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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련생이 안일심을 경계하며 태만하지 않고 착실히 수련하다

글/ 대륙신수련생

[밍후이왕] 수련생이 쓴 ‘안일심이 생활 곳곳에 있다’라는 문장을 보고 나도 동감하였다. 수련을일관되게 하지 못하면 마음으로 자신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한다.

나는 2011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한 신수련생이다. 그때 법을 얻은 상태를 돌이켜 보면 정념이 족했다. 집에서 내가 수련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는데 속으로는 ‘이혼을 한다 해도 수련하겠다고 생각했다. 법공부 중 나중에 깨달았는데 그때의 번거로움은 자신의 문제였다. 물론 이혼하지 않았다. 가부좌를 하지 못하게 하면 밤에 일어나 연공을 했는데 아내가 발견하고는 “당신 수련하세요. 반대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막 아이가 태어났을 때 생활이 바빠도 마찬가지로 밤에 일어나 연공을 했다. 진상을 알리는 일도 경험이 없었고 컴퓨터와 USB을 가지고 친척 친구에게 찾아가 동영상을 보여주며 진상을 알렸다. 일체가 다 순조로웠고 마치 신의 도움(神助)이 있는 듯했다. 사부께서는 “수련이 처음과 같으면 반드시 원만 한다.”[1]고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나의 이해로는 법을 얻을 때의 정념을 견지할 수 있으면 반드시 성공할 희망이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 게으른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쉽게 안일심의 교란을 받는다. 표현상 누구도 내가 법을 배우는 것을 반대하지 않지만 오히려 스스로 정진하지 못한다. 법공부와 연공함에 있어서 수련생이 쓴 것과 같다. 졸림과 욕망이라는 두개의 관을 늘 넘지 못하는 것이다. 매번 지나면 고통스러워하고 다시 잘 하려 하지만 며칠 후 또 느슨해진다. 이렇게 늘 안정되지 못한다. 한 가지 일이 나를 곤혹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한번은 퇴근 후 진상자료를 배포할 때 마음속에서 안일심이 나왔다. 가까운 길로 가고 몇 사람 진상을 알릴 수 있으면 알리자고 생각했다. 이런 염두가 나오자 틀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사람이 많은 데는 가지 않는가? 두려운 마음이 있는가? 진상을 많이 하지 않으려 하는가? 그리하여 나는 생각했다. ‘사람이 많은 데서 진상을 잘 알리지 못하더라도 안일심으로 가까운 길로 가면 안 된다고.’ 결과 사람이 많은 길로 간 후 진상을 순조롭게 알렸고 자료도 많이 배포했다.

이 일에서 나는 경험을 했는데 이것은 안일심을 겨냥한 것이다. 안일심이 나타나면 안일심이라는 마에 굴복하면 안 되고 그의 길로 가면 안 되며 차라리 안일하지 않은 환경을 굳건하게 선택해야 한다. 이 한걸음이 아주 관건이다. 이 한걸음은 ‘틀린 길을 걸어간 다음 다시 잘하여 보충하려’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쉽다.

사람이 안일심에 빠져들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안일심을 제거하려면 집착하는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제도하고 수련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주가 정법하는 것이고 대궁이 다시 조합되고 우주의 일체 층차의 중생이 이 일에서 다시 자신의 위치를 놓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명을 위해 온 것이다. 만약 3가지 일을 잘 하지 못하면 수련할 수 없는 것뿐이 아니라 최후에는 후회하고 유감스러운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3가지 일을 해야 하며 인생이라는 이 한 순간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한번의 사고에서 대법의 위대함을 보다

법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고험을 만났다. 퇴근 도중 스쿠터로 한 중년남자를 치였다. 큰 비가 내리는데 가로등도 없는 길을 나는 역방향으로 갔다. 상대방은 우산으로 바람과 비를 막고 가다가 나를 보지 못했다. 당시 나는 전혀 두려움이 없었고 재빨리 그를 부추겨 세우고 어디 다친 데 없느냐, 병원에 가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먼저 집에 가겠다고 했다. 나는 차를 몰고 그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그도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100위안(20만원)을 주면서 회사이름을 알려주고는 만약 내일 불편하면 책임을 지겠으니 찾아오라고 말했다.

