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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질문에서 비롯된 문제를 말하다

-수련 중의 체득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아주 오래전에 수련상태가 극히 좋았을 때 자비와 슬픈 상태에서 일념이 나왔다. 이번 박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중생이 모두 신우주로 들어갈 수 있겠는데 얼마나 좋은가! 사부님도 수고하지 않을 것이고 구세력의 박해가 없을 것이며 대법제자의 비장함도 없이 모든 것이 다 그렇게 아름다웠을텐데 좋지 않았을까?!

이 일념이 나오자 일종 막을 수 없는 힘이온 가슴에 넘치면서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공간에 가서 물었다. 어떻게 하면 99년 천지 대재난의 발생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한 층 한 층 줄곧 당시 내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층차에 이르렀는데 층층 공간의 생명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도 해결책을 몰라 피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때 하늘이 마치 파도가 일듯이 층층이 열리면서 한 가닥 금빛이 그 속에서 나왔다. 션윈에서 나오는 장엄하고 조화로우며 정대한 우렁찬 소리가 입체적으로 울렸다. 99년 대법제자가 정체로 이지적으로 명석하게 법에서 법을 인식하고 법에서 깊이 있게 자신을 개변하고 이런 이지로 침착하게 진수한 상태였다면 99년 당시 박해는 발생하지 못하도록 안배됐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 속에는 아주 깊고 방대한 내포가 있었다. 예를 들면 모든 것이 다 대법제자가 정하고 있고 대법제자의 위덕, 대법제자의 책임과 사명, 대법제자가 천지를 장악하는 등등 이루다 말할 수 없는 표현이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세간에서 설법하실 때 여러 차례 다른 각도에서 이런 법리를 거듭 말씀하셨다. 예전에 사람 이 층의 표면 작용 하에서 법공부 중에 이런 이치를 알긴 했지만 그런 ‘아는 것’은 실속이 없는 것이었다. 이런 상태를 겪고 나서야 이런 법리 인식이 사람 표면 사상의 불안정함과 그런 천박한 것을 차츰 타파하면서 방대한 내포가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진일보 연상되는 것은 박해가 발생하도록 허용했다 하더라도 대법제자가 상술한 표준에 도달했다면 오늘의 박해 형식은 그렇게 엄중하지 않을 것이고 세간의 정법과 중생 구도 형식이 더 나았을 것이며 위험한 국면을 진정으로 돌려세워 사부님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 모든 것의 근본은 이미 명확해졌다. 아직 기회를 완전히 잃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거듭 우리에게 시간을 연장해 주셔서 우리가 ‘전법륜’에 대한 체험 및 대조하면서 얼마나 착실하게 수련했는지 보고 계신다. 지금의 대법제자는 ‘전법륜’을 모두 많이 읽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깨달은 것은 얼마나 될까?!

십 몇 년 동안 ‘전법륜’을 깨달으면서 배후 내포가 여러 차례 펼쳐졌다. 어떤 것은 직접 다른 공간의 정경으로 연화된 곳에 가서 깨달았고, 어떤 것은 마음이 확 트이면서 순간 어떤 한 층의 법리를 깨달았으며 어떤 법리는 방대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 입체적, 시공을 초월한 방식으로 마음이 통한 것처럼 직접 마음에 새겨졌으며, 어떤 것은 모호한 속에서 거대한 도끼로 순간 대뇌를 갈라놓아 한 가닥 틈으로 맑은 샘이 솟구쳐 오르면서 대뇌가 극히 변화무쌍하고 명백해졌으며 또 ‘전법륜’과 사부님의 많은 설법을 익숙하게 마음에 둔 것도 있다. 10여 년 동안 문자 표면 법리를 이해하고 깨달아 착실하게 수련하는 중에서 서서히 조금씩 전면적으로 이해했다. 사실 대법의 표면 문자를 이해해도 아주 높은 층차까지 수련할 수 있도록 지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전법륜’ 제 4페이지를 읽었을 때 흠칫하면서 순간 명백해져 입체적으로 이 단락 한 층 법의 내포를 접촉했다. 그 중에는 삼계를 만든 원인을 비롯한 대법제자가 왜 인간 세상에 내려왔고 대법제자가 마땅히 도달해야할 수련생태가 포함됐다. 특히 ‘단체’와 ‘사회관계’ 두 단어가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솟아오르면서 빛을 뿜으며 깊이 새겨졌다.

나는 체득했다. 삼계는 우주의 가장 낮은 공간이고 인간 세상은 삼계 중에서 가장 낮은 공간이다. 오늘 중국대륙 사회는 또 가장 좋지 않은 십악독세(十惡毒世)여서 세인들이 신을 믿는 선이 아주 낮아 사람마다 서로 헐뜯고 서로 무관심하며 적으로 대하고 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역대 사전(史前) 문명처럼 이미 도태되어 소멸됐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이런 공간, 이런 사회를 선택해 대법을 전한 것은 모든 것을 바로잡고 모든 것이 구도될 수 있는지 검증하는 것이다. 대법이 만든 제1차 생명인 대법제자가 우주가 마지막 소멸에 직면했을 때 가장 낮은 층차의 공간에서가장 부패된 이런 사회단체에서 사회와의 관계, 세인과의 관계, 수련자 사이의 관계를 잘 처리할 수 있는지 검증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인간 세상에서 높은 층차로, 더 높은 층차, 더욱 더 높은 층의 공간에서 집단 사회관계를 잘 처리할 수 있을까? 관건은 생명이 선타후아, 무사무아의 정각(正覺)을 구비해야 한다. 오늘날 대법제자가 인류사회 속에서 이 상태까지 수련할 수 있다면 어떤 시련과 번거로움에 부딪치든지 모두 영원히 변함없이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미래 우주 각 층의 왕과 주들이 책임진 천체는 비할 바 없이 견고할 것이다.

