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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實修)

글/ 청언(承恩)

[밍후이왕] “무사무아, 선타후아”[1], 는 대법제자가 도달해야 하는 표준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자신은 정말로 거리가 너무 멀었고 마음은 정말로 창피하고 괴로워서 자신의 오성이 너무 차하다고 원망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수련했지만 모두 연마에 치중하였다(개인체험을 포함한 수련, 일하거나 혹은 기타 눈에 보이는 유형적인 것에 치중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자신은 실수(實修)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말하느냐 하면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련자의 心性(씬씽) 제고가 바로 수련의 본질이다.”[2],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몇 년 동안 대법의 요구와 갈수록 멀어지고 자신에 대한 요구가 갈수록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수록 느슨해지고 갈수록 형식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연히 겉으로는 시간이 길다고 말하면 사람은 서서히 태만해지는데(사실 시간도 길지 않고 이전의 수련은 일생 해도 느슨하지 않았다.) 사실상 어떤 수련도 대법제자보다 빠른 수련은 없다. 다시 말하면 수련시간의 길고 짧음은 해이해지는 이유가 아니다.

지난 한동안 늘 법리를 깨달으려 했다. 지금 발견한 것인데 책에서 알려준 법리대로 진정하게 나아갔다면 사실 이미 아주 높게 수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법 공부를 겉으로는 아주 숙련되게 배웠지만 진정하게 법리대로 행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는다.”[3] 이것의 가장 표면적인 도리도 자신이 해내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이 욕하고 때리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논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견해가 있어도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가리고 높고 낮음을 지적했다.

또 예를 들어 일에 부딪히면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라고 했는데 종종 자신이 도리어 화가 나서 난리고 자신의 인식을 강조하며 마음에는 온통 자신뿐이다.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마음이 어디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겠는가?

이런 것은 모두 자신이 실질적으로 수련하지 못했고 사부님의 요구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상태가 갈수록 차하고 신심도 갈수록 약해지며 심지어 좀 의기소침해진다.

여전히 매우 많은 부분이 있는데 예를 들면 안을 향해 찾는 것으로, 자주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첫 일념이 먼저 자신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 공부를 해야 한다.”인데 법공부를 할 때 늘 마음을 조용히 하지 못한다.

어떤 때는 마음으로 자신이 정말로 분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큰 법을 얻었는데 도리어 소중히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번에 수련원만 되지 못하면 다음에는 기회가 없고 영원히 다시 없을 것이다.

자신의 오성이 차하고 의지가 약해서 사부님께 향을 피워 올릴 때면 대부분 자신의 수련이 차하기에 사부님께 부끄럽다.

새로운 한 해가 또 시작되었다. 나는 나에게 또 얼마나 기회가 더 있을지 모른다. 매번 자신이 한 것이 아주 차하거나 혹은 씬씽(心性)을 지키지 못했을 때 나는 사부님께 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길 빈다. 그러나 자신이 제고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사부님께 기회를 더 달라고 빌 수는 없다. 이렇게 한다면 자신이 곧 끝장날 것이 아닌가?

나는 내가 반드시 경각심을 높이고 깨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부터 반드시 진정으로 실수하여 이 천년만년에도 얻기 힘든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주:

[1]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불성무루’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대원만법-부록’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시드니법회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원만을 향해 나아가자’

문장발표: 2016년 2월 1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2/11/32397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