이튿날 작업장에서 누가 나를 찾는다고 통지했다. 나는 재빨리 뛰어나갔다. 그 아저씨의 몇 명 친척이 와 있었다. 태도도 좋지 않았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두말없이 아저씨를 근처 병원에 모셔갔다. 병원에서 사진을 찍으니 왼쪽 어깨에 금이 갔다고 했다. 약을 좀 타서 1달간 휴양하면 된다고 했다. 3명의 친척이 모두 휴가를 받아 나왔는데그들에게 어제 병원에 모시고 가야 했는데 못가서 미안하다며 그들에게 하루 일 못한 보상으로 각자에게 100위안(20만원)을 드렸다. 그들은 거절했고 나를 좀 이해해주는 듯했다. 어제 머리를 부딪쳐 코피가 났기에 아저씨가 머리가 불편하다고 했다. 의사는 우리에게 시 병원에 가 CT를 찍어보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병원을 나선 후 아저씨와 그의 친척들은 상의한 후에 “그 돈을 쓰지 말고 우리에게 5,000위안(1,000만원)을 주면 된다. 당신도 직장생활 하는 사람이니 우리도 당신에게 책임지라고 하지 않을 것이고 이후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가 해결하겠다”고 했다. 나는 동의했다. 하지만 당시 그런 돈이 없어 말했다. “지금 돈이 없으니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좀 기다려 주세요.” 그들은 시원하게 답했다. “괜찮아. 당신을 믿어요.” 그들에게 돈을 주고 나는 말했다. “매 주마다 아저씨를 보러 갈게요.” 그 후 나는 매주 아저씨네 집에 가 이야기도 나누었다. 아저씨는 가족처럼 나를 대해주었다. 나에게 맛있는 것도 준비해주곤 했는데 나도 감동했다. 아저씨도 나에게서 감동을 받았다.

나는 간단하게 이 일을 서술했으나 사실 상황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그 사이에 아저씨가 나에게 바오쯔(包子-찐빵)를 사주고 나에게 호두를 깨주고 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생각했다. 만약 대법의 표준으로 이 일을 대하지 않았다면 절대 이런 따뜻한 결과가 있을 수는 없다. 결과를 상상하기 어렵다. 대법은 정말로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사회에 백가지 이로움이 있어도 한 가지 나쁜 점은 없다.

일하면서 법리를 깨달음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비록 당신이 대법제자이지만 당신의 사회 일은 수련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수련이 당신의 사회 일 중에 반영될 수 있다. 바로 이런 관계이다.”[2] 최근 나는 이 법리에 대한 한층의 내포를 깨달았다.

한번은 나의 공구가 사라졌는데 누가 훔쳐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틀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련인의 모든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때로는 당신이 보기에 그 물건이 당신의 것이며 남도 당신에게 이 물건은 당신의 것이라고 알려주지만, 사실 그것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은 바로 당신의 것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최후에 이르러서는 그것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서 당신이 이 일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 내려놓지 못한다면 바로 집착심으로서, 곧 이런 방법으로 당신에게 이 이익에 대한 마음을 제거해 주어야 하는데, 바로 이 문제다.”[3]라고 하신 법을 생각하자 마음은 곧 평온해졌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관념을 바로잡았다. 머리를 숙이니 공구는 상의 주머니에 있었고 조금도 일하는 데 지장을 주지 않았다.

한번은 한 가지 문제를 늘 해결하지 못했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때는 또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몰랐다. 먼저 내려놓자! 나중에 ‘노력을 하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사부님의 법이 생각났다. 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착하지 않았다. 만약 마음을 내려놓으면 문제는 빨리 해결될 것이다.

한번은 작업장에서 상자 열쇠를 열수 없었다. 이것은 사부님이 나에게 어디에서 잘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이다. 어디에 문제가 생겼을까?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나는 줄곧 여자 동료에게 말 거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다른 사람과 교제에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므로 상자를 열지 못한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뜻밖에 자물쇠가 단번에 열렸다. 격동돼 나는 연속 사부님의 점화에 감사했다. 직장에서 이런 일은 수없이 많다.

동료는 수련을 하지 않으며 일을 하고 나는 대법을 수련하며 일을 한다. 하지만 나는 일을 하면서 문제에 부딪히면 심성을 제고한다. 그러므로 나는 수련하고 있다.

최근 프린터가 몇 번 고장이 났다. 처음에 다른 사람에게 맡겨 수리했다. 두 번째는 내가 스스로 수리했다. 세 번째 또 고장이 났다. 이번에는 내게 문제가 있거나 혹은 어느 관을 넘기지 못해 초래된 가상이라고 생각했다.

대법 수련 후 아름다운 감수는 많지만 부끄러워 쓰지 않았다. 늘 자신이 잘 수련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쓴 것이 모두 집착심이 담긴 듯해 걱정됐다. 수련생이 보고 불편해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도 집착심이다. 밍후이왕 교류는 대법을 실증하는 얻기 어려운 기회이다. 서로 교류하고 촉진하는 좋은 자리이다. 우리가 모두 적극적으로 여기에 용해되면 이런 참여는 우리를 더욱 정진하게 할 수 있다.

이상은 나의 개인 수련에서 얻은 것이며 수련생과 교류하려 한다. 부족한 점은 수련생이 지적해 주기를 바란다.

주:[1]리훙쯔(李洪志)사부님의 경문: ‘2013년 대뉴욕지역 법회 설법’[2]리훙쯔(李洪志)사부님의 저작: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3]리훙쯔(李洪志)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문장발표: 2015년 12월 7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신수련생마당>신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2/7/32015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