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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오 상태에서 수련한 약간의 깨달음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밍후이왕에 발표된 사부님의 신(新)경문 ‘푸왠선(副元神) 관련 문장이 일으킨 파동에 관해’ 를 읽었을 때, 나는 사부님께서 신경문 한 곳에 ‘수련생’이란 단어를 쓴 것에 주의를 가지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수련생은 어느 한 점의 정황을 보았는데, 그것 역시 대법제자가 자비로 중생을 구하는 표현이며, 또한 당신들이 중생을 구하는 중에서, 중생 각자가 혼란한 상황 중에서 정부(正負)의 상태를 표현한 것일 뿐이다.”[1]

이튿날 나는 또 몇 편의 신경문을 읽었는데 사존께서는 재차 ‘수련생’이란 글자를 나에게 점화해 주셔 일순간 나는 이 글자에 진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생각했다. 사존께서는 나의 부족함을 아시고 자비로 나를 점화해 주셨다. 수련생과 제자는 차이가 있는 것이므로 나는 자신의 부족을 찾아야 한다.

나는 점오 상태에서 수련하므로 열려서 수련하는 수련생의 결점을 나도 안다. 자신이 본 것을 기준으로 하기 쉽고, 자아를 견지하기 쉽고, 다른 수련생과 대립을 형성하기 쉽다. 수련생이 천목이 열린 수련생을 찾아 교류할 때, 그는 알 수 있으므로 자신을 견지하고 자신을 보호하며, 상처를 받으려 하지 않고 상해를 입으려 하지 않으므로 그는 수련생을 피한다.

모두 사람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천목이 닫힌 수련생은 생각한다. 당신 본 것은 맞지 않는다, 자심생마이고, 딴전을 부리는 것이며, 다른 수련생을 비뚤게 이끄는 것이고, 당신 이것은 법을 파괴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천목이 열린 수련생을 불량배이고 ‘마’라고 까지 말한다. 하는 말이 너무 심하여 열려서 수련하는 수련생은 견딜 수 없다, 엄청 큰 상해(傷害)를 받아 자신을 자신 속에 가두기 쉽고 심지어 정진하지 못한다. 황폐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낭비하면서 사부님과의 서약을 지키지도 않는다.

천목이 열린 수련생으로서, 당신이 지금 걸어가는 길은 당신에게 그러한 사전 큰 소원이 있기에 일정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다른 수련생과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고 자신이 깨달은 이치에 집착하며, 자신이 본 것에만 집착하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에게 집착하고 자신을 가두기 시작한다.

또 천목이 열린 어떤 수련생은 스스로 원만했다고 여기면서 대법책도 보지 않고 연공도 하지 않으며 사람도 구하지 않으면서 원만을 기다린다. 수련생이 하는 말도 귀담아듣지 않고 거만하게 안하무인 하면서, 마치 자신은 무엇이나 다 아는 척하는데 말하는 표정마저도 모두 남을 무시하는 느낌을 준다.

사존께서는 ‘수련생’이라는 단어로 나를 점화하셨다. 천목이 열린 수련생, 만약 정법 가운데서 자신의 이치에 집착하고 자신의 능력에 집착하면서 자신이 본 고만한 천기를 절대적인 진리로 여긴다면 진정으로 법을 스승으로 모실 수 없으며, 자신을 내려놓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낡은 우주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 당신이 대법 속에서 몇 년을 수련했든 당신은 대법제자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아직도 수련생일 뿐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착실하게 안으로 찾지 않았고, 자신을 수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련인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당신이 보든 보지 못하든 수많은 복잡한 요소가 우리를 교란한다. 설령 본다 해도 수련 중에서일 뿐이다. 왜냐하면, 대법의 어느 한 층차의 이치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선천적인 본능이 나타났을 뿐이다. 올 때 우리는 모두 알았고, 돌아갈 때 어렴풋이 다만 조금을 보았을 뿐인데 우리에게 또 무슨 자랑과 긍지를 느낄만한 것이 있는가? 또 무슨 고수할 만한 것이 있는가?

