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화동지역 대법제자 탕신(唐信) 구술, 수련생 정리
[밍후이왕] 화동지역 모 성의 대법제자인데 올해 47세고 현재 한 회사 자회사의 지배인이다. 어릴 적부터 신체가 약하고 병이 많았는데 1995년 10월에 운 좋게 파룬궁을 수련한 이후부터 고질병인 천식이 없어졌고 체질도 건강해졌을 뿐만 아니라 인생도 ‘진(眞)ㆍ선(善)ㆍ인(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반본귀진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향이 생겼다.
질병이 없고 온몸이 건강해져 사회에 보답하기로 결심했다. 일하는 중 이기심을 내려놓고 보답을 추구하지 않으며 부지런히 일하고 잔업도 하며 공공재산을 조금도 차지하지 않았기에 직장 사람들의 한결같은 호평을 받았고 여러 번 ‘선진 개인’으로 평가받았다. “당신은 우리 직장에서 가장 좋은 사람입니다!”고 말한 동료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1999년 7월 장쩌민(江澤民)이 개인적인 사심에 따라 파룬궁 박해를 발동했다. 같은 해 10월 아내와 함께 양심에 따라 베이징에 가서 청원했는데 불법적인 4년 형을 선고 받았다. 2001년 2월, 불법적으로 1년 넘게 수감됐던 나는 구치소에서부터 A교도소로 이송됐다.
A교도소는 모 성 제1교도소란 간판을 걸고 있었는데 중형범을 수감하는 교도소였고 ‘문화대혁명’시기에 유명 정치범도 수감한 적이 있다. 몇 십년간 중국공산당의 여러 차례 정치운동 중 사람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음흉하고 악독한 수단을 연구해냈고 법치와 인권을 무시하고 잔혹한 기운이 넘쳐흐르는 사법 졸개들을 많이 키웠다.
99년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A교도소의 교도관은 사람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수단들을 거리낌이 없이 선량한 대법제자의 몸에 사용했고 나와 불법적으로 수감된 모든 파룬궁 제자는 극히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한번은 대대 교도원 탄(譚)씨는 날 찾아 면담할 때 거리낌 없이 “당신이 죽어도 우리에 대해 아무런 영향이 없다. 우리는 자료(거짓)를 만들 수 있으니까……”라고 했다.
나는 내성적이라 말을 잘하지 못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나약한 서생 같았다. 사악한 고압 박해를 견뎌낼 수 있고 중국공산당의 소굴에서 정정당당하게 걸어나올 수 있던 것은 모두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의 보호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법 덕분이다. 4년간 억울한 감옥살이, 많은 것을 겪었는데 아래 3가지 실례만 들고 대법의 위대한 위력과 사부님의 법신이 시시각각 대법제자를 지켜주시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겠다.
‘사부님, 구해주세요’를 묵념하자 극한의 고통이 사라지다
2002년 어느 날 점심 휴식시간에 교도소 작업장 작은 방에서 가부좌하고 있었는데 교도관이 발견하자 두 ‘적극위원회’ 형사범을 지시해 나를 작업장 안으로 끌고 가 강제로 긴 의자에 눌러 앉혔다. 두 죄수가 한쪽에 한 사람씩 서서 두 손을 양쪽으로 늘리고 굵은 삼밧줄로 긴 의자 등받이에 꽁꽁 묶어놓고 나를 긴 의자와 함께 벽 구석으로 내 얼굴이 벽에 부딪히게 힘껏 내던지고 내버려두었다.
온몸을 움직일 수 없고 두 팔도 꽁꽁 묶여 있어 가슴을 파고드는 듯 아팠다. 특히 오른팔은 갈수록 아프고 부풀어 감당력이 극한에 이른 것 같았고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일 수 없으며 뛰려고 해도 뛸 수 없었다. 나는 이런 방법으로 나의 의지를 훼멸시키려는 것임을 알고 절대 사악한 교도관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정말로 견딜 수 없어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요청하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사부님, 구해주십시오, 사부님, 구해주십시요’……라고 묵념했다. 얼마나 묵념했는지 점차 오른팔의 심한 통증이 사라졌고 괴롭지 않았다. 이후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비록 원래 자세로 여전히 긴 의자에 묶인 채 있지만 매우 편안했고 전혀 묶인 느낌이 없다.
사부님께서 도와주시고 있고 사부님께서 바로 곁에 계셨던 것이다.
강제노동이 끝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날 풀어줬다. 이번에 난 5시간 묶여있었다.
대법을 외우자 신기함이 나타났고 고생 중 고생을 느끼지 못하다
‘진선인(眞善忍)’을 연마해 수감된 것이기에 교도소에서 반(反)박해하고 노역을 하지 않자 사악한 교도관은 여러 번 날 작업장 기둥에 노역을 시작해서부터 끝날 때까지 하루 종일 매달아놓았다.
