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법을 외우는 중에서 대법에 동화

글/ 시롄(惜蓮)

[밍후이왕]

1. 첫 번째로 법을 외우다: 반드시 정확하고 진지하고 ‘한 치의 오차 없이’ 해내야

여기서 가리키는 ‘한 치 오차 없이’는 나 개인을 놓고 말할 때 바로 글자를 빠뜨리지 않고 글자를 보태지 않으며 글자를 잃지 않음이다. 한마디 말, 심지어 한 개 단어라도 몇 회, 십여 회, 몇십 회를 외워야 비로소 기억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내가 처음으로 법을 외운 과정에서 사용한 것은 가장 ‘우둔한’ 방법이었다. 당시 수련상태가 아주 뒤떨어진 원인으로 가끔 법을 외울 때 거의 모두 일종 ‘기계적으로 외우는’ 상태에 처했다. 그러나 내심에서는 ‘대법은 좋다! 너무 좋다 너무 좋다! 반드시 외워야 하고 더 어렵더라도 마땅히 외워야 한다’를 깊이깊이 알고 있었다.

전에 속인이었을 때 당문화의 것들에 대해서는 학업 상 필요 때문에 각종 심리 상태를 극복하고 억지로 외워냈다. 그런데 우주 대법을 푸대접하고 홀시 하며 두려워하면 되겠는가? 어떠한 구실도 큰 잘못이다. 그럼 모두에게 미안한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나는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한 마디 외우고 다음 한 마디를 계속하면서 빨리 외우는 것을 구하지 않고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냥 외우기만 했다.

또 무척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그 당시 외우기도 아주 쉽지 않았다. 당시 마음의 ‘괴로움’과 ‘감당’ 역시 의지로 극복해야 했다. 그러나 수련 중의 한 차례 무척 중요하고 주요한 ‘과목’은 의지 강화가 아닌가? 당시는 여름방학 기간이라 시간을 집중할 수 있었고 한 가지 목적은 바로 법을 외우는 것이었고 견지해 나가는 것이었다.

2. 법을 외우면 자신 마음에 정념이 생기게 할 수 있어

법 외우는 것을 방패로 해서 평소 업무와 생활 중에서 시시각각 진선인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도록 주의할 수 있고 또 자신이 갈수록 우주 특성 진선인에 부합되도록 변화시킬 수 있다. 그중에서 나 또한 ‘진(眞)’을 해냄으로 마음에 부끄러움 없이 떳떳할 수 있었고 ‘선(善)’을 해냄으로 갈수록 순정해지고 또 쉽게 변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위선이었다. ‘진’과 ‘선’을 해냄으로써 더 나아가 다시 ‘인’으로 자신을 요구하면 마치 더 조금 쉽게 변한 것 같았다. 마음이 정지된 물처럼 그러한, 일념도 움직이지 않는 경지는 정말로 아주 아름다웠다.

2013년 세뇌반으로 납치됐을 때 그 안에서 ‘전향’하는 사람이 자신이 한 말에서 모종 위협과 공갈을 암시하는 말들을 할 때 당시 나는 진선인의 힘이 내 마음속에서 일으킨 작용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그 시기, 그 순간에 그러한 한마디 ‘전법륜’ 중의 한 마디가 마음속에서 나올 때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정법 수련자로서의 영예와 위엄을 진실하게 알게 됐다. 이것이 바로 정념이 내보낸 상태인바 견고해 무너뜨릴 수 없고 반석 같으며 위력이 비할 바 없었다.

평소에 법을 볼 때 특히 법리를 보아내지 못할 때 늘 일종 마치 ‘보아도 들어오지 않는’ 느낌이 있었다. 아울러 어느 한마디 말씀을 보면 머릿속에 모두 ‘역시 아주 통상적인 한 마디구나! 사부님의 법이 속인의 말과 무슨 선명한 다른 점이 있음을 볼 수 없는데 명백히 말해서 모두 사람 언어구나’라고 느꼈다. 물론 이성적으로 대법이 절대 어떠한 ‘사람의 언어’와 다르고 내포가 박대정심하고 특히 매 한 마디, 심지어 매 글자 배후에 모두 사부님의 법신과 층층 겹겹의 불도신이 계신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결국 사람이 수련하고 있다! 가끔 사람 마음이 일어날 때 진실한 것은 바로 ‘더 보고 싶지 않다’이다. 이것이 일종 사상업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법리를 볼 수 없는 상태는 정말로 일종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 세뇌반에서 겪은 비상시기의 위력은 겨우 한 마디 법에 불과했지만, 오히려 진짜로 산도 가를 수 있는 작용을 일으켰다. 그 후로 나는 대법의 위대한 위력에 완전히 탄복했다.

3. 법을 외우는 중에서 대법에 동화하다

동시에 또 법을 외우는 의미의 심원함과 광대한 점들을 깨닫게 됐다. 우리가 연공함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기제(機制)와 기기(氣機)를 내려주심이다. 개인적인 이해는 이것이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 [1]이다. 아울러 대법도 우리 앞에 펼쳐져 있지만, 법을 얻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오히려 수련자 본인의 의지로 선택하는지 본다. 물론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 대해 본인도 무척 감탄한다. 그러나 문제는 시시각각 이러한 법에 부합하는 법학습 상태에 도달할 수 없는 수련생, 나 자신을 포함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가? 가장 좋은 방법은 법을 외우는 것이다.

나의 이해는 법을 외운 후 바로 법을 완전하게 자신의 생명의 어느 한 층의 미시적인 공간 속에 ‘새김’이다. 그렇다면 그 한 층은 바로 이미 법에 동화한 것이다. 한번 물어보고 싶다. 이는 미래의 자신이 천하무적의 방어력을 갖추게 된 것이 아닌가? 물론 또한 자신이 법에 동화할 수 있는 걸음을 빨리 할 수 있다.

아울러 법을 외우는 것은 진정으로 ‘법에서 법을 인식한다’를 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완전히 법에 있는 사람은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데 이는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갖춘 것이 아닌가?” [3] 그래서 조사정법의 각도에서이든지 혹은 자신부터 법에 동화하는 각도에서든지 법을 외우는 것은 모두 무척 중요한 것이다.

4. 법을 외우는 중에서 주의식을 강화

사람은 모두 편안하려고 하고 행복하려고 하며 고생을 하려고 하지 않고 더욱이 밑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수련인으로서 특히 오늘날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오늘날까지 걸어오면서 그러한 사람 중의 관념과 개념은 정말로 마땅히 바꿔야 한다. 일체의 일체, 너무나 많고 너무나 많은 것은 모두 갱신이 필요하다. 더욱이 중국 대륙에서 당문화 영향을 받은 적 있는 수련생은 더욱 그러하다.

물론 여기서는 겨우 법을 외우는 과정 중의 ‘고생’과 ‘불편함’을 가리킨다. 사실 진정으로 열심히 법을 외울 때 법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사실 미묘함과 법을 외울 때의 아름다운 느낌이다. 다만 기점과 과정 중에서 또 약간의 교란은 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또한 주의식을 강화하는 일종 방법이 아닌가? 동시에 또 법을 얻었는데 이는 하늘만큼 좋은 일이다!

한 점의 심득이고 적절치 못한 곳은 시정을 부탁드린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오스트레일리아 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05년 샌프란시스코 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6년 1월 2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21/32248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