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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닦음’과 ‘일하는 것’

글/ 산둥 대법제자

[밍후이왕] 어제 수련생과 함께 법공부를 할 때 한 수련생이 노년 수련생에게 문제를 지적해 주자 노년 수련생은 기분이 나빠했다. 내가 그녀에게 다른 사람이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과 다른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다고 지적하자 노년 수련생은 물었다. “다른 사람의 말이 분명이 옳지 않은데 반드시 들어야 하나요?” 나는 말했다. “다른 사람의 말에 따라 하라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그때 나오는 집착심을 제거하라는 뜻이에요.”

노년 수련생은 아직 막연한 표정이었고 또 “예를 들어 그날 수련생 A가 우리 집에서 쓸데없는 말을 반나절이나 하고 가지 않았어요? 귀찮아서 그에게 가라고 하면 싫어하는 마음이 있다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당신이 그에게 가라고 해서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가라고 말하지 않아도 싫어하는 마음이 존재해요. 우리는 마음을 닦는 것이지 당신에게 하고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에요. 당신은 싫어하지 않는 마음을 지니고 그에게 태도를 표명하면 되고 어떻게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됩니다. 단지 집착심을 지니지 말고 일을 하라는 뜻이죠.”

집에 돌아온 후 나는 자세히 이 문제를 생각했다. 주변에 아직 이런 문제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나도 이전에 이 문제에서 오랫동안 곤혹을 치른 적이 있다. 자신이 이렇게 하면 나에게 무슨 마음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가? 사실 당신이 그런 마음이 있기에 그 마음에 이끌려 그 일을 한 것이다. 물론 일하는 자체와 집착심은 필연적인 관계는 없다.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그 집착심은 거기에 아직 있고 단지 일하는 과정에서 이런 집착심이 반영돼 나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예를 들겠다. 나는 이전에 싫어하는 마음을 지니고 수련생에게 문제를 지적해 주었다. 표현돼 나오는 어투는 선하지 않고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옳지 않다고 인식했고 수련생도 여러 번 나에게 싫어하는 마음이 심하다고 지적해주었다. 싫어하는 마음을 제거하려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 마음을 제거하는데 공력을 들이지 않았고 형식에만 공력을 들였다. 나는 수련생과 말을 적게 하고 다른 사람의 일을 덜 관심하며 다른 사람에게 문제를 지적해주지 않았다. 한동안 모순이 적어진 것 같았다. 표면적인 가상에 이 마음이 담담해진 것 같았다. 사실 근본적으로 수련해 버리지 못했다. 형식상 교활하게 보호해 놓은 것이다. 그것을 자극하지 않으면 반영돼 나오지 않는다.

이후에 이런 상태가 근본적으로 법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이런 마음을 제거하라고 하셨다. 나는 이런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이런 집착을 더욱 키웠다. 인식하고 정상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면 어떻게 하고, 단지 일하는 과정에서 그런 마음이 나오면 붙잡고 그것을 제거했다. 이런 마음에 이끌리면 수련생에게 문제를 지적해주지 않게 된다. 마음을 바로 잡고 다시 문제를 지적해주니 전보다 효과는 몇 배 더 나았다.

‘마음 닦음(修心)’은 무형적인 것이기에 우리가 마음을 조용히 하지 못하면 그것을 붙잡기 어렵다. 하지만 ‘일하는 것’은 유형적인 것이다. 흔히 우리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수련생이 ‘일하는 것’을 ‘마음 닦음’으로 대체하는 원인이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우리 이 한 법문, 속인 중에서 수련하는 이 부분은, 속인사회 중에서 수련하며 최대한 속인과 같게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물질 이익에서 당신에게 그 무엇을 실제로 잃으라는 것이 아니다. 설사 당신이 아무리 높은 벼슬을 할지라도, 또 당신이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을지라도 관건은 당신이 그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1]

우리는 번잡한 사무에서, 복잡한 대인관계에서, 시끄러운 속인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부님의 이 한 단락 법의 내포를 깨달았는가. 그 속에서 뛰쳐나와 번잡한 물질 표면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자신의 후천적 관념에 이끌려 가지 않고 착실하게 자신의 그 마음을 닦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착실한 수련이다.

그 원인을 보면 우리는 아직 근본적으로 수련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법보(法寶)인 안으로 찾기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모순을 만나면 상대방을 보고 자신을 보지 않는다. 안으로 찾는 것을 모른다. 단지 자신 행위의 옳고 그름만 보고 자신의 집착심을 찾지 못하면 안으로 찾지 못한 것이다. 사람의 이치로 시비를 가늠하고 법리로 자신의 집착심을 찾지 못하면 낮은 경지의 표준으로 자신의 집착심을 방임한 것이고 높은 경지의 표준으로 용맹정진하지 못한 것이며 진정으로 안으로 찾은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누락이 없게 수련하라고 하셨다. 지금까지 우리 많은 수련생은 아직 진정으로 안으로 찾지 못했는데 정법 종결 그날에 표준에 도달할 수 있는가? 남은 시간은 정말로 많지 않다. 단지 시간을 다그쳐 착실하게 자신을 수련해야 비로소 사존의 자비로운 고도(苦度)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문장발표: 2016년 8월 3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8/3/3323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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