪었다. 먼저 80여 세인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먹고 거주했다. 두 노인은 우리 두 부부가 붙잡히고 갇혔던 이유로 안절부절못하며 우리의 안위를 걱정하고 또 두 어린 아이를 걱정했다. 결국 지나친 슬픔으로 2001년부터 2004년 사이에 차례로 억울하게 사망했다. 두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다시 80여세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이 불법 감금당한 이유로 완전히 경제력을 잃게 되어 아이의 학비 대부분은 수련생과 친구, 친척의 도움에 의거했다. 아들은 고등학교 공부를 할 때 지출을 절약하기 위해 식당에서 일손을 도와 학생들에게 밥을 나눠주었다. 밥을 다 나눠준 후 무료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식사를 준비해준 후 자신이 밥 먹는 시간은 아주 제한이 있어 늘 배불리 먹지 못했는데 서둘러 교실로 달려가야 했다. 어떤 때는 미처 앞치마를 입지 못해 일할 때 밥과 반찬이 온 몸에 묻었다. 결국 일을 다 끝낸 후 지저분한 옷을 입은 채 수업하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딸은 대학 공부를 할 때, 생활비를 해결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가정교사를 했다. 일을 시작한 후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남동생을 뒷바라지해 공부시켰다.
박해를 부정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다
2009년, 남편은 4년 옥살이 재난을 끝냈다. 나는 그때 사당에 의해 불법 지명수배를 받아 유랑생활을 하고 있었다. 남편을 돌아오게 해 나와 함께 유랑생활을 하게 할지, 아니면 나와 남편이 함께 집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며 법공부, 연공, 세 가지 일을 할 지 앞뒤로 생각해보았지만 늦게까지 결정하지 못했다.
나는 법공부를 강화하고 사부님께서 정념을 가지해 주시도록 빌었다. ‘전법륜(轉法輪)’ 중에서 말씀하신 “벌레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목욕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또 모기가 있다고 해서 우리 모두 밖에 나가서 자리를 찾아 살 수도 없으며”[3]까지 읽었을 때, 나는 사악의 불법 지명수배 때문에 장시기 유랑생활을 해서는 안 되며, 또 사악의 교란, 감시를 피하기 위해 영원히 바깥에서 유랑해서는 안 됨을 깨달았다. 이 ‘벌레’, ‘모기’들에 대해 그것을 승인하지 않고 그것을 청리하며, 신사신법해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걸으며, 정정당당하게 집에서 생활하고 수련하고 대법을 실증해야 했다.
정념이 일자 문득 명백해지며 잡념이 전부 없어져 집으로 돌아가려고 결정했다. 수련생들은 나를 위해 걱정했다. 나는 수련생들의 관심을 이해했다. 하지만 나의 결정을 굳게 믿었다. 바로 사당의 민감일 ‘4.25’ 이날에 오랫동안 떠났던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 눈앞이 온통 황량했다. 온 정원의 잡초가 한 길이나 되었다.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는데 지붕 여러 곳에 하늘이 보였다. 어떤 구멍은 세숫대야만큼 컸다. 벽 위의 거미줄은 한 층 또 한 층 겹쳐졌고 땅위의 도처에는 모두 쥐구멍이 있었다. 생활용품, 농기구는 얼마 남지 않았다. 단지 쉽게 움직여 갈 수 없는 항아리와 궤 등만 남았을 뿐이다. 수도관은 일찍이 이미 단수됐고 지하 수도관마저 나무뿌리에 내리 눌려 헐었다. 이 정경에 직면해 나의 사람 마음은 한 차례 또 한 차례 올라왔다. 정말 중도에서 뒷걸음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이 일체에 직면해 앞으로 걸어 나가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걸어야 함을 깨달았다. 마음속으로 한 차례 또 한 차례 사부님을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들을 구도해주시기 위해 감당하신 것을 우리는 영원히 모두 상상할 방법이 없다. 내 앞의 요만한 곤란은 또 아무것도 아니다! 사부님께서 계시고 대법이 있다. 어떤 어려움도 가로막을 수 없다. 사부님께서 가지해주심에 의해 나는 눈앞의 어려움에 놀라 뒤로 물러서지 않고, 한편으로 견딜 수 없이 황량한 정원과 방안을 정리하고, 한편으로는 서둘러 세 가지 일을 했다.
