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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법제자는 왜 안으로 찾을 수 없는가 (2)

[밍후이왕] (전 편에 이어)

4. 안으로 찾는 것은 입으로 말해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착실한 수련 중에서 구체적인 모순을 만났을 때 안으로 찾자고 생각하고 자신을 들여다보려면 늘 밖으로 다른 사람을 보고, 일을 구체적으로 보고, 속인 사회의 각종 표현을 보고, 모순 중의 다른 사람을 본다. 다시 말하면 그는 나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안으로 봐도 사상 속에서는 한 가닥 힘이 밖으로 보게 이끈다. (자세히 관찰해야 이런 느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몇 번 경험한 후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에게 물었다. 사상 깊은 곳에서 밖으로 보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떤 물질인가? 나의 정념과 정반대로 하고 있으니 이것은 내가 아니다. 더 깊은 곳을 찾아보니 나는 발견했다. 사실 ‘밖으로 보는 것’은 삼계 내의 강한 관념이고 실질적인 물질이기 때문에 당연히 안으로 보지 못하게 한다.

이런 관념은 몇십 년, 혹은 몇백 년, 몇 만 년에 형성됐다. 이 점을 인식하고 나는 강대한 정념으로 그것을 바꾸려 했다. 처음엔 아주 힘들어 속으로 말했다. “안으로 보자, 안으로 보자.” 반나절 말했지만 ‘밖으로 보는’ 관념은 나를 통제해 밖으로 보게 하고 안으로 보지 못한다. 마음속에 숨어있는 집착심을 찾는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반드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정념을 강화했고 ‘밖으로 보는’ 관념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시간은 대략 일주일 걸렸다. 마침내 ‘밖으로 보는’ 관념을 바꿨다. 내가 다시 ‘안으로 보는 것’을생각할 때 자연히 눈은 즉시 안으로 보게 됐다. 그가 안으로 보게 되고 나의 행동을 보게 하고 나의 말을 들었다.

입으로만 ‘안으로 본다’는 사람들은 사실 실제 수련에서 자주 밖으로 남을 보는데 안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은 원인이 있다.

‘안으로 보는 것’은 그리 간단한 말이 아니고 간단히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 진정으로 안으로 찾고 자신의 마음을 본다

밖으로 보는 관념을 바꾼 후 진정으로 안으로 집착심을 찾았다. 집착심은 둔한 것도 있고 교활한 것도 있다. 둔한 것은 명백히 볼 수 있고 세심히 깊이 찾을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원망심, 쟁투심, 두려운 마음, 나오면 모두 볼 수 있다. 교할한 집착심은 좀 신경을 써야 한다. 그들은 깊이 숨어 있고 다른 집착심으로 위장하고 엄중한 집착심은 다른 집착심을 통제해 대법제자를 교란하고 자신은 배후에 숨어 있다.

때로 가장 표면적인 집착심을 찾고 이어 또 찾으면 집착심 아래 또 집착심이 있고 또 찾으면 집착심 아래 또 집착심이 있다. 바로 집착심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모순에서 두 사람이 쟁론하는 것은 쟁투심이 작용한다. 계속 찾아 내려가면 질투심이 교란하고 있고 또 찾으면 질투심 배후에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통제하고 있다. 이익 배후에 또 어떤 것이 있는가? 끊임없이 찾아 내려가면 자신 공간장의 더욱 미세한 그들을 찾을 수 있다.

어떤 집착심은 안으로 찾을 줄 알고 있다.(집착심은 생명이 있는 물질이다.) 그 집착심은 당신을 괴롭히고 마음속에서 배척하며 안으로 찾는 정념을 포기하게 한다. 심지어 ‘안으로 찾다’라는 글자도 듣기 싫게 한다. 어쨌든 당신이 그것을 찾지 못하게 한다. 다른 관념이 당신의 사상을 교란하고 주의식을 분산시키고 속여 다른 일을 하게 만든다. 어쨌든 당신이 그것을 찾지 못하게 한다. 이때 자신(주의식)은 안으로 찾는 마음을 견정히 해야 하고 집착심을 제거하려는 의지가 강해야 하고 정념이 강해야 한다. 때로 모순이 나타나면 나의 제1일념은 ‘안으로 찾는다’라고 생각하고 눈은 즉시 자신의 마음을 지켜본다.

어떤 집착심은 약해서 일념이면 청리할 수 있다. 어떤 집착심은 강해 하루 종일 청리해도 제거하지 못한 느낌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수련생은 한동안 제거하지 못한 집착심, 혹은 중시하지 못한 것은 관여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집착심을 놓쳐버린 것과 같다. 교란한 후 당신의 미시적인 공간으로 다시 숨어 들어간다. 그 후 미시적인 층차의 중생을 박해한다. 다음에 다시 뛰쳐나와 정법을 교란하고, 대법제자를 박해하고, 집착심을 통제해 대법제자에 부합되지 않는 행동을 하게 하고 대법 요구와 사상에 부합되지 않는 관념을 생성한다. 구세력은 또 이것을 구실로 삼아 박해한다.