매달렸을 때 오랜 시간 서 있는 자세로 있고 활동할 수 없어 두 손이 아프고 어깨, 머리도 편안하지 않았으며 신체의 감당도 매우 컸다.
이런 상황에서 끊임없이 ‘논어’, ‘제자의 위대함’, ‘역시 두세 마디를 말하다 (也三言兩語)’ 및 사부님 ‘홍음’ 중의 시를 외웠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법을 외우는 중 신체의 고통은 적어졌고 한번 또 한번 견뎠다. 외우면 하루였고 그들이 날 내려놓을 때까지 외웠다.
매달려 있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음식을 먹으면 더욱 괴로웠기 때문에 거의 매달렸을 때마다 할 수 없이 단식했다. 그러나 법을 외웠기 때문에 단식해도 배고픈 줄 몰랐고 오히려 머리가 명석하고 몸에 아무런 불편감이 없었다. 과거에 단식해 이후에 위장병에 걸린 형사범이 내게 단식하지 말라고 권했는데 나는 괜찮다고 했다. 사부님의 보호가 있고 대법이 있기 때문에 단식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교도소에서 나온 몇 년간 건강 상태는 좋았다.
진상을 안 수감자가 반박해를 돕다
교도소에서 줄곧 반박해를 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사악한 교도관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2003년 3월, 우(吳)씨 교도관은 날 작업장 작은 방으로 데려가 잔혹하게 전기 충격기로 30분 넘게 날 때렸고 극도의 고통으로 나는 바닥에서 끊임없이 뒹굴었다.
같은 해 5월, 일을 마치고 감방으로 갈 때 내가 협조해 쪼그려 뛰기를 하지 않자 교도소 중대장 추이(邱)씨가 뒤에서 날 세게 한 발 차는 바람에 난 바닥으로 넘어져 앞니 두 개가 바로 떨어졌고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A교도소의 일부 형사범은 나와 기타 대법제자의 평소 표현에서 우리가 모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법제자의 용기와 확고함에 매우 탄복했고 암암리에 날 도와줬으며 동정했다.
이 한 장면을 마침 만기 출옥하는 형사범 H가 보고 출소 후 즉시 우리 집에 내가 교도소에서 박해당한 일부 상세한 상황을 전화로 알려줬다. 그리하여 가족은 즉시 구원용 서면자료를 써서 교도소로 가져왔고 내 부상 상태를 알아보고, 불법 체벌하고 날 학대한 교도관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또 성 교도소 관리국에 고소장을 제출했고 노동개조를 주관하는 부국장을 찾아가 나에 대한 박해를 폭로했다. 얼마 후 교도소관리국에서는 조사팀을 A교도소로 파견했고 전기 충격기로 날 때린 우(吳) 교도관의 그 달 평점을 4점 깎는 것으로 끝냈다. 비록 형식상 처분이지만 사악한 교도관들을 겁먹게 했다. 이후 A교도소에서 나는 다시는 어떤 큰 박해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법공부하고 연공하는 환경도 더욱 좋아졌다.
기쁜 것은 H도 이로 인해 새 삶을 얻었다. H가 출소한지 얼마 안 돼 원래 알던 조직폭력배가 H보고 지하도박장에서 일하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학력이 없고 경험이 없어 생계를 도모하는 H에게는 고생이 많았다. 일마다 힘들었고 임금도 매우 낮았지만 H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견뎌냈다. 이후에 아버지의 중병 때문에 H가 고향으로 돌아가서야 연락이 끊겼다.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최고조 시기에 H가 위험을 무릅쓰고 소식을 전해준 것은 일정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 대법 위덕의 영향 하에 H처럼 진상을 안 형사범은 A교도소에 적지 않았고 사부님의 ‘홍음’을 배운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했다.
이렇게 사부님의 보호 하에 나는 사악한 교도관의 각종 고문을 견뎌내고 ‘전향’하지 않았으며 대법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걸어나왔다. 교도소에서 줄곧 방해를 제거하고 법공부하고 연공하는 환경을 개척했다.
대법 수련인이 해야 할 것을 견지했기 때문에 교도소를 떠날 때 피부가 반들반들하고 얼굴이 통통하며 씩씩해 가족들은 내가 젊어 보인다고 했다.
4년 간 억울한 감옥살이, 대법의 큰 위력을 깊이 체득했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1] 자신이 바로 걸어갈 수 있을 때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결정해주시므로 누구도 우리를 진정으로 박해할 수 없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문장발표: 2016년 6월 1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정념으로 박해를 선해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6/15/32958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