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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인의 재미

[밍후이왕]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재미가 있고, 신은 신으로서의 재미가 있다. 그렇다면 수련인은 수련인으로서의 재미가 있을 것이다. 수련인으로 말하면 우리는 사람 중의 느낌을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법을 얻을 때 이미 삼계 내에 속하지 않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제외하고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없으며, 이 세상에서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없다.” [1], 이 단락 법은 이미 대법제자의 생명 존재의 의의를 이미 아주 명확하게 정의 내렸다. 어떤 수련생은 이 단락 법을 보고는 압력이 있을 것인데 사실 압력 역시 사람의 관념으로 형성된 상태다. 내가 압력을 느낄 때 처음에는 침대에 누워서 휴식했고, 이후에는 이런 상태가 옳지 않음을 의식하고 나는 즉시 발정념 하면서 사부님께 내가 정과 관념 같은 이런 사람의 물질을 소멸하도록 가지해 주실 것을 청했다. 대법제자는 오직 자비와 정념만 요구할 뿐 정과 압력은 요구하지 않는다. 그 후부터는 더는 압력을 느끼지 않았고 교란을 받지 않으며 조사정법의 일을 잘할 수 있었다. 대법수련은 의미가 높고 원대하여 소도 수련의 ‘고행승’이 아니다. 우리가 세간에서 수련하고 사람을 구하는 것은 대법이 가져다준 아름다움을 펼쳐 보이려는 것이지 늘 세인에게 우리를 언제나 박해와 고문에 연결된 것으로 여기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모두 고통을 피하려 하고 고난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대법의 아름다움, 대법제자의 낙관과 향상, 평화와 지혜, 인간 세상을 초월한 경지를 펼쳐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법에서 각자의 재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심리와 생활 상태만이 우리를 중생 구도란 이 길에서 안정적이고 장구하게 걸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재미란 법공부와 가부좌다. 독서하는 재미는 어려서부터 양성된 훌륭한 습관이다. 왜냐하면, 독서는 바로 각종 사상이 있고 문화와 지혜가 있는 사람의 여러 견해를 경청할 수 있고, 또한 법을 얻기 전 인생의 진리를 찾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법을 얻은 후 법리에 대한 탐구를 좋아하고 호기심이 있던 데로부터 자연히 평온함에 이르렀다. 대법은 배울수록 더욱 놓을 수 없었다. 법 속에서 여행하는 재미는 법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법을 얻기 전에 나는 개성이 비교적 강하고 자아 및 추구가 강렬해 많은 때 마음이 괴롭고 인생에 희망이 없는 것 같았다. 막 법을 얻었을 때 가부좌하면 범속을 초월한 그런 차분한 심리 상태가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고 결가부좌하고 다리를 틀 때 성스러운 장엄함을 느끼면서 시시각각 자신이 이미 속인이 아니라 대법 수련자라고 일깨우곤 했다. 시작에는 가부좌가 얼마나 아프던지 완전히 아프지 않고 입정 상태에 들어갈 때까지 이를 악물고 견지했다. 나에게 압력이 있을 때면, 초조할 때면 나는 가부좌하고 일체를 내려놓는 상태에 진입하는데 집착을 담담히 하고 마음을 조용히 함에 아주 쓸모가 있다. 지금의 가부좌는 나로 말하면 바로 허공 상태에 들어가 휴식하는 것이다.

발정념은 신통을 이용해 사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나는 원래 발정념을 중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닫혀서 수련하기 때문이다. 1선에서 사람을 구할 때 발정념을 중시하지 않아 박해를 초래한 후부터 나는 의식적으로 이런 좋은 습관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관을 넘을 때, 심성이 안정되지 않을 때, 신체 상태가 좋지 않을 때. 발정념 의식을 강화하면 효과가 모두 아주 현저하다. 원래 이런 욕망, 집착과 사상업은 내가 아닌데 왜 그것이 아직도 존재하는가? 다른 공간에 있는 그 영체 때문 아닌가! 그것을 소멸해버리지 않으면 진정한 나에게 미안한 게 아닌가? 발정념으로 청리해 버리니 심신은 모두 개운하고 편안했다. 발정념에서 이익을 보면 수련자의 신심을 증가할 수 있는 동시에 자신의 정력(定力)을 검증할 수 있다. 정력이 부족하면 발정념 때 정신이 다른 데 가게 된다. 정념은 쓸수록 강해지며 사악한 것은 바른 것을 이기지 못하며 또 수련의 재미와 특별함을 느낄 수 있다! ‘수련을 처음처럼’ [2], 그 처음처럼을 나는 이해한다. 바로 좋은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인데 이건 좋은 것이다. 각 층차에는 모두 각각의 내포가 있다. 속인은 좋아지기 몹시 어렵다. 그것은 도덕의 최저선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원수로 되는 시기에는 사람의 내심은 공포에 잠기고 귀착점이 없게 된다. 수련인이 좋아지지 않는 것은 아직도 완전히 법에 있지 않고, 법리에 대해 아직 그렇게 깊은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무한히 박대 정심한 대법의 내포를 체험하려면 절대로 속인 마음으로 사부님 법을 생각하지 말아야만 많은 의혹도 모두 저절로 해체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오직 우리가 법공부를 하기만 하면, 끊임없이 사부님의 무한한 지혜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대법제자가 될 수 있는 생명은 그건 정말이지 좋기로 그지없다. 뭇 신은 모두 부러워하지만 우러러 바라보아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수련생들은 법공부 중에서 재미를 찾아 지혜가 있는 수련자가 되어 사람 중의 그 위사위아 하는 허망을 꿰뚫어 보고 진정으로 생명 존재의 의의와 소중함을 알 수 있기를 바란다.