사부님께서 가호해주셔서 가정환경이 호전되다
8월 7일에 남편이 돌아왔다. 몸은 허약했으나 정신상태는 매우 좋았다. 서둘러 법공부를 하고 연공을 해 그는 매우 빨리 건강을 회복했다. 우리도 서둘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가난하기 그지없는 현 상황에 직면해 구세력과 사당의 경제적인 박해를 부정하고, 비관하지 않고 의존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 경제 상황과 생활 조건을 개선해 대법의 아름다움을 실증해 세인이 대법제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개변했다.
99년 ‘7.20’ 전, 우리는 작은 매점을 경영했다. 위치가 좋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고, 한 번도 분량이 부족하게 주지 않았던 이유로 장사는 매우 잘 됐다. 나와 남편은 사당 박해를 당해 납치, 감금당한 후 매점은 친척이 넘겨받아 경영했는데 곧 10년이 된다. 이때 우리는 매점을 다시 가져오려고 결정했고 친척은 매점을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매점 장사는 여전히 흥성했다. 월수입은 수 천 위안에 달했는데 1년 만에 생활비를 빼고 또 아들이 빌린 학비를 다 갚고도 손에 또 4~5만 위안이 남았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자비하셔서 우리에게 경제 곤경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이익을 베어버리고 세 가지 일을 잘하다
이때 또 한 가지 새 문제가 나타났다. 우리는 온종일 장사에 끊임없이 바삐 보내 법공부 하는 시간이 적어지고 발정념도 적게 발했다. 법공부와 발정념을 할 때도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일도 했지만 늘 힘에 부쳤고 시간도 충분히 보증할 수 없게 되어 마음속으로 매우 괴로웠다.
어느 한 번, 나는 물통에 수돗물(농촌에서 시간을 정해 물을 공급해 주었음)을 받았다. 수도꼭지를 열었을 때 수압이 매우 부족해 수도관을 잠그고 다른 일을 하러 갔다가 잠시 후에 다시 와서 받으려 했다. 그리고 또 수도관을 열어 물을 받자 수압은 그래도 아주 약했다. 그런데 막 반통을 받았는데 갑자기 물이 나오지 않았다. 물이 없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괴로웠다. 먼저 물을 충분히 받고 다시 다른 일을 하러 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이 한 장면은 늘 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내 수련이 생각났다. 온종일 돈을 버느라 바삐 보내 세 가지 일을 할 시간이 없었다. 사존께서 극심하게 감당하심으로 연장해 온 시간은 대법제자가 사람을 구함에 주신 것인데, 나는 일 하는데 바삐 보내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대법제자가 해야 할 일과는 완전히 맞지 않다! 정법이 끝나는 그날이면 마치 그 수도관 안의 물이 뚝 멈추는 것처럼, 그때는 후회와 절망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장사가 잘되어 수입이 많음은 당연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만약 심각하게 세 가지 일에 영향을 주었다면 반드시 조절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구도해야 할 중생을 구하지 못하고 서명한 서약을 실행하지 못하는데 그럼 내가 그래도 정법시기 대법제자인가?
나는 깨달은 것을 남편과 교류하고 매점 장사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당시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일을 함에 극단으로 걸어서는 안 되며 속인들로 하여금 이해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며 마찬가지로 대법에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 준다고 인식했다. 나는 수련생들과 소통했는데 다수가 남편의 견해에 쏠렸다.
남편의 다른 인식에 직면하고 수련생의 각종 견해, 친척이 이해하지 못함에 직면해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돈 벌기는 좀 쉬웠으나 세 가지 일은 할 수 없었고 네 개 정각 전 세계 동시 발정념을 보증할 수 없었다. 수련생들은 모두 착실하게 수련하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돈을 버는데 바삐 보내다니? 나는 더는 자신의 수련을 느슨히 하면 안 됐다.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직장이나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당신을 나쁘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신이 꼭 정말로 나쁜 것은 아니며, 어떤 사람이 당신을 좋다고 해서 당신이 꼭 정말로 좋은 것도 아니다.”[3]가 떠올랐다. 오직 길을 바르게 걸으면 생활을 지탱할 수 없을 리가 없다. 더 잘 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오직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걷기만 하면 모두 가장 좋은 것이다.
각 방면의 저항에 직면해 나는 바른 일면이 나오면 반면의 일면도 나와야 함을 깨달았다. 나는 그것에 움직이지 않고 인내심 있게 남편과 교류했다. 결국 법에서 합의를 이루고 매점을 팔아 철저히 벗어나려고 결정했다.
