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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문화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지 논하다

[밍후이왕] 사부님께서는 최근 몇 년간 설법 중에서 대륙 대법제자는 마땅히 당(黨)문화를 제거해야 한다는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나는 사부님의 설법이 점차 무거워지고 있다고 느꼈다. 대륙 대법제자의 당문화 요소는 자신이 법을 실증하고 해외제자가 법을 실증하는데 대해 이미 엄중한 부정적 영향을 일으키고 있음을 나는 깨달았다. 심지어 사부님을 교란했는데 예를 들어 션윈 동영상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자신에게 당문화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기만 해서는 안 되는바 어떻게 해야 비로소 제거할 수 있는가? 이는 내 앞에 놓인 문제였다. 첫 시작에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께서는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다”[1]고 하셨다. 그럼 나는 법공부를 많이 하자. 사실 나는 본래 법공부를 비교적 중시하기에 더 법공부에 노력했고 법을 외우고 평소에 또 발정념을 추가했으며 진상알림을 추가했다. 그러나 기본상 개인수련을 열심히 하고 특히 법공부에서는 이미 최대한 노력을 했으니 당문화는 마땅히 제거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일들에서 나는 그렇지 않음을 발견했다. 내 분노는 여전히 아주 컸고 전화를 걸어 진상을 알릴 때 목소리가 아주 높았다. 수련생이 말하는데 진상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나 자신은 느낌이 없었고 여전히 이는 당당함, 정념 있는 표현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또 일부 사람들을 탈퇴시켰는데 일부 속인은 내가 진상을 알린 것을 듣고서 파룬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에게 감사를 표시하니 나는 자신이 고함을 지른 것이 맞다고 여겼고 내가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무엇을 말하는지 그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여겼다. 이는 두려움이 없는 체현이라고 생각했다. 이후에 비로소 나는 고함을 질러서 왜 일부 사람을 탈퇴시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당시 자신에게 당문화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필경 나는 여전히 아주 많은 사람마음을 닦았다. 선한 일면이 있었고 비록 나의 선이 순정한 선이 아니지만 일정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도된 사람의 인원수가 많지 않아 나도 궁금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지만 탈퇴시킨 인원수가 많지 않고 열심히 한 정도와는 정비례가 되지 않았다.

수련생과 교류할 때 수련생의 법에 대한 인식이 나와 일치하지 않으면 나는 기관총을 쏘듯이 반격하고 아울러 사부님의 법을 이용해 상대방에게 반격했다. 일부 수련생은 나보다 법을 기억한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반격할 방법이 없어 말하지 않았다. 이후에 나는 당문화를 제거하는 과정 중에서 어찌된 영문인지 알게 됐다. 수련생은 “당신이 사부님 원 말씀으로 나와 쟁론할 때 누가 감히 사부님 말씀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제가 비록 당신 인식에 동의하지 않지만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받아들이지 않고 많은 수련생들 사이의 간격과 모순이 바로 이렇게 일어난 것입니다. 일부 수련생은 자신이 마땅히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역시 소리를 내지 않지만 아주 많이는 마음속으로 역시 받아들이지 않아 간격이 조성되었습니다.” 일부 수련생은 비록 내가 태도가 좋지 않지만 필경 그녀의 문제점을 지적해 자신에게 제고가 되었다고 여기고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불편해했다. 왜냐하면 내 말이 사람을 다치게 했기 때문이다. 당문화 속의 그런 반문, 질문, 명령식 대화 방식은 무척 사람을 다치게 하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한번은 나에게 독수리 한 마리를 보여주셨는데 독수리 머리에는 그렇게 입이 길고 또 단단한 부리가 휘어져 있었다. 이는 나에게 말을 할 때 남을 기세등등하게 몰아세우는 것이 다른 공간에서 체현되는 것임을 점화해주신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의 심령을 찌르고 송곳보다 더 사람을 아프게 찔렀다. 이후에 당문화를 제거하는 과정 중에서 비로소 당문화의 대화방식에 말 속에 가시를 지닌 것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더 강세인 수련생을 만났을 때, 나보다 더 말을 잘하는 수련생을 만났을 때 나는 스스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여겼다. 비록 상대방의 관점을 인정하지 않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데 반격할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이 사람이 진짜로 강세이고 너무나 사람을 놀라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와 협조할 방법이 없었고 이후에 비로소 상대방의 그러한 강세 역시 당문화의 표현임을 알게 됐다.

