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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느슨해지는 ‘이유’를 찾게 하지 말자

글/ 미국대법제자

[밍후이왕] 근 20년간 수련하면서 수련생이 사망하는 경우를 보고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좀 두려웠고, 다른 수련생을 고험한다는 것을 알고는 좀 마비되어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했고, 자신만 교란 받지 않으려고 했다. 최초 수련생의 사망 소식은 교류문장에서 보았다. 노년 수련생의 남편이 술을 마시고 흡연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해 사부님께서 거듭 기회를 주셨지만,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다시 잘못을 저지르면 죽어도 원한이 없다.” 후에 정말로 또 잘못을 저질러 사망했는데 빈소 사진에서 후회하는 눈물을 흘렸다. 이 교류문장은 줄곧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채 기억하고 있었다.

2년간 엄마(수련생)는 줄곧 병업 상태에 처해 있다가 지난 주 금요일에 사망했다. 나는 다시 그 문장이 생각났다. 사부님께서 여러 번 기회를 준 법리가 생각났는데 비록 엄마 곁에는 없지만 2년간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 사부님께서는 자비롭게 여러 차례 기회를 주셨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마다, 보기에 정진하지 않는 수련생도 여태껏 포기한 적이 없으시다.

엄마는 1997년부터 나로 인해 수련했는데 비록 정진하지는 않았지만 줄곧 수련했다. 박해 발생 후 6번 납치당했고, 열 몇 번은 가산을 몰수당했으며 강제로 TV에도 나왔다. 곤두박질하면서 줄곧 진상을 알리는 일을 했는데 경찰서에서 여권을 만들어 주지 않아 미국으로 올 수도 없었다.

2년 전만 해도 엄마는 신체가 좋았다. 겨울에 엄마가 큰오빠를 보러 갔을 대 오빠 회사에서 무료로 건강 검진을 해주고 있었다. 엄마는 오빠의 말을 못 이기고 신체가 좋아져 검사해도 별 상관없다고 여겼는데 뜻밖에 신장 암이 발견됐다. 엄마는 수련 전 신장결석, 위장병, 산부인과 병이 있었지만 수련한지 3개월 후 완쾌됐다. 이번에 큰오빠는 온 가족을 모두 동원했고 의사도 신장을 절개하라고 했고, 두 오빠도 암이 확산되기 전에 엄마에게 수술을 권했다. 나는 속으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고 있었는데, 다그쳐 엄마와 교류하여 가상이라고 말했고 아무 고통도 없는데 수술을 왜 해야 하느냐, 속인의 이치에도 부합되지 않으니 집에 돌아가서 연공을 많이 하라고 했다. 엄마도 받아들이고 약속했는데 오빠들은 나에게 엄마의 수술을 막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은 엄마의 의견에 따라야 하고 엄마도 어린애가 아니라고 했는데, 결국 불행하게도 엄마는 수술을 선택했다. 이것은 첫 번째 파동으로 수련인이 빗나간 제 일보이다. 수술 후 빠르게 회복하자 병원의 내 친구가 아주 놀라워했고, 나에게도 집에 돌아가 엄마와 연공을 많이 하라고 했다.

엄마가 집에 돌아오자 나는 사부님께서 기회를 주셨으니 기연을 소중히 여기고 법공부와 연공을 많이 하라고 했다. 엄마는 이전에는 5장 공법을 매일 하지 못했고 법공부도 주로 듣기만 했는데 이때부터 법공부와 연공을 하기 시작했다. 신체는 신속히 회복됐고 신체는 이전과 같았다. 봄에 작은 오빠가 엄마를 보러 왔을 때 현지 병원에 가서 검사하자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가지 말라고 했지만 또 갔는데 다행히 모든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또 다시 법에서 한걸음 더 빗나갔다.

그 사이에 나는 매주 전화를 걸어 문안 인사를 하고 교류를 했다. 작년 가을에 큰오빠가 추석을 같이 보내자고 했고, 셋째 오빠는 다른 성에 있지만 엄마를 모시고 다른 성에 가자고 했다. 엄마에게 가기 싫다면서 가지 말라고 하고, 집에서 조용히 수련하고 진상을 알리는 일을 하라고 했고, 나가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엄마도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불행한 것은 내려놓지 못한 정에 이끌려 엄마는 또 갔고, 다른 성의 셋째 오빠한데도 갔다. 엄마는 돌아온 후 좀 불편해지자 안으로 찾지도 않고 연공도 많이 하지 않고 홀로 현지 병원에 찾아갔다. 그렇게 병원에 걸어서 들어갔지만 걸어서 나오지는 못했다. 그 사이에 수련생이 엄마를 보러 갔고 집에 돌아가 잘 수련하라고 했으나 엄마는 작은 오빠의 배치를 선택하고 병원에 치료하러 갔는데, 이것은 세 번째 파동이다.

