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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집착을 내려놓은 후의 승화

글/ 해외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부님께서 ‘2015년 미국서부법회 설법’을 발표하신 후 나는 자신의 수련에 아주 큰 격차가 있음을 알게 됐다. 무조건 자신을 찾아보았는데 나의 제고를 억제하고 고층차의 법을 얻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임을 최근 알게 됐다. 그것은 표현이 아주 미묘하여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자아’를 근본적으로 내려놓지 못하면 ‘무사무아’를 논할 수 없고 자비심을 닦아내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낡은 우주의 특성에서 뛰쳐나오지 못하면 대법에 동화될 수 없다.

이전에도 이 점을 인식하긴 했지만 인식이 깊지 못했다. 나중에 나는 ‘자아’라는 것이 아주 완고하여 깨끗이 제거하기 쉽지 않음을 알게 됐다. 최근에 나는 그것 또한 나의 ‘근본적인 집착’임을 발견했는데 어떻게 찾게 됐는지 이야기하겠다.

우리 지역에 한 노인 수련생이 있는데 1999년 7월 20일 이전에 생명이 위급할 때 법을 얻었다. 지금은 노인 대법제자가 됐는데 대법, 사부님과 중생구도에 대한 확고함은 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장쩌민을 고소할 때 나는 그녀를 도와 고소장을 써주고 발송해주면서 자주 접촉하게 됐다. 최근 그녀가 신체에 교란을 받고 있어 나는 시간이 있으면 보러 갔고 간 김에 여러 가지 일을 좀 도와주었다. 가끔은 교류도 했는데 나는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여겼다.

어느 날 내가 그녀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려 하는데 마침 한 수련생이 찾아왔다. 나는 노인 수련생에게 “이 수련생을 제가 알고 있는데 아주 착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노인 수련생은 “착한 것이 아니라 자비에요. 그녀의 자비는 저를 감동시켰어요”라고 말했다. 노인 수련생의 표정과 어투에서 나는 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수련생은 노인 수련생을 가족처럼 대했는데 아주 간단한 몇 가지 행동에서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자신과 비교하여 차이점을 찾아냈다. 나는 사부님께 “사부님, 제자는 깨달았습니다. 착한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내는 것이고 닦아낸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이것이 사부님의 자비로운 배치와 점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틀 후 노인 수련생과 교류할 때 “일 처리 중의 어투, 선한 마음, 도리(道理)를 더하면 사람의 마음을 개변시킬 수 있으나”[1]라고 하신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내가 “저는 앞의 두 가지를 잘하지 못했어요. 도리만 말했기에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어요”라고 하자 노인 수련생은 “당신은 마침내 자신의 문제를 발견했군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것이 자신에게 아주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던 문제임을 발견했다. 뿌리를 찾아보면 문제는 바로 ‘자아’였다. 나는 ‘당문화’의 주입 속에서 생각이 비뚤어지고 관념이 변이되어 여성의 정숙함과 부드러움이 없이 아주 강했고 자기도 모르게 남을 깔보면서 잘난 체 했는데 모두 ‘당문화’의 표현이었다. 또한 구우주 생명의 특성처럼 다른 사람만 변화시키려 하고 자신은 바꾸려 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근본적으로 그것들을 닦아 없애지 않고 더러운 것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낡은 우주의 이치는 끊임없이 제약하여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승화되지 못하게 하여 제고가 아주 느림을 느끼게 된다.

이번에 나는 ‘자아’의 심각성을 느끼고 반드시 내려놓고 또한 철저히 내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또 시간을 내어 노인 수련생 집에 갔는데 이번에는 태도를 바꿨다. 나는 ‘자아’를 내려놓고 도와줄 일이 눈에 보이면 아무 생각 없이 보이는 대로 모두 했다. 또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상대방을 개변하거나 질책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선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관심하고 자신을 닦으려고 했다.

며칠 전 노인 수련생이 나에게 말했다. “요 며칠 저는 자신을 찾아 봤는데 많은 집착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려놓고 있는데 점차 다 내려놓을 거예요.” 이 말을 듣고 나는 매우 기뻤다. 우리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는데 서로 선(善)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일을 통해 ‘자아’를 내려놓은 후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선한 마음이 나왔다. 이와 동시에 공간장이 변하고 자신이 제고되고 승화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한 층 법에 동화된 후 나는 진정으로 자신을 대법의 입자로 여기게 됐다. 그 후 사부님의 점화 속에서 아주 간단했지만 중요한 일을 하게 됐다. 한 수련생이 관을 넘는 중에서 압력이 극에 달했는데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나와 한 수련생이 찾아 갔을 때 그녀는 쉴 새 없이 발생한 일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법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녀를 이해해 주면서 아주 평온하게 나의 인식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떠나갔다.

이튿날 그녀는 나에게 왜 자신을 찾아왔었는지 물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사부님의 배치인 것 같다면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가 찾아간 덕분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고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말해주었다. 우리가 떠나간 후 그녀는 사부님 법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사부님의 자비에 감사드렸다.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그녀의 수련을 지켜보시고 관건적인 때 수련생들이 찾아오게 배치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을 깨달았고 관을 넘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변했는데 마치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너무나 신기하다고 말했다.

한동안 끊임없는 제고를 통해 나는 자신을 잘 수련하는 것은 책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점을 깨닫자 이기적인 마음이 약해졌고 남을 위하는 마음이 강해졌다. 우리가 어느 한 층의 표준에 부합하면 사부님께서는 그 한 층에서 해야 할 일을 배치해주시는데 그 한 층 법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하면 마땅히 해야 할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수련하면서 끊임없이 착실히 수련하고 끊임없이 집착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진정으로 ‘자아’를 내려놓으니 지금 나는 매우 홀가분하고 선의 힘을 느낄 수 있게 됐다. 또한 자신을 잘 닦는 것은 책임임을 인식하게 됐고 무사(無私)의 일부 내포도 점차 깨닫게 됐다. 수련 중에서 안으로 찾는 것이 습관이 되어 개인적으로 문제에 부딪혀도 안으로 찾고 정체적으로 문제가 생겨도 안으로 찾으니 결과는 확실히 달랐다.

경지가 승화되면 사부님의 법리도 끊임없이 눈앞에 펼쳐진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층차에 이르면 간단한 것으로 수련이라는 개념이 없으며 오로지 업력을 없애는 개념만 있을 뿐이다. 더욱 높은 층에서 말한다면 모든 번거로움은 단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며, 더욱 높은 층에서는 무슨 소업이요, 무슨 고생이요, 무슨 수련이요 하는 이러한 개념이 없으며 바로 선택이다! 우주의 고층차는 바로 이런 하나의 이치이며, 보아서 누가 되면 바로 그를 선택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이치이다.”[2]

내가 과거에 부딪쳤던 관과 난 혹은 다른 사람과 발생했던 충돌, 갈등과 불쾌했던 일, 이런 마음, 저런 집착들은 지금 모두 감격의 눈물로 변했다. 사존의 자비로운 구도에 감사드리고 신이 되는 길을 배치해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이상은 작은 깨달음인데 법에 부합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청성’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문장발표: 2016년 1월 1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19/3224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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