다른 공간은 지극히 복잡하고 각종 생명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설령 우리가 보았다 해도 본 것은 단지 일부분일 뿐인데 하물며 아직도 그렇게 많은 교란이 있고, 구세력이 기이하게 변화시킨 교란 요소도 존재하는데 그들도 사존의 형상을 연화해 대법제자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존께서는 설법에서 여러 번 우리에게 ‘법을 스승으로 모시라’고 일깨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보았든, 무엇을 들었든 모두 법으로 가늠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것은 절대적이 아니므로 집착심이 아주 강하다면 본 것과 들은 것은 모두 마음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수련생이 열려서 수련하는 수련생에게 반대 의견을 이야기할 때, 그는 꼭 당신을 반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므로, 당신은 같지 않은 목소리가 나타나는 것을 허용해야 하고, 법으로 가늠해야 한다, 당시 당신은 아마 집착으로부터, 감정으로부터, 체면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것이지만 지나간 후에는 반드시 자신을 잘 대조해 봐야지 도량이 협소하고 시야가 좁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신이 한 말은 옳지 않으며 나를 상해했으니 나는 당신을 상대하지 않을 것이며, 다음번에 무엇을 봐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수련생을 만나면 피해버리지만 그러나 당신의 집착은 버렸는가 안 버렸는가? 마음은 닫혀 있고 열리지 않는데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작은 울타리를 만들어 자신을 견지하고 속으로는 다른 수련생을 깔보면서 수련생은 당신보다 높지 않다고 여긴다. 이는 이미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다. 의견을 이야기한 수련생은 사실은 열려서 수련하는 수련생이 대법에서 빗나갈까 걱정해서이다.

내가 어떤 광경을 보았을 때, 내가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수련생은 자기가 무엇을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나는 수련생이 한 말이 꼭 옳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니 자신이 본 것도 절대적이 아니고 수련생이 말한 것이 어쩌면 이치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냥 이렇게 생각했는데 나는 나의 시야와 지혜가 또 열리는 것을 발견했다. 끊임없이 이런 일을 겪으면서 나는 자신의 상태에 변화가 발생하고 그다지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자아를 견지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본 광경, 수련생이 깨달은 어떤 일의 배후 요소를 가늠해 보면 우리는 지혜를 서로 보충해 주고, 어떤 일을 할 때면 그야말로 주먹을 쥔 것처럼 힘이 아주 큰 감을 느끼게 되는데 교란을 파괴하는 요소를 제때에 제거할 수 있었다.

우리가 내려갈 것을 선택했을 때, 각자 대궁의 나쁜 것을 구(救)하고자 한 것이 목적이었다. 우리가 사존님 앞에서 서약을 맺은 것은 일정한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중생을 구원하자는 일념으로 나와 전진하면서 인간 세상으로 왔다. 만약 우리가 자아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곧 내려올 때의 최초 서약을 어겨 사람 속에 갇히고 말 것이다.

대법에서 우리의 지혜는 사존께서 주신 것이고, 우리의 능력은 사존께서 주셨으며, 우리가 앞으로 성취해야 할 일체 모두는 사존께서 주신 것이다. 사존께서는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를 양성해 보살펴주셨다. 우리는 오직 자아를 내려놓고 사존께서 배치하신 길로 가야만 대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아에 집착하고 보수적인 것을 고수하며, 자신의 작은 울타리에서 맴돌며 위사위아(爲私爲我)의 특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성, 주, 괴, 멸’의 결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신경문에서 사존께서는 여섯 곳에 ‘대법제자’를 썼고, 오직 한 곳에만 ‘수련생’을 썼는데, 이 한 곳은 정말 우리 수련생이 깊이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신 의견을 고집하지 말고 사존의 이 말씀의 고심(苦心)함을 깨달아 정법 노정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푸왠선(副元神) 관련 문장이 일으킨 파동에 관하여’

문장발표 : 2016년 9월 1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9/1/33376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