판다고 했으면 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결정을 내렸는데 잠자리에서 일어난 후 곧 우리 매점의 큰 확성기(전 촌에서 모두 들을 수 있었음)로 방송해 사는 사람을 구하려고 타산했다. 바로 우리가 잠자리에서 아직 채 일어나지 못했을 때 어떤 고객이 문을 두드렸다. 원래는 오래 된 고객이고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농담하며 “언제인데 아직 문도 열지 않으세요? 장사하지 않으시려나요?”라고 말했다. 나는 “네,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정말이세요, 아니면 농담이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정말입니다. 이제 곧 방송하러 나가려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파는 가격을 물은 후 “아직 방송하지 마세요. 이 매점을 제가 갖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 곧 집으로 돌아가서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하고 즉시 결정을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얼마 안 있어 그녀는 돌아왔는데 매점을 그들이 사겠다고 말했다. 며칠이 되지 않아 곧 돈을 내고 쌍방은 수속을 밟았다. 처음에는 가격이 높아 팔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순조롭게 팔릴 줄은 생각지 못했다. 정말 묘했다.
우리에게 정진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사부님께서 배치해 주셨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매점을 2년 동안 스스로 경영했고 도로 점유로 우리에게 보상해 준 돈을 보태면 우리 손에는 20여 만 위안의 현금이 있었다. 2013년, 우리는 집을 개축하기 시작했는데 내장 인테리어까지 전후 6개월 만에 마음에 드는 새집에 들어갔다. 나머지 돈으로 남편은 새 승합차로 바꿨다. 그리고 농용 삼륜차를 사서 그의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아침저녁에 차를 몰고 학생을 마중하고 보냈는데 점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수입도 괜찮았다. 시간을 내서 서둘러 세 가지 일을 했다. 그리고 또 늘 차를 몰고 수련생들을 태우고 장터로 가거나 먼 마을로 가서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했다. 이것은 우리가 당시 구상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매점을 경영하지 않으면 반날만 하는 일을 찾으려 했는데 세 가지 일을 잘하는 시간을 보증하고, 월급도 반드시 가정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야 했다. 이것들을 모두 실현했다.
이 일체는 모두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3]
관념을 바꾸어 사악한 바람을 타파하다
2011년에 딸은 결혼하려 했다. 그녀 시댁에서는 우리에게 결혼 예물을 얼마나 요구하는지 물었다. 나와 남편은 모두 우리는 대법제자이기에 일언인행은 속인 눈에서 대법제자의 이미지를 대표해야 하며, 속인과 마찬가지로 툭 하면 십 몇 만 위안, 몇 십만 위안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인식했다. 우리는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지 딸을 파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심에 따라해야 했다. “세상 쇠락을 끊어 막노라”[4]
우리는 사돈집에 우리는 결혼 예물을 받지 않고 또 어떠한 조건도 제기하지 않겠다고 알려주었다. 이것은 세인으로 하여금 대법 수련생과 속인은 확실히 다름을 보여줬다.
2014년에 아들이 결혼했는데 며느리 쪽에서도 예물을 요구하지 않았고 또 무슨 아파트고 무슨 차 같은 것을 제기하지 않았다. 아들은 결혼할 때 일체 형식에서 모두 시대 조류에 휩쓸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아내를 맞이함에 모두 드럼, 트럼펫, 의장대를 준비했고, 사당의 독소를 선양하고 침투시켰다. 우리는 먼저 큰 음향 기계를 사서 아들이 결혼하는 날에 전문적으로 차 한 대를 사용해 끌게 하고 천국악단이 연주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등 웅장하고 듣기 좋은 음악과 노래를 방송했는데 소리는 하늘까지 울려 퍼졌다. 전반 과정에서 일은 순리롭고 매우 원만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 일체도 자비로운 사존의 가호를 떠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정념정행해 노동교양 박해를 부정하다
나는 예전에 두 차례나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은 적이 있다. 이곳에서 또 자신이 노동교양소의 박해를 부정하고 정념으로 걸어 나온 경험을 말하겠다.
