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자신과 수련생들이 최후의 관두에서 정진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보고 왜 이런 상황이 나타나는지 사고하게 됐다. 약간의 체험이 있어서 아래에서 여러분들과 교류한다.
1. 왜 정진할 수 없는가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1] 우주 앞에서 한 사람은 매우 무능하지만 한 가지 점은 매우 고귀한데 사람에게 수련하겠다는 소원이 있다면 말이다. 우리가 수련할 수 있음은 사부님의 도움이 있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공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만약 사부님에 대해 믿음이 단호하지 않다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데에 따라 진정으로 행할 수 없다. 이러한 수련 역시 잠자리가 물을 살짝 건드리는 것과 같이 표면에만 머무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는 용맹정진하는데 그것은 사부님의 가지 하에 의한 것이고 자신이 지닌 근기가 일으킨 작용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본질적인 것을 건드렸을 때 일부 사람들은 진정으로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도와주신다. 그러나 우리 자신도 마땅히 닦아야 할 부분은 반드시 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련할 부분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법속에서 자기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일면을 찾는다. 예를 들어 대법제자 장래의 영예, 무슨 재난이 없고 수련은 복을 가져다준다는 등등이다. 그러나 수련의 본질은 승화해야 하고 모든 사람의 것들, 무슨 욕망, 흥미, 그리고 사람의 관념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무엇을 환골탈태라고 하는가? 당신 그 뼛속의 것을 개변하지 않으면 그럼 당신의 수련은 수박 겉핥기식이고 원만을 논할 수 없다.
그러나 뼛속의 것을 개변한다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우선 천백 년 동안 형성된 사람의 이치가 우리의 사상 속에 뿌리 깊게 있다. 다음은 우리 이전의 본성 또한 위사위아(爲私爲我)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리하여 아주 많은 일들을 한 수련생일지라도(일하는 것은 수련이 아님) 혹은 잔혹한 박해를 겪은 수련생이라도(박해를 겪었다고 법에서 깊은 인식이 있다는 것은 아님) 반드시 진정으로 사람의 것을 내려놓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시초에 올 때의 일념은 순진(純眞)한 것이고 중생을 구도하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비로소 대법제자가 된 것이고 다시 말해 올 때 시초의 그 한 점은 신우주의 특성으로 나아간 것이고 신우주의 특성은 타인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서약을 지니고 우리는 층층이 아래로 내려갔고 사부님께서도 줄곧 우리를 보호하고 계셨으며 우리가 오늘날 대법제자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보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을 해주셨고 오늘날 서약을 실현할 수 있는 기초를 다져주셨다. 그러나 오늘날은 바로 실천할 때이고 실천 중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원래 위사위아한 본성을 타인을 위하는 신우주의 표준에 부합되는 생명으로 개변해야 한다.
사람으로 말하면 전력을 다해도 모자라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상태이지만 우리가 도달해야 할 것은 신의 상태이므로 요구가 더 높고 진정으로 수련인에 대한 요구는 일사일념 모두 법의 요구에 부합하고 모두 대법에 동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는데, 사람이 병이 생기면 표면상 궤양이 생기고 염증이 생긴다. 미시적인데서 보면 기혈이 통하지 않고 더 내려가면 검은 기이고 더욱 내려가 보면 더 깊은 공간에 좋지 못한 영체가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영체가 당신 몸에 머물 수 있는가. 왜냐하면 당신에게 이 검은색 업력장이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좋지 못한 장이 있는가. 그것은 당신이 이전에 좋지 못한 일을 행해 생긴 것이다. 왜 좋지 못한 일을 했는가? 그것은 당신에게 이기적인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최종의 뿌리는 이 사(私) 때문이고 이 사(私)는 매우 높은 공간까지 관통되었고 우리 생명의 본성 속까지 융합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 가장 가장 표면적인 부정확한 상태를 개변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뼛속의 이기적인 관념을 바로잡아야 하고 그래야 당신은 비로소 이 가장 가장 표면적인 것을 개변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당신 내심이 이 사(私)를 고수한다면 당신이 생각해봐도 표면을 바로잡는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정진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의 욕망, 사람의 명리, 사람의 관념을 내려놓지 못한다는 것인바 사실상 모두 이 사(私)를 내려놓지 못함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많은 역경을 지나온 수련생들이 최후에 정진할 수 없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2. 어떻게 하면 다시 정진할 수 있는가
수련하는 사람은 우선 제고하려 해야 하고 이런 좋지 못한 상태를 개변하려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렵다. 사부님께서는 “마음을 똑바르게 하려면 먼저 뜻부터 성실하게 해야 한다.(欲正其心,先誠其意)”[2]라고 하셨다. 이런 진솔한 마음이 없다면 연공은 입으로 말할 뿐이고 자신을 속인 결과는 자신을 해치게 된다.
그 다음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 당신은 내가 수련하고 싶지만 나는 고생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데 그럼 수련하고 싶다는 것은 여전히 빈말이 아닌가. 우리 이 법문은 바로 모순 속에서 공을 얻고 주의식을 닦는 것이다. 당신은 내가 모순은 싫고 안일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수련하지 않겠다와 같다. 욕망을 떼어내고 관념을 바꾸려면 당연히 마음속은 고달프다. 사람을 구하는 것 역시 수고스러운 것이고 당신이 보았을 때 어느 역사상 도를 닦는 것이 고달프지 않았는가?
온몸에 업력이 가득한 사람이 신이 되고 싶다면서 고생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우매하고 허황된 망상이다. 무엇을 결심이라고 하는가? 바로 과거와 결렬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당신이 흐지부지한다면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더 나아가서 사상 속에서 자신에게 퇴로를 남기지 말라. 대법제자는 후퇴할 길이 없고 수련성취 돼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두려운 것이다.
당신이 말해보라, 당신은 어디로 후퇴할 것인가? 당신은 바로 속인 중의 좋은 사람이 되려 하고 당신이 당신의 서약을 실현하지 않는 것은 범죄다. 당신이 수련을 한바탕 엉망진창으로 해도 역시 범죄인데 왜냐하면 당신은 사부님의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이며 당신이 중생을 구도하겠다고 맹세한 그 중생들의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물을 거슬러 배를 저으려면 힘을 다해야 하고 노를 젓다가 잠시 힘을 느슨히 하면 바로 1천자(千尺) 후퇴하게 된다. 우리 수련이 바로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으로서 퇴로가 없다. 수련은 대충 그럭저럭 지내는 것이 아니고 대충 따라하는 것이 아니다. 수련은 더욱 기다리지 말아야 하고 구경하지 말아야 하며 매 한 치를 전진함에 있어서 당신은 열심히 힘껏 행해야 한다. 매 한 치의 공을 자라게 하려면 진정으로 심성을 제고해야 한다.
시간은 긴박하고 기연은 얻기 힘들다. 우리는 오로지 정진할 수밖에 없고 다른 선택이 없다!
최후에 다가갈수록 더욱 관건적이고 수련생들이 더욱 용맹정진하기를 바라며 함께 승리의 대안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파룬궁-제3장 심성수련’
문장발표: 2016년 6월 1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6/18/33016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