평소 법으로 자신의 일사일념, 일언일행을 가늠하고 법에 부합되지 않는 점이 있으면 참을성 있게 찾아야 한다. 어떤 사상, 집착심이 이런 행위를 초래했는가, 머릿속에 나타난 일념은 어디에서 왔는가? 근원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깊이 찾으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착실한 수련 기초가 있어야 머릿속의 그런 관념을 붙잡을 수 있다. 그들은 특히 빨리 숨는데 너무 빨라 그 염두는 자신이 생각한 것 같고 당신이 사고 후 얻은 결론이라 생각한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의 행위는 사상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다.”[1]

어느 날 퇴근 후 사무실에 나 밖에 없었다. 나는 가방을 정리하고 사무실 입구까지 갔는데 일념이 나왔다. 모 동료 책상에 가보자! 나는 동료 책상으로 가려고 이미 반걸음 내디뎠다. 주의식이 청성해져 나는 즉시 발을 거두는 동시에 이 사상의 내원을 안으로 찾았다. 주의식은 동료 사무실 책상을 가보려는 생각이 없었는데 이 일념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일념은 밖에서 온 것이다. 나의 어떤 사상이 산생한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한 후 온몸은 식은땀이 났다. 만약 사상의 내원을 분간하지 못하면 오래된 어떤 사상은 얼마든지 나를 통제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각종 관념, 집착심, 외래 생명을 포함하고 구세력도 포함한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한 속인의 대뇌가 통제당하기란 그야말로 쉬운 일이다.”[2]

수련인이 법으로 자신의 ‘일사일념’을 가늠하지 못하고 정념이 부족하다. 많은 행위가 진정한 자신(주의식)이 사고 후 해낸 것인가? 법에 따라 했는가? 아니면 구세력의 생각과 요구에 따라 했는가?

“너무 두렵다!”

얼마나 많은 대법제자가 시시각각 진정으로 자신의 사상과 행위를 지배할 수 있는가?

때로 모순 앞에서 집착심은 강하게 자신을 통제하는데 자신은 집착심에 얼마나 교란받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과 집착심의 관계를 분간하지 못한다. 이때 나는 자신의 모순에서 욕망에서, 관념에서, 집착심에서 뛰쳐나와 자신을 방관자로 생각한다. 자신이 뛰쳐나온 그 순간 주의식은 즉시 청성해지고 침착하게 대면할 수 있다. 각종 방법을 다해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이 방법은 아주 좋다. 일단 진정한 자신(주의식)과 후천적 형성된 관념, 집착심을 분간할 때 그들은 숨을 곳이 없고 나(주의식)를 속일 수 없고 즉시 나의 정념으로 청리된다.

6. 법으로 가늠하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국내외 대법제자들의 수련은 다르다. 사실 당신이 중국이든 중국 외든 어디에 있든지 대법제자의 수련은 개개인이 모두 다른 것이다. 나는 본보기가 없고 참조가 없으며 다만 참고할 수 있을 뿐이며, 남이 정념의 작용 하에서 한 그러한 일을 볼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그가 어떻게 하면 당신도 따라 그렇게 하거나, 그가 무엇을 하면 당신도 그것을 그대로 가져다 따라 한다면, 당신은 잘못한 것이다. 개개인이 모두 자신의 길을 걷고 있으며, 개개인이 모두 자신이 장래에 대법 중에서 인식할 법을 바르게 깨닫고 있다.”[3]

착실한 수련에서 자기 생각이 발견됐다. 어떤 생각인가? 표면에서 잘 한 수련생을 보면 따라 배우려 하고 그의 방법을 따라 하려 하고 그의 인식과 행위로 자신을 지도하려 한다. 기타 수련생도 이런 유사한 표현이 있는 것을 보았다. 예를 들면 그녀는 말했다.

1) 이런 일은 이렇게 한다. 심득교류에 잘 쓴 수련생의 문장을 보면 그렇게 했다.

2) 어떤 사람은 잘 수련했기에 그 방법을 마땅히 따라 배워야 한다.

3) 천목이 열린 수련생은 보았다. 그것은 진상이고 거짓이 아니기에 우리는 따라 하면 된다.

……

사실, 정념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면 나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일언일행을 포함해 모든 것은 법으로 가늠해야 하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다. 왜 마음속으로 이런 염두가 나오는가? 이 염두는 나에게 영향을 주고 나를 통제해 다른 사람을 따라 배우게 하는가? 나는 자문했다. “이 염두는 왜 법의 요구와 다른가? 내원은 어딘가? 그것을 찾아야 한다!” 찾는 과정은 여전히 쉽지 않다. 자신의 행위와 표현에서 찾을 수 없다. 나는 각도를 바꿔 사고했다. 속인은 상대방을 따라 하기 좋아한다. 다른 사람이 잘 입었으면 나도 따라 입고, 어떤 학생의 공부 방법이 좋으면 전체 학생이 모두 따라 배우게 추진한다. 이렇게 따라 하고 배우는 것은 속인으로 말하면 이미 자연스러운 일로 변했고 관념으로 형성됐다.

수련인이 이런 관념을 발견해 제거하지 못하면 수련 중에 끌고 들어온다. 대법제자의 상황, 장소, 개개인 수련상태가 다름을 고려하지 않고 속인처럼 따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수련 중이고 속인 중에 있지 않은 것을 잊어버렸다.

속인은 모두 한 층차에 있고 서로 배우고 어쨌든 그 층차에서 배울 뿐이다. 하지만 대법제자는 모두 다른 층차와 상태에서 수련하고 있다. 당신은 이 대법제자의 진정한 층차와 수련 상태를 볼 수 없다. 무엇을 배우는가? 배우는 것은 단지 속인의 상태의 ‘표현’을 배울 뿐이다. 그중에서 어떤 사람 마음, 어떤 정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가 어떤 층차의 법리를 깨달아서 그런 ‘표현’을 했는지도 모른다.

대법제자는 법으로 자신의 언행을 지도해야 하고 당신이 본 것 들은 것 당신이 느낀 모든 것을 법으로 가늠해야 한다.

(계속)

주:

[1]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법에 용해 되다‘

[2]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3]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경문: ‘2012년 미국수도국제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6년 10월 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0/9/33608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