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대법제자
[밍후이왕] 장쩌민 고소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의 심리변화 과정에 대해 글을 쓰고 싶었지만, 잠시 고소하지 않는 수련생에게 방해될까 봐 몇 번이나 썼다가 결국 포기했다. 최근 법학습 소조에서 수련생과 사부님의 경문 ‘정법시기 대법제자’를 다시 학습할 때 마치 무거운 망치로 방할 한 듯 단번에 깨달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장쩌민 고소 열풍은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중국에서 수천만이나 억에 달하는 대법제자 가운데 고소에 참여한 사람은 겨우 십몇 만 명밖에 안 된다. 오늘까지 박해를 반대하고 중생을 구도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는 대법제자가 장쩌민을 고소하고 있는 이 정법의 관건적인 시각에 무슨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는가?
박해 초기를 생각해보면 대법제자는 생사를 무릅쓰고 용감하게 베이징에 상방하러 갔고, 갇히거나 혹형, 설령 죽임을 당해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반년이나 장쩌민 고소 무대가 열려있지만, 고소해야 할 주역이 왜 아직도 등장하려 하지 않는가? 최근 이 문제를 가지고 몇 명의 수련생과 교류했다.
A 수련생은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모두 법리에서는 명백하기에 다들 마음으로는 알고 있다. 바로 박해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감히 고소하지 못하는 것이다.” 동시에 A 수련생은 또 사례를 들면서 장쩌민 고소를 걱정했다.
A 수련생은 “그해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가서 현수막을 펼칠 때 한 수련생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수련생에게 이끌려 갔다. 그 결과 다른 수련생들은 모두 안전하게 돌아왔지만, 이 수련생은 결국, 박해를 받았다. 검은 소굴에서 나올 때 줄곧 병업 상태에 있다가 결국 병법가상으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A 수련생은 또 “만약 이 수련생이 천안문광장에 가서 현수막을 펼치지 않았다면 병업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수련생은 병업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줄곧 속인의 애정 CD를 보았다. 나와 다른 수련생이 그의 집에 가서 그를 도와 이런 색정 CD를 소각해버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구세력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나도 그런 감정이 있으므로 그 말을 듣고는 놀랐다. 비록 이미 고소했지만, 만약 그로 인해 박해를 감당하지 못해 떨어지면 고소 안 하기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또 십몇 년의 반박해로 대법을 실증하는 일을 그렇게 많이 한 게 허사가 아니고, 고소하지 않으면 고소한 수련생보다 층차가 떨어질 뿐 삼계를 벗어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큰 법이 어찌 삼계를 벗어나지 못하겠는가? 나는 장쩌민을 고소한 후 근심 걱정하지 않고 기다리면서 사부님을 따라 원만하여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B 수련생도 이미 고소를 했다. 그는 고소한 후 다시는 유감없이 할 만큼 다 했기 때문에 정진하는 제자가 아닐지라도 반드시 삼계를 벗어날 수 있다면서, 다시는 윤회의 고통을 받지 않는 원만에는 문제가 없으며 앞으로 수련하든 안하든 현 상태를 유지해 떨어지지 않으면 된다고 말했다.
왜 십몇 년을 수련하면 대법제자라고 하는가, 자신의 개인 수련상태만을 고려한다면 모두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 이유는 한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바로 원만에 대한 집착이다. 원만을 위해 수련하고 구세력이 배치한 위사위아(爲私爲我)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상상해보자. 만약 수련에서 우리에게 원만의 과위가 기다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사를 무릅쓰고 용감하게 베이징에 상방하러 가서 대법을 위해 바른말을 할 수 있을까? 또 생사를 내려놓고 ‘9평’을 전하고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도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고소에 참여하지 않아도 원만에는 영향을 받지 않고 다만 층차가 다를 뿐이니, 어디까지 수련하면 어디까지라고 생각해서 고소하지 않는 게 아닌가?
정말로 그렇다면 그것은 대법을 이용하는 게 아닌가?
이상은 나의 이 층차에서 깨달은 것으로 수련생이 정말로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에 사부님의 한 단락 법으로 서로 격려하련다. “대법제자의 위대함은 당신들이 사부가 정법하는 시기와 함께 있으며 대법(大法)을 수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한 것이 이미 대법제자로서 자격이 없을 때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이 천지개벽에도 없었던 자비와 불은호탕(佛恩浩蕩) 하에서도 잘하지 못한다면 어찌 또 다음 한 차례 기회가 있을 수 있겠는가? 수련과 정법은 엄숙한 것이다. 이 한 기간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은 사실 바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이다. 이 한 기간은 길지 않을 것이지만 도리어 부동한 층차의 위대한 각자(覺者), 불(佛)·도(道)·신(神)과 부동한 층차의 주(主)의 위덕을 단련해 낼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을 느슨히 하는 한 수련자에게 이미 굉장히 높은 층차에서 하루아침에 망가지게 할 수 있다. 제자들이여, 정진하라!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일체는 모두 당신들이 대법(大法)을 실증하는 과정 중에서 생긴다. 당신들의 서약(誓約)은 당신들 장래의 증거가 될 것이다.” [1]
개인의 깨달음이니 타당하지 않은 곳은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더욱 많은 우리 대법제자 모두 ‘정법시기 대법제자’ 이 경문을 다시 학습하여 진정으로 대법에 동화하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정법시기 대법제자‘
문장 발표: 2015년 10월 19일
문장 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 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0/19/3177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