내가 이런 강렬한 당문화 속의 쟁투심을 지니고 법공부를 하니 해도 효과가 좋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표현되어 나온 것은 바로 속도를 다그치는 것이고 법을 읽는 것이 무척 빠른데 이를 또 정진하는 표현이라고 여겼다.

내 주변에 한 수련생이 있는데 법을 매우 잘 외웠고 진상 알리는 것도 아주 괜찮았다. 법공부하는데 속도를 다그쳤고 일반적으로 한 시간 내에 한 강의를 외웠고 하루에도 여러 강의들을 외울 수 있었다. 나는 당시 아주 부러웠지만 이후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속도를 다그치는 것 자체가 바로 일종 다투고 빼앗는 표현으로서 쟁투심이 있는 것이며 공명과 이익을 급히 얻으려는 표현이다. 당문화가 제거되지 않으면 비록 법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도 그녀 몸에서 그러한 수련인의 자비와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다. 그녀가 매번 나를 찾아오면 나는 일종 회오리바람이 온 것 같이 빨리 왔다가 빨리 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시간을 다그쳐야 하고 지금 시간이 얼마나 빠르냐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아주 정진한다고 여겼지만 조금 이상한 감이 들었다. 이후에 ‘해체 당문화’를 읽고서 알게 됐는데 그러한 ‘정진’ 속에는 다소 당문화의 요소가 섞여 있었다. 이는 수련생이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당문화 속에서 사부님의 설법을 정확히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문화 속에는 그러한 극단적인 인식방식이 있고 확실히 우리가 법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엄중하게 교란한다.

나는 또 한 수련생의 일을 듣게 되었는데 아주 재미있었다. 그가 법공부를 아주 많이 한다고 하는데 ‘전법륜’을 거꾸로 줄줄 외울 수 있고 법공부할 때 표준적인 결가부좌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당문화가 제거되지 않아서 당문화의 강제성으로 남에게 요구한다. 그의 집에 가서 법공부하면 모두 표준적인 결가부좌를 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가 가장 오랜 시간 결가부좌를 할 수 있고 누가 아파서 중도에 다리를 내리면 그는 즉시 누구에게 눈을 부릅뜬다. 누가 법을 배울 때 자세가 단정하지 않으면 그는 급한 나머지 발로 누구의 엉덩이를 툭 걷어찬다. 들은 얘기인데 그의 집에 가서 법공부할 때 졸면 그는 급한 나머지 옆에 있는 슬리퍼 하나를 들어서 던진다고 한다. 이런 상태는 사실 수련생 사이의 간격을 조성할 수 있고 일반 수련생은 마음속으로 이런 강세인 수련생을 두려워하고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어도 감히 지적하지 못한다.

방금 두 수련생의 예를 들었다. 정말 무척 정진하는 수련생이고 법을 이미 아주 많이 배웠는데 왜 아직도 당문화 요소가 있는가. 아마 다 ‘해체 당문화’ 이 책을 중시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또 아마도 정말로 아직 법의 요구에 따라 자신을 닦지 않아서일 것이다.