노동교양소 안의 노역은 사람을 압박해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다. 매일 임무는 모두 저녁에 특근하고 심지어 밤을 새도 완수하지 못했다. 완수하지 못하면 잠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사부님의 대법이 생각났다. “어떤 환경이든지 사악의 요구, 명령과 지시에 협조하지 말라. 여러분이 모두 이렇게 한다면 환경은 이렇지 않을 것이다.”[1] 그리고 더는 이 억지 박해 중에서 박해를 승인하지 않음을 결정했다.
그래서 임무를 완수하여 잠을 자러 가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잠을 자러 갔다. 바오자(包夾: 수감자로 이뤄진 감시원)는, “당신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기에 잠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나를 힘껏 잡아끌었다. 그리고 경찰을 불러왔다. 그녀가 “당신은 임무를 완수했습니까?”라고 묻자 나는 “나에게는 임무가 없습니다. 나는 박해를 당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형기를 연장시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본래 나에 대해 한 일체는 모두 불법적입니다. 형기를 연장하든 않든 모두 박해입니다”라고 말했다.
나의 태도가 굳건 하자 경찰은 곧 떠났다. 이로부터 더는 나에게 ‘임무’에 대한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불법 노동교양을 당한 기간에 내가 엄격한 관리팀에 있지 않을 때, 일반 죄수팀에서는 두 명의 바오자가 24시간 동안 나를 감시했다. 한 팀에 16~17명이었는데 온종일 노역을 했다. 한번은 사람들이 서로 각자가 얼마 동안이면 나갈 수 있을지, 어느 날에 나갈지 묻기 시작했는데 어떤 사람은 내가 제일 늦게 나간다고 말했다. 나는 “저는 여러분의 견해와 다릅니다. 저는 여러분과 같지 않습니다. 어느 날 나갈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나갔는데 그녀들 모든 사람에 비해서도 더 일찍 나갔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의 정념(正念)은 위력이 있다”[1]
2003년, 나는 다른 한 수련생과 함께 사악한 사람에 의해 노동교양소로 보내져 2년 동안 감금당했다. 내가 현 구치소에 2개월 넘게 불법 감금됐던 이유로, 그 기간에 나는 사부님의 ‘2002년 미국필라델피아법회 설법’을 완전히 암기했다. 나는 전면적으로 구세력을 부정하는 일부 법리를 깨달았다. 노동교양소에서는 각종 형식으로 나를 ‘전향’시키려 했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곧 또 나를 스자좡(石家庄) 여자노동교양소로 납치해 ‘전향’시켰다.
그곳은 정말 극히 사악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어떠한 명령과 지시에 대해 승인하지 않고 그들이 무슨 사악한 수단을 사용해도 내가 신사신법하는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5일 후 곧 또 나를 납치해 돌아왔다. 내가 박해를 당해 심각한 질병 증상이 나타나자 노동교양소에서는 책임을 미루기 위해 내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달라며 치료를 받게 하겠다고 했다. 가족이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자 또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서 빨리 와서 나를 마중해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가족이 간 후 그들은 가족에게 쪽지를 주었는데 위에는 ‘5일 동안 휴가로 쉰다’는 등이 적혀있었다. 이렇게 나는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셋째 날이 되어서 시내 안 수련생은 나에게 빨리 피해 다섯 번째 날에 노동교양소로 끌려감을 피하라고 했다. 친척도 나를 위해 걱정했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사악의 본질을 똑똑히 알고 내심으로부터 그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들의 관할에 속하지 않으며 그것은 자격이 부족하다. 나는 사부님께서 관할하신다. 관건적인 시간에 내 머릿속에 생각한 것은 사부님과 대법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제자가 정념이 족하면 사부는 회천력(回天力)이 있노라”[2] 나는 어느 곳도 가지 않고 친척집에 있었다. 게다가 노동교양소의 그 쪽지를 박박 찢었다. 노동교양소에서는 한 번도 전화를 건 적이 없고 사람도 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2년 동안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았으나 8개월이 되지 않아 마굴에서 걸어나왔다. 전부 사부님의 대법에 의거했는데 주로는 당시 자신이 암기할 수 있는 미국 필라델피아법회 설법을 지도로 삼아 나로 하여금 정념으로 마굴을 벗어나게 했던 것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대법제자의 정념(正念)은 위력이 있다’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 ‘홍음2-사도은(師徒恩)’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轉法輪)’
[4]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사: ‘홍음2-널리 비추다(普照)’
(밍후이왕 제13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 교류회)
문장발표: 2016년 11월 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제13회 밍후이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1/6/33715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