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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 자비에 대한 옅은 깨달음

글/ 중국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수련하기 전 무의식중에 ‘자비’라는 두 글자를 접촉했을 때 비록 그 내포는 몰랐지만 아주 온화함을 느꼈었다. 글자 표면에서의 감수는 지고무상의 관심 즉, 큰 사랑이라는 느낌이었지만 구체적으로 뭘 가리킨 것인지는 몰랐다.

수련에 들어선 후 “만약 이 정을 끊어버리지 못하면 당신은 수련하지 못한다. 사람이 이 정에서 뛰쳐나왔다면 누구도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며, 속인의 마음은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자비이며, 더욱 고상한 것이다.”[1]라고 하신 사부님의 정(情)과 자비에 대한 법을 듣고도 알듯 말듯했다. 왜 정에서 뛰쳐나와야 자비가 나올 수 있을까? 자비와 정의 내포는 도대체 무슨 본질적인 구별이 있는 걸까?

장기간의 수련과 바른 깨달음에서 나는 차츰 내가 있는 층차에서 펼쳐진 정과 자비의 다른 내포를 알았다. 정은 위사(爲私)이고 조건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다. 정은 정(正)과 반(反)의 구분이 있다. 소위 희, 노, 애, 락은 모두 정의 체현이다. 때문에 정은 감성적이고 불안정하고 허망하며 사람이 장악하고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는 삼계 내의 물질이며 저층차의 것이지만 자비는 다르다. 자비는 남을 위한 것이고 조건이 없으며 영원하며 표현형식상 영원히 평화와 이성을 체현하고 있다.

십몇 년 동안의 수련에서 정(情)의 해로움을 점차 의식하고 담담히 내려놓아 자비를 수련해낸 과정은 완만했다. 수련을 총결산함과 동시에 자신이 더 정진하도록 독려하고 수련의 발걸음을 가속화하여 마지막 제한된 시간에 철저하게 명, 리, 정을 버리고 큰 자비심을 수련해내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하고 자신의 서약을 더욱 잘 실현하고자 이 글을 쓴다.

정에 집착하는 것은 고통을 선택한 것과 같다

법을 얻은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인생에서 첫 번째 감정적인 좌절인 실연을 겪었다. 나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남자친구가 갑자기 나를 떠났기 때문이다. 나는 놀랍고도 막연해 이 모든 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미 수련에 들어선 나였기에 이것이 내 수련에서 돌파해야 할 정이라는 것을 알고 낮에는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다그쳐 법공부, 심성 수련, 심성 제고하기에 노력했고 저녁이면 연공장에 가서 단체 법공부와 연공을 했다. 매일 이렇게 했는데도 조용한 야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두 사람이 사귈 때 전경이 영화처럼 눈앞에 한 막 한 막 나타나 지워버릴 수 없었으며 고통이 잇따랐고 늘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속으로 무수하게 동일한 문제를 물었다. 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세상에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또 있는가? 그때에도 은연중에 자신은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정을 멀리하고 고통을 멀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난 수련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해내기는 말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며 난이도가 아주 컸다.