많은 수련생들은 모두 이런 생각이 있다. ‘해체 당문화’를 보는 것이 너무나 시간을 지체하기에 법공부를 잘하면 자연히 당문화를 해체할 수 있다고 여긴다. 나는 이 책을 진지하게 보는 과정 중에서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었고 비로소 명백해졌다. 진실한 정황은 우리가 당문화를 지니고 법을 인식하면 법을 진정으로 인식하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다. 당문화 사유를 제거하고 어떠한 관념도 지니지 말아야 비로소 사부님 설법의 각 층차에서의 내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극단적으로 사부님의 설법을 이해하면서 자신은 이를 또 모르게 된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줄곧 수천 년간 인류 정통문화가 출현한 후의 표현을 포함하는데, 예컨대 역사상 나타난 모든 명인(名人)과 큰 사건은, 사실 이 모두는 인류에게 문화를 다져주고 사상을 다져주고 사람의 이념을 다져주어, 대법이 전해지는 그날 사람이 법을 인식하고 진정한 수련문화를 인식하도록 한 것이다.”[2] 그럼 우리가 반대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변이된 문화를 지니고 어떻게 법을 정확하게 이해하겠는가. 단장취의, 편면적으로 사부님 설법을 이해하는 것은 모두 당문화와 연관이 있다. 먼저 당문화를 제거해야 비로소 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당문화를 지니고 법공부하면 비록 순정하지 못하지만 일부 법리는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저애작용을 일으키고 난이도가 크다. 당문화를 제거하는 것이 무척 필요하다.

어떻게 제거하는가? ‘해체 당문화’를 제대로 읽어볼 수 있다. 나는 ‘해체 당문화’를 보는 과정 중에서 정말로 일부 도리를 알게 됐고 당문화에서 조금 해탈해 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진지하게 보고 읽고 열심히 보면서 일종 크게 깨닫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진정으로 자신 몸의 악당문화 요소를 전부 해체시키는 것은 하루 이틀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당문화를 제거하려면 반드시 당문화를 가려내야 하는데 이래야만 진정으로 제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 사당 문화인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또 무엇을 제거한단 말인가? 사당은 폭력 거짓말로 사회를 전면적으로 통제하는데 개인생활, 가정 부부관계, 아이 교육 등 가장 사적인 생활을 포함해서 전부 변이시켰다. 매우 많은 수련생들이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서 ‘해체 당문화’를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일종의 착오적 인식이다. 왜냐하면 당신 주변의 일체, 보는 것, 듣는 것, 주변에서 접촉할 수 있는 일체 메시지들이 전부 당문화 속에서 변이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수련생들이 인식하고 있는 명석함[淸醒] 역시 당문화 속에서의 명석으로서 이를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중시하지 않으면 명석함을 논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그날 집 문을 나서는데 길가에는 모두 버드나무였다. 한 할머니가 어린 애를 안고 있었고 어린 애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달라고 울고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한 가지를 꺾어주마 하면서 올라가서 한 가지를 꺾었다. 예전에는 무슨 잘못된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길가 곳곳마다 버드나무이잖은가. ‘해체 당문화’를 본 후 나무와 꽃을 마음대로 꺾는 것은 당문화에 속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문장 서두에서 나는 내가 ‘해체 당문화’를 보기 전에 화를 크게 내고 말소리가 아주 크다고 말했다. 사부님의 여러 차례 점화에서 이후에 끊임없이 ‘해체 당문화’를 보는 과정 중에 스스로 평화로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나는 진상을 알릴 때 그러한 높은 소리로 말하는 상태가 아니다. 예전에 고함을 쳐서 목청마저 지쳤는데 현재는 이런 느낌이 아니다.

내가 이 문장을 쓸 때 당문화를 제대로 인식해야 비로소 당문화를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내의 수련생은 바로 ‘해체 당문화’ 이 책을 많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문화가 있는 해외 수련생은 국내와 요구가 같지 않은데 이 책을 보는 것 외에 정상사회에서 일자리를 찾거나 혹은 국외 정상사회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서 정상사회 상태에 적응해야 한다.

‘해체 당문화’를 볼 때 처음에는 열심히 보면서 책 속 내용이 아주 많고 많은 나의 변이된 행위와 관념들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울러 많은 관념들은 내가 배우고 생활하고 일하는 중에서 당연히 정확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당문화의 관념들이었다. 나도 자신이 하루 빨리 자신의 사당 문화의 요소를 제거하고 자신을 순정하게 하고 중생을 구도하기를 희망한다.

개인의 깨달음이고 층차의 제한으로 부족한 곳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시정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교란을 배제하다’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7-2006년 캐나다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6년 6월 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6/1/32936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