그리하여 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치료할 수 없고 암이 확산돼 몇 주 밖에 살수 없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집에 돌아가기를 희망했지만 작은 오빠는 병원에 있는 것이 좋다고 했다. 수련생도 엄마와 몇 번 교류를 했다. 사부님께서 거듭 기회를 주시는 것을 나는 보았기에 아주 평온하고 똑똑히 집에 돌아가야만 한 가닥 희망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엄마에게 속인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마지막 기회였다. 관건적인 시기 셋째 오빠가 엄마를 병원에서 데려온다고 해서 지지한다고 했다.

엄마는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어 집으로 돌아왔고, 몇 주가 지나니 하루하루 좋아졌다. 엄마에게 견정하게 수련하라고 거듭 알렸고 병원에 가면 더는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엄마는 알았다고 했지만 이 과정에서 엄마는 끝내 깨닫지 못했다. 오래도록 걷지 못하니 엄마는 원망심이 생겼고 심지어 대법을 원망했다. 나는 끊임없이 엄마와 교류를 했고, 엄마도 속마음을 털어놓고 법리도 알고 있지만,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자신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수련 중 우연한 일은 없다. 나는 많은 법리도 더욱 명확하게 됐고 진일보 엄마와 교류를 했다. 수련 전 엄마는 10번 유산을 했다. 비록 그때 살생을 잘 모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살생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이렇게 큰 죄는 몇 생에도 갚지 못한다. 만약 법에 어긋나지 않았다면 사부님께서 한 단계씩 소업을 배치하실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많이 빗나갔다. 이런 업은 갚지 않으면 안 되는데, 엄마도 시간이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다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교도소에서 몇 년 동안 갇혀있었던 수련생은 어떻게 견정하게 걸어왔는지 말했다. 엄마는 교도소에 있어도 지금처럼 안하면 된다고 했다. 수련의 기연은 선택이 없다. 엄마가 붙잡혔을 때 회개서를 쓰지 말라고 권했고 한편으로 본인도 알고는 있었지만 쓰지 않으면 박해당한다고 했다. 지금 엄마는 기본적인 수련의 표준도 도달하지 못했다. 후에 더욱 고통스러워졌고 심지어 자살할 생각마저 했는데, 엄마에게 자살도 죄라고 했더니 받아들였다. 대략 2개월 전 엄마는 대소변 실금으로 다시 병원에 가려 했다. 엄마에게 가지 말라고 권했는데도 엄마는 갔는데, 완치할 수 없다고 해서 오전에 갔다가 오후에 돌아왔다. 엄마는 집에 돌아온 뒤 실망했는데, 그리하여 대법에서 점점 멀어져갔고 상황은 갈수록 악화됐다.

지난 주 금요일 영상으로 엄마를 마지막으로 보면서 수련인 임을 잊지 말라고 했다. 엄마는 눈물을 흘렸고 1시간 후 사망했다. 이것은 엄마가 병업 상태가 나타난 후 사망하기까지의 전체 과정이다. 나는 그동안 사부님께서 엄마에게 거듭 자비하심에 감동했다. 동시에 우둔한 내가 사부님의 자비를 목격하게 했는데 한번 또 한 번 엄마에게 기회를 주셨다.