사부님의 ‘진수’를 외우는 것이 매일 나의 필수 과제였는데 심지어 하루에 몇 번씩 외웠다. 나의 심신이 완전히 법에 용해돼야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법의 가르침이 없다면 이 고비를 정말 넘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후에 지금 남편을 알게 됐고 결혼해 아이를 가졌다. 결혼한 후 남편은 나를 아끼고 관심했으며 아이와 가정을 사랑했다. 나는 속으로 마침내 믿을만한 사람을 찾아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나 역시 이 감정을 아주 소중히 여기면서 그와 한마음 한뜻으로 잘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2004년 어느 날, 난 컴퓨터에서 무의식중에 남편과 전 여자친구의 대화 기록을 보았다. 그들은 옛정이 도진 것이다. 난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그 후 그와 얘기를 나눴는데 그는 이후부터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뒤에서 줄곧 몰래 연락했다. 약속하겠다는 말을 여러 번 했지만 행동은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녀와 얘기만 나눌 뿐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후부터 나는 완전히 믿음을 잃었다. 자신이 두 배신자를 만나 정말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이 결혼을 끝내고 싶었지만 내가 수련인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이는 또 정에 대한 시련 혹은 내가 이전에 정에 대한 시련을 잘 넘기지 못해 사부님께서 또 이 관을 배치하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체 과정에서 사람마음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고통만 느꼈고 의기소침해져 정말 다시는 남녀 정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 때 늘 끝없는 고독함을 느꼈고 자신이 고아인 것 같았으며 아무도 나의 고통과 마음을 진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묘현과 마하가섭이 도를 닦는 특별한 부부가 되어 공동으로 정진하며 결국 정과를 얻었는데 나는 뜻이 맞는 남편을 찾지 못해 장기간 이런 것 때문에 소침하고 우울해 있다니, 이런 상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파하기 어려웠다. 그때 늘 사부님의 ‘홍음2’ 중의 시를 외웠다. 그 중 ‘매화’ 중의 두 마디 “연일 내리는 눈비(雪雨)는 신불의 눈물이라 매화가 돌아오길 바라네”[2]를 외우면서 마음의 위안을 느꼈다. 그렇다, 내가 인간세상의 모든 사람의 버림을 받는다고 해도 그게 뭐 대순가? 신불이 나를 버리지 않았고 신불이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사부님의 법신도 시시각각 나를 보호해주시는데 나는 고독하지 않다. 이 일념이 나를 도와 그 간고한 세월을 넘게 했다.

2. 정을 버려야 자비심이 나올 수 있다

이상 두 가지 경험에서 나는 정이 상처를 받았을 때의 고통을 알았다. 갑자기 이 세상 사람이 다 믿을 것이 못 되고 사람은 진심이 없는 것 같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진(眞)’인 줄 알고 진을 수련하기가 가장 쉬우며 선(善)과 인(忍)은 수련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진’도 아주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진’ 중에는 마음에 잡념이 없는 순정하고 성결한 뜻이 내포돼 있고 또 영원히 외부에 좌우되지 않는 금강불괴의 내포가 포함된다는 것을 체험했다. 속인 속에서 왜 서약을 굳게 지킬 수 없는가? 진을 행하지 않고 한 말을 애들 장난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이 표준으로 자신을 돌이켜 보니 마음이 불안했다. 속인의 도덕으로 가늠하면 자신은 떳떳하지만 법의 요구에 따르면 내가 말한 모든 말이 스스로 정확하다고 여겨도 그 속에 사심 잡념이 없단 말인가? 정말 백퍼센트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인가? 속인과 접촉하거나 중생 구도 중에 시종일관하게 정념을 가지고 움직이지 않았는가? 아주 오래 전에 사부님과 맺은 서약을 백퍼센트 실행했는가?

이렇게 안으로 찾아서야 자신이 진을 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근원을 따져보면 ‘정’이 요동을 부린 것이다. 속인의 정 속에는 ‘진’이란 내포가 없기 때문에 정은 쉽게 변하는 것이다. 자고로 정은 치정에 빠진 무수한 남녀를 만들었지만 아무도 이 ‘정’이 무엇인지를 보아내지 못했다. 내가 상처 받을 수 있는 것 역시 자신이 여전히 정(情)의 경지에 있어 그것의 제약, 속박을 받기 때문이다. 희, 노, 애, 락 모두 집착이며 모두 사(私)이다. 사를 제거하지 않고 어찌 진정하게 우주의 진(眞)ㆍ선(善)ㆍ인(忍) 법리에 동화될 수 있겠는가?