여기까지 말한 김에 몇 마디 더 하겠다. 나는 각 지역에서 사상이 있고 독립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괜찮은 일부 대법제자와 단독으로 깊이 교류한 적이 있다. 그들은 모두 진심을 드러냈다. ‘선타후아, 무사무아’를 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들 자신이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대법제자도 모두 못하고 있다면서 이 말이 한 마디 구호나 아름다운 소원으로 변화된 것 같다고 탄식했다.

나는 이 일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말해야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고금중외 역사상 확실히 많은 덕이 높고 지혜가 큰 사람이 생명을 ‘선타후아, 무사무아’의 방향으로 인도했지만 결국 각종 원인으로 오늘날 문화를 다지는 작용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은 우리 사부님께서 직접 하시고 또 천지개벽 우주를 만든 근본 대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이런 대법제자는 수련 문제 때문에 대법이 그들에게 이 방면을 펼쳐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 방면 법의 진정한 표준과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 것이다. 사람마음과 속인 사상 상태 작용 하에서 ‘선타후아, 무사무아’에 대한 인식이 사람의 정과 극단으로 밀고 간 상태가 섞여 있을 때가 많았다. 관념이 중한 수련생은 자극을 받으면 사람 마음이 튕겨 나온다.

한번은 ‘전법륜’의 ‘부동(不同)한 층차(層次)에는 부동한 층차의 법이 있다’를 배울 때 대법이 나에게 생명이 마땅히 도달해야할 선타후아, 무사무아의 그런 표준 및 상태 표현을 좀 체험하게 했기 때문에 즉시 경계심을 갖고 어떻게 해야 구세력과 같은 사상과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있는지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고 안으로 찾았다. 사부님께서 줄곧 답이 무엇인지 직접 알려주시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줄곧 그런 감각이 내 마음에서 맴돌면서 끊임없이 나를 깨우쳐 주었다. 생명이 ‘선타후아, 무사무아’ 상태라면 안에서부터 표면 상태는 어떤 것인가?!

이런 표준 혹은 상태는 아마도 당시 내 층차를 겨냥하여 요구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난 속으로 알고 있지만 사람의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해 낼 수 없었다. 혹은 고층차의 진정한 법은 사람의 언어와 문자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나는 가급적 논술하여 여러분이 감수할 있길 바랄 뿐이다.

우선 자신이 극히 보잘 것 없다는 심태를 가져야 한다. 우주 앞에서, 다른 생명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자신은 무수한 성계 중의 작디작은 미립자일 뿐이라는 심태를 가져야 한다. 우주의 높고 낮은 어느 층의 공간에 있든지 다른 생명이 존중하든 의혹을 갖고 대하든 낮고 높은 생명 앞에서든 이런 심태를 품고 환경과 일의 변화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하는데 허위적으로 표현하지도 말아야 한다.

자신의 생명이 보잘 것 없다는 마음을 품고 우주를 바라본다면 쉽게 흉금을 넓힐 수 있고 사유가 넓어질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일에 부딪쳤다 해도 될수록 상대방의 각도에 서서 생각해야 한다. 생명이 이런 자신을 낮춰보는 생각이 없다면 쉽게 이기적이고 잘난 체 할 수 있다. 구세력이 바로 이렇기 때문에 점차 빗나가고 변이된 것이다.

다음은 겸손하고 공경하는 표현 상태가 있어야 한다. 이런 겸손과 공경은 속으로 자신을 보호해 상처 받지 않고 질책을 받지 않으려는 빈틈없는 교활함이 아니고 당문화에 젖어 사람과 교제할 때 표면적이고 허위적인 겸손이 아니며 더욱이 속인사회 중의 인정화(人情化)된 겸손이 아니라 내심에서부터 겉 표면까지 자연스럽게 생성된 겸손과 공경이다.

옛사람이 말한 “내심으로부터 성실하고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성실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처럼 “바른 마음이 있어야 진심이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이 이런 겸손과 공경함이 없으면 마음이 바를 수 없다. 수련자가 이런 기초가 없다면 당신이 일정한 층차나 경지까지 수련했다 해도 심지어 점오 혹은 고도의 점오 상태에 처했다 해도 최후에는 쉽게 문제가 나타나 떨어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특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나 생명을 만났을 때 더 신중해야 한다. 마음대로 정의를 내리거나 논평하지 말아야 한다. 생명에 이런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없으면 쉽게 경직된 고정관념이 그 관념에 이끌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당신이 이 표준을 명확하게 깨달았거나 혹은 이런 상태에 처하면 당신은 자연스럽게 힘이 생길 것이다. 어떤 땐 대뇌에 자동으로 강대한 사상이 나온다. 즉 선타후아, 무사무아의 정념이 당신 사람 일면을 이끌어 될수록 다른 사람의 각도에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이 때는 사람 일면이 억지로 자신을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할 것인지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재적인 자동 기제가 이끌어준다.

우선 여기까지 말하겠다. 개인적으로 지금 층차에서의 인식을 수련생들과 삼가 교류한 것이다.

문장발표: 2016년 2월 7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2/7/3235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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