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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송장이 새 삶을 얻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올해 65살이고 동북의 한 농촌에서 살고 있다. 나를 아는 사람은 내가 60여 세 사람 같지 않다고 한다. 피부가 부드러운 데다 희고도 불그스레하고 주름살이 없으며 자전거를 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농번기에는 또 외조카에게 채소도 사주고 밥도 해주는 것이 마치 50대 같다고 한다. 하지만 젊었을 때의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는가? 등에는 혹이 자라고 팔과 다리는 모두 굽었으며 일 년 내내 약을 먹어 얼굴은 병들어 죽은 병아리 같은 색깔이었고 말라서 피골이 맞닿아 사람들은 나를 ‘산송장’이라고 불렀다.

나는 21살 때 당시 불치병이라고 했던 결핵에 걸렸는데 농촌에서는 폐병이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폐병은 치료하지 못한다면서 치료해주지 않았다. 당시 의사는 더구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석 달이 지나자 병은 갈수록 심해져 장시간 고열이 나서 그저 신음만 냈다. 배는 불어나 두드리면 나무를 두드리듯 둥둥 소리가 났고 피부는 새카맸으며 장작개비처럼 말랐다. 친정에서 데려다 병원에 가서 검사하니 이미 결핵성 흉막염, 복막염, 장결핵, 신장결핵으로 발전해 배 안은 모두 누런 물이 꽉 찼다. 당시는 1970년이라 자전거, 손목시계가 아주 귀했다. 삼촌은 자전거와 시계를 팔아 내 병을 치료해 주었기에 그래도 살아나게 됐다. 비록 죽지는 않았으나 조밥만 먹을 수 있을 뿐 내내 클로로마이세틴과 위장약을 먹어야 했으므로 신체도 망가져 장시간 설사를 했다.

25살 그해에는 등과 허리가 아팠고 음력 초하루 날에는 허리가 아프고 펼 수 없어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시댁은 그래도 치료해 주지 않았고 전남편은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중에 배는 5달 임신부만큼 부풀어 올랐다. 전남편은 친정의 압력에 못 이겨 결핵 병원에 가서 검사했는데 골결핵 말기로서 뼈까지 다 화농해서 치료할 수 없었다. 그때 의사가 말했다. “당신의 머리카락, 손톱에만 결핵균이 없습니다. 치료한다 해도 낫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눈도 멀고 귀도 다 먹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나는 치료해선 뭘 하나 생각하고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친정까지 아직 30여 리 남았을 때 내가 친정에 가겠다고 하니 전남편은 나를 바래다주지도 않고 나를 차에 버려둔 채 자기 혼자 돌아갔다. 기사와 승무원이 나를 데려다주었다.

이번에 나는 2년 9개월 마비됐고 등에는 혹이 자라 허리를 펼 수 없었다. 70여 세인 아버지는 나에게 각가지 민간 처방을 다 해 치료해 주었고 심지어 산속의 복숭아 나무껍질을 달여서 나에게 마시게 했다. 그건 독이 있었지만 살기 위해선 마셔야 했다! 28살이 돼서야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었고 장기적으로 각종 약물을 복용했다. 심장이 늘 두근거리고 빈혈, 저혈압, 여름에는 어지럽고 겨울에는 머리가 아팠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폐인이었다. 이 해에 8살 아들이 아무런 징조도 없이 죽었고 가을에는 전남편이 나와 이혼했다. 신체적 고통과 아들을 잃은 고통이란 이중 충격 하에서 나는 힘들었지만 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는 마치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1979년 나는 또 재혼했다.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나에게 관을 사 주고 나를 매장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나는 간신히 37살까지 살았는데 또 대엽성 폐렴에 결려 기침만 하면 토했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언니는 내가 곧 죽을 것을 알고 어머니와 상의해 상복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또 죽지 않고 살아났다.

45살 때인 음력 2월에 갑자기 두 다리를 쓰지 못해 걸을 수 없었다. 땅에 내려설 때면 쪽의자를 짚고 두 발짝 걷고는 앉아 버렸는데 두 다리가 연약하고 무력했다. 이는 마비될 징조였다. 이번엔 정말 나는 조급했다. 이는 구들에 마비된 채 눕혀놓고 썩혀서 죽이려는 것이 아닌가, 가산을 탕진해서라도 치료하자. 치료되지 못하면 나는 곧 방법을 찾아 죽어버리자. 이번에 나는 죽을 생각을 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때 우리 진(鎭)에서는 기공 붐이 일고 있었는데 누가 나에게 한 가지 공법을 배우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그들은 늘 돈을 요구했고 누구의 병이 나았다는 말도 못 들었다. 병이 낫지 않았는데도 늘 돈을 요구했으므로 나는 가지 않았다. 나는 사기 치는 것이므로 배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외조카 사위가 우리 집에 와서 말했다. “엄마가 당신에게 파룬궁을 배우겠는가고 물어보라 했어요, 엄마는 하루 배웠는데 아주 좋다고 해요.” 나는 파룬궁이 돈을 받느냐고 물었다. 그는 받지 않는다면서 무료로 공을 전한다고 했다. 나는 듣고 나서 이건 참 좋구나, 돈을 받지 않는 걸 봐서 틀림없이 사람을 속이진 않을 것이다, 돈을 받지 않는 공법은 꼭 좋을 것으로 생각하고는 확고하게 말했다. “배우겠어, 내일 갈 거야! “

이튿날 나는 일찍 일어났는데 심정이 유달리 좋았다. 그저 기쁘기만 하여 춤추고 노래하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아침밥을 지었고 또 돼지 풀 두 단을 훑어 왔다. 반년 동안 밥도 못했던 내가, 죽음을 기다리던 내가 하룻밤 사이에 다른 사람으로 변했고 마치 무슨 기쁜 일이 있을 것 같아 몸이 가볍고도 유쾌했는데 마음속 그 기쁨이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친정어머니와 함께 3리 밖에 있는 연공장으로 갔는데 놀랍게도 힘들지 않았다. 나는 아직 연공하지도 않고 그저 대법은 좋은 것으로 여겼는데 사부님께서 나에게 관여하시어 내 신체를 무병 상태로 청리해 주시어 모든 증상이 다 없어지게 하셨는데 그야말로 온몸은 병이 없고 가벼웠다.

연공 4일째 날에는 사부님께서 내 몸을 정화해주셔서 이틀 밤낮 설사했으나 괴롭지는 않았고 정신은 아주 좋았다. 배 안은 텅텅 비었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바로 이렇게 25년간 땡땡 부풀어 있었던 배가 꺼지고 부드러워졌다.

법공부와 연공을 통해 서서히 모르는 사이에 곱사등이 펴지고 팔다리도 모두 펴졌다! 나는 25년 간 앓으면서 수없이 많은 약을 먹어도 병이 낫지 않았는데 우리 사부님께서는 한 푼 돈 받지 않으시고 내 병을 고쳐 주셨으니 그야말로 불법(佛法)은 무변(無邊)했다! 나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시어 나, 이 산송장에게 새 삶을 얻게 해 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부님께 큰절 올립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문장발표: 2015년 11월 24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1/24/3195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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