나는 엄마가 떠난 후 모든 것은 인연에 따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인의 정에 빠져 통곡했다. 심지어 친구를 통해 송별식에 참가하려 했다. 우리 집은 작은 도시에 있고 장례식도 성대하게 할 것이다. 어려서 누군가의 집에 장례식이 있으면 보러 갔다. 그러므로 장례식의 절차는 익숙했는데, 자녀가 언제 울고 누가 어떻게 운다고 하는 게 우리 화제였다. 이때 딸은 가장 중요한데 엄마의 네 명의 자녀들 중에 나만 딸이다. 정상적이라면 내가 가서 울어야 하지만 내가 갈 수 없어 유감이었다. 어려서 내가 효녀라면 어떻게 울어야 할지 생각한 적이 있다. 나는 엄마의 수양딸에게 가보라고 권하려 했고, 최초 딸이 우는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는 이런 일은 아주 중요했는데, 줄곧 이런 속인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수련생과 광고 고객을 만나려고 약속했는데, 고객을 만날 때는 참을 수 있었지만 고객을 만나면서 줄곧 엄마 일만 생각했다. 처음으로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는데 오후 6시에 마지막 고객을 만난 후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가 어떻게 가족과 장례식을 치러야 할지 의논하려 했다.

나의 승용차가 도로 옆 숲속에서 180도 회전하다

고속도로에서 우리 집과는 아직 출구가 두 개 남았는데 갑자기 모래바람이 휘몰아치고 황색 물건이 둘러쌌다. 비로소 자신이 사고가 났음을 의식했다. 즉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다파는 좋다), 사부님 도와주세요.”라고 외쳤다. 1,2초 후 현실로 돌아왔다. 차는 이미 도로 옆 숲속에 있고 180도 회전해 가로수에 가로막혀 나는 급정거를 했다. 이때 도로가에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고 손가락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보호해 주신 것을 알았다. 깨어난 후 속인의 정에 이끌려 마의 틈을 타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즉시 한나절의 정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사부님의 보호 아래 신기한 체험을 했다. 예전에는 단지 수련생의 교류를 보고 믿었지만 직접 경험한 적은 없었다. 차는 가로 막혔고 어떤 사람이 나를 도와주어 길옆으로 나왔다. 나는 어떤 차와 부딪쳤는지도 몰랐는데, 내 차를 들이박은 사람은 17세 소년이었다. 멈춘 4대의 차량은 나를 걱정해서 멈춘 것으로 모두 나에게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내가 괜찮다고 했지만 그들은 끝내 구급차를 불렀다.

그들은 나에게 방금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려 주었다. 모든 것은 아주 빠르게 일어났고 사고를 낸 남자 아이는 무척 빨리 달렸다고 한다. 내 차를 부딪치고서도 50미터나 더 가서야 멈췄다고 했고, 모두들 내가 중상을 입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견인차가 차를 가져간 1시간 후 내가 괜찮은 것을 보고 나를 위해 기뻐하며 오늘 천사가 보호해 줬다고 한다. 나는 그들에게 괜찮다고 말하고는 사고 난 후에서야 좀 두려워졌다고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는 차에 들어가 파룬궁 전단지를 가져와 사고를 낸 남자애와 그의 친구에게 주었다. 그들에게 사부님이 나를 보호해 줬고 내가 수련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 병원에 가야했을 거라도 말했다. 길에서 2시간 있다가 사고 현장에서 떠났는데, 경찰은 대형 사고라며 내가 괜찮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오늘 발생한 일을 조용히 생각해야 한다고 여겼다. 엄마에게 나는 최선을 다했고, 엄마는 속인처럼 그렇게 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속인의 정을 내려놓지 못했고, 이것은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으며, 나의 육친의 정을 방임했다. 갑자기 100미터 달리기가 생각났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학교에서 100미터 우승자라고 자주 말했는데, 100미터를 달릴 때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느슨하면 안 된다. 사부님께서는 최근 우리에게 거듭 빨리 달리라고 하신다. 하지만 나는 아직 속인의 정에 빠져있고 자신에게 작은 휴가를 주고 싶어 했는데 엄마의 사례는 아주 명확하다. 한 치 물러서면 한자를 물러서는 것과 같은바, 후진하면 사부님께서 도와주려 해도 도울 수 없다.

여기까지 깨닫자 속으로 문득 놀랐다. 처음으로 자신의 오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고 정법의 요구에서 멀리 떨어졌음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알고 있는데 수련의 길에서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하는 외에 그 어떤 이유로 느슨해지면 안 된다. 사부님께서는 이미 자비롭게 모든 것을 보여주셨다. 나는 반드시 자신의 수련을 바로 잡고 수련의 길에서 정진하고 더 정진해야 한다.

수련생들은 우리 엄마와 나의 경험을 거울로 삼아 진정으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정말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수련의 길에서 자신에게 느슨해지는 이유를 찾게 해선 안 된다.

문장발표: 2016년 9월 2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9/25/3354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