이 한 층 이치를 깨달은 후 나는 사부님께서 왜 우리에게 정에서 뛰쳐나와야 한다고 알려주셨는지 알았다. 다시 남편을 보는 눈빛도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그는 중생 중의 일원이기 때문에 반드시 삼계 내 변이된 정의 요소에 제약됐을 것이고 내가 상처 받은 원인은 내가 부부 정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난 여태껏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아 도덕상 무슨 잘못은 없지만 수련의 각도에서 볼 때 우리는 한 층차에 있는 것으로 속인의 정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쌍방 대립이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정 속에 있지 않으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그의 언행이 나에게 상처주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나는 연민의 마음으로 그를 대해 그를 구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자비에 대한 나의 옅은 깨달음이다. 그래서 나는 내 수련을 반대하지 않고 또 이미 삼퇴한 남편에게 다시 상세하게 진상을 알리고 대법에서 남녀의 정에 대한 요구를 알려주었다. 색욕에 대한 마음을 끊지 않으면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을 알려줬다. 지금 사회도덕 수준이 일사천리로 떨어지고 있는데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순결을 지켜 세파에 따라가지 말고 대법에서 말한 대로해야 복을 받을 수 있고 평안할 수 있다. 나는 그에게 대법 서적을 보게 하고 수련생이 쓴 이 방면 수련 심득을 그에게 주어 천천히 읽어보게 했다. 차츰 남편은 점점 대법을 인정하고 대법 수련으로 걸어 들어왔다.

3. 하면서 구하지 않아야 마음의 용량이 커질 수 있어

수련의 층차가 제고되자 부부 정이 점차 약화되고 심지어 소실됐다. 아울러 자비심이 끊임없이 커져 두 사람 관계는 점점 조화로워졌다. 나는 이는 사(私)를 제거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이 역시 정을 제거해야 자비를 수련해 낼 수 있다는 법리를 실증한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는 여전히 심성 고비가 끊이지 않았다. 수련인으로서 진정하게 자비심을 수련해 내는 것은 절대로 어떤 개인 관계에서만 체현된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다 자비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일보에 도달해야 자신의 수련으로 법을 실증할 수 있고 중생 구도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내 주위 사람은 각양각색으로서 심성이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본성이 선량해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고, 어떤 사람은 신랄하고 매몰차 남을 중상하고, 어떤 사람은 제멋대로 떠벌리면서 손윗사람도 안중에 없다. 어떤 사람은 하자는 대로 순종하면서 아첨하며, 어떤 사람은 세상물정을 잘 파악하며 대인관계나 처세에 능하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이는 동료, 친구이고 어떤 사람은 친척, 가족이다. 장기간 접촉하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그들을 이상 몇 부류로 나눴다. 나는 속으로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을 좋아하고 접수했으며 이 유형 사람에게만 진상을 알리고 다른 사람은 모두 범위 밖의 사람으로 간주하면서 부득이한 정황에서만 그들을 아는 체했다. 만나면 겉으론 예의로 대했지만 속으로 멸시하고 배후에선 늘 이러쿵저러쿵 뒷담화를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부정적인 요소에 이끌리지 않고 바른 면에 서 있다고 여기면서 이렇게 해야 난잡한 환경에서도 깨끗이 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현실 속의 관(關)과 난(難)은 이 때문에 없어지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상유심생(相由心生)의 법리를 말씀하셨다. 자신의 선량하지 않는 공간장에 어찌 아름다운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실 나는 늘 다른 사람이 나를 악담하여 상처준 것 때문에 그 속에 엉켜 있었고 정신, 행위, 물질적으로 장기간 대가를 치렀는데 상응한 보답을 받지 못해 불평하고 불만스러워했다.

사부님께서는 ‘2014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당신에게 그런 마음이 있으므로 당신의 마음이 비로소 움직이며, 당신에게 그런 마음이 없으면 마치 바람이 불고 지나가듯 당신은 전혀 감각이 없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당신이 살인방화를 하려 한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듣고 아주 재미있다고 할 것인데(사부님 웃으심), 이 말이 가당키나 한가? 웃고 지나가 버린다. 전혀 그것을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그 마음이 없으므로 이 말이 당신을 움직일 수 없다. 그 마음이 없으므로 당신에게 닿지 못한다. 당신의 마음이 움직였다면 바로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당신의 마음이 확실히 매우 못마땅해 하면 이것이 또 작지 않다는 것을 설명한다. (박수) 그럼 마땅히 수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단락 법은 마치 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순간 자신에게 잠재적인 깊은 집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명(名), 리(利)를 구하면서 착한 일을 하고는 다른 사람이 은혜에 감격해야 하고 대가를 치르고 보답을 바란 것이다. 누구의 행위가 나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를 못마땅해 하면서 속으로부터 배척했다. 이는 선량한 것이 아니며 위선이고 거래인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자비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하며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모두 자신한테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설령 다른 사람이 우리를 욕하고, 우리를 때렸을지라도 우리는 모두 자신에게서 찾아야 하는데 자신의 어느 면이 잘못돼서 조성된 것이 아닌지 찾아야 한다. 이런 모순의 근본원인을 찾는 것이 사(私)를 버리고, 자신의 집착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당신 개인수련 중에서 대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는 데까지 마음을 크게 먹어야 하는바 당신의 적을 용서하는 것을 포함해서다. 왜냐하면 당신이 말하는 적은 인간이 구분한 적이며, 사람이 이익을 위해서 구분한 것이지 신의 행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요구도 높다. 신이 어찌 인간을 적으로 여기겠는가?”