수련인의 재미를 일단 보유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 마음이 법에 있으면 마음대로 신통을 발휘해 사악을 제거할 수 있고, 가부좌와 착실한 수련 중에서 또 심태가 차분한 수련자가 되므로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사부님 안배하신 길을 잘 걸어간 것이다. 우리 어떤 수련생은 사람을 구하고 나서는 행복감을 느끼는데 그것 역시 무사 무아의 그 경지 중의 재미이다. 사람을 구함에 대한 내 느낌은 속인 경지를 벗어난 상태이기 때문에 사람을 구하겠다는 이런 염원이 있으므로 마음으로 하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구했다면 사부님과 대법의 위덕이 나라는 이 대법 입자를 통해 세간에 보여준 것이고, 구하지 못했다면 아직 자신의 심성 제고를 기다리고 있다. 이 심태는 마땅히 평화적이어야 하는데, 나는 원래 너무 상대를 구하려는 마음에 집착해 사당 문화에 깊이 중독된 세인에게 우리가 마치 이 일을 하면 무슨 좋은 일이 있고 무슨 목표가 있어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게 해서 마음에 거부감이 들게 했다. 내가 남을 구하는 데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후 속인은 나의 평화와 이지적인 상태에서 핍박과 강요가 없는 선의를 느끼고 경계심을 버리고 삼퇴를 고려했다. 사람을 구하든, 발정념을 하든가부좌를 하든 모두 자신의 수련 상태를 체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일체 제고의 기초가 바로 법공부다. 법공부 가운데서 생명을 체험할 수 있고 우주 존재의 오묘함과 수련인의 재미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다.

대법제자의 마음은 틀림없이 충실하고 행복할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법이 각 층차의 생명에 모두 각자 생명 존재의 동력과 재미를 개창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주 고생스럽다고 느껴질 때, 그건 우리의 사상 경지가 사람과 신 사이에 걸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물건을 내려놓지 못하면서 신의 좋은 점도 가지려 하는데, 전일하지 않는 이런 것은 완정하고 통일적인 가치관이 없으므로 마음은 필연적으로 의기소침을 초래할 것이다. 수련인의 가치관과 속인의 가치관은 다르다. 수련인에게는 세 가지 관계만 있는데, 사부님과의 조사 정법 서약 관계, 수련생과 협력하는 상호 관계, 세인 구도와 피구도 관계이다. 그렇다면 속인으로 말하면, 자신이 한 큰 국제 회사에 들어가 출근한다면 상사가 분배한 임무를 잘하지 못하면 자신의 문제만 검토하고 상사를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당신을 핍박해 출근시킨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동료와 모순이 생기면 방법을 찾아 해결하려 할 것인즉 누구도 간극(間隙)을 지니고 일하기는 싫어한다. 그것인 심신 건강과 업무 진행에 영향 주기 때문이다. 월급을 탄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가정 구성원이 당신의 고생스런 감당을 어떻게 느끼는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모두 우리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와서 조사정법 하고 있는데 자기가 착실히 수련하지 않아 조성된 손해로 사부님을 원망할 수는 없다. 수련생 사이에 생긴 간극은 제때에 해결해야만 장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사람을 구도할 때 상대의 이해 접수 여부는 모두 우리의 사명과 책임이다. 관계가 순조로우면 문제에 직면해도 핵심을 잡을 수 있고, 이지가 분명하게 잘 처리할 수 있으며, 지혜도 따라서 증가할 것이며 재미도 모두 그 안에 있을 것이다!

이상은 현 단계에서의 나 개인의 깨달음으로서 부족한 곳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2015년 뉴욕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9-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5년 12월 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2/8/3199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