오래 동안 마음에 늘 행복감이 있었다. 내가 행운으로 법을 얻어 호탕한 불은(佛恩)에 젖어 있었지만 머리를 숙이고 주위 모든 사람을 관용하고 자비로 용납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고층 생명이 나를 용납해주기만 바랐다. 전 우주를 용납할 수 있는 사부님의 자비에서 나는 이 우주 중의 일원이 되어 용납된 온화함을 감수할 뿐 자기 우주 중의 낮은 데에서 높은 데까지의 심성이 같지 않은 중생을 용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내가 그들의 주가 될 자격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주가 될 흉금과 도량이 없었다. 나의 이기심, 질투, 좁은 마음이 항상 나를 자비의 경지로 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수련인의 사상, 신체의 용량, 체적이 모두 커진다. 때문에 어떤 때 당신들이 참장(站樁)을 할 때, 아주 높고 크게 변했음을 느낄 수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아주 작게 변했음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수련된 그 쪽의 신체(身體)는 크게 변할 수도, 작게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련인의 신체는 확실히 크게 변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층에서 당신은 우주진상에 대한 인식을 감당해 낼 수 없다. 수련 중의 신체는 한 공간이 한 공간에 비해 크다. 여기에 앉아 있는 나의 육신은 바로 당신들이 본 것처럼 이만큼 크지만, 나의 저쪽 신체는 하나가 하나에 비해 크고 하나가 하나에 비해 큰데, 크기로는 여기에 앉아 있는 천목이 가장 잘 열린 사람도 나의 이 발가락 아래밖에 보지 못하며 발가락 위의 것을 보지 못한다. 이것도 아직 가장 큰 것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무엇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며 사제지간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당신들에게 말하자면 수련인의 신체는 확실히 체적이 커진다. 내 기억에 인도 요가에 그림 한 폭이 있는데 박가범(博伽梵)이 그의 제자에게 ‘당신이 보라, 일체 신(神)들은 모두 내 신체 속에 있다.’라고 말하는 내용을 그렸다. 그림 중의 뭇 신들은 모두 그의 신체 속에 있었다. 수련의 목적은 바로 신(神)으로 수련 성취되는 것이다. 신(神)의 크기는 바로 층차의 크기이며 과위의 고저이다. 그리하여 신체(神體)로 하여금 과위 층차에 부합되게 하는 것이다.”

이 단락을 법을 배우고 나는 깨달았다. 수련인의 사상, 신체 용량이 커질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용량을 키웠기 때문이다. 마음의 용량을 키우려면 하면서 구하지 말고 무조건 포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고도 구하지 말아야 마음의 용량이 커질 수 있다. 마음의 용량이 커야 자비심이 커지며 더 많은 중생을 포용하고 구할 수 있고 신체도 더 크고 넓은 우주 범위를 포괄할 수 있으며 더 높은 과위를 얻을 수 있다.

법리가 통하니 주위 모든 사람이 다 눈에 거슬리지 않았고 그들을 몇 개 부류로 나누지 않았다. 그들이 고달픔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그들 모든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사존의 자비로운 점오에 감사드린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시사: ‘홍음2-매화 원곡’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오스트레일리아법회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휴스턴 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5년 11월 17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1/17/31915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