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수련 과정 중 순정하지 않은 마음을 똑똑히 인식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아마 아무런 주저 없이 파룬따파는 나의 믿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비록 십여 년간 조사정법을 했지만 깊은 마음속으로부터 우리는 정말로 사부님과 대법을 믿는가?

나는 98년에 법을 얻었는데 불법 노동교양을 선고받았었고 한때 집을 떠나 밖에서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걸어온 수련의 길을 돌이켜 보면 크게 곤두박질해 몹시 후회한 적도 있고 오랫동안 자비롭고 고생스럽게 구도해주신 사부님께 무한히 감사한 적도 있으며 정체상 몇 년간 많은 수련생이 구세력의 배치를 제거할 수 없어 내부 수련 상태가 혼란해 가슴 아파한 적도 있다. 아래는 일부 수련상태에 관해 간단히 자신의 견해를 말해보려 한다.

장쩌민을 고소하는데 참여하는 과정 중 순정하지 않은 마음

우리 지역에 이런 일이 있다. 한 곱사등이 노년 여 수련생은 습관적으로 주택단지 헬스기구에 가서 허리를 늘렸다. 최근에 장쩌민을 고소하는데 참여했기에 오래된 허리가 펴져 키도 훨씬 커 보여 비할 바 없이 흥분한 동시에 사람들에게 허리가 펴졌다고 말했다. 그 결과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의 허리는 또 곱사등이 상태로 돌아왔다. 이 수련생은 비록 오랫동안 수련했고 아마 세 가지 일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장쩌민을 고소하는 데도 참여할 수 있었지만 긴 세월의 수련 과정 중 법에 대한 바른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마음속에서 병을 고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근본적인 집착을 포기하지 않았고 수천 년간 뼛속까지 형성된 사람의 이치를 개변하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수련 중에서 당신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착실하고도 착실하게 제고함으로써 내재적으로 거대한 본질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힘에 의거하고 외재적인 강대한 요소의 도움을 빌린다면, 이는 영원히 당신 사람의 본질을 불성(佛性)으로 전변시킬 수 없다. 만약 당신들이 사람마다 모두 내심에서 법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위력이 끝없는 법의 체현 ― 인간 세상에서 강대한 불법(佛法)의 재현(再現)이다!” [1], 라고 말씀하셨다.

올해 5월에 장쩌민을 고소하기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수련생의 각종 마음에 따라 각지에 대응되는 각종 표현이 나타났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으로 고소했고, 어떤 사람은 관망세를 취했으며,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방관했고, 어떤 사람은 시간에 집착했으며, 어떤 수련생은 천목으로 무엇을 봤다거나 몇 월 며칠에 대 체포가 된다느니 내일은 또 정부가 방문한다니 등등의 소문을 옮겼다. 더욱 심한 것은 평소 수련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수련생이 요행심을 품고 뒤떨어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장쩌민을 고소하는 데 참여해 놓고 몹시 흥분해 마치 만사대길이 된 듯 원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십여 년 간난신고를 겪은 대법제자로서 마땅히 장쩌민을 고소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고 정법 노정이 필연적으로 걸어야 하는 한 걸음이자 또한 우주 역사의 필연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장 마귀를 고소해야 한다. 우리의 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 일을 통해 더욱 많은 중생, 특히 박해에 참여한 공안, 검찰, 법원 공무원들이 반성하고 깨어나게 해 구도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 특히 뒤떨어진 수련생이 따라오고 또 한 번 사람을 구하는 위덕을 설립해주시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수련생은 장쩌민 고소를 사람의 일로 생각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가늠해 마음가짐이 안정하지 못했다.

장쩌민을 고소하는 것은 다만 조사정법의 한 가지 과정일 뿐이다. 장쩌민을 고소하는 데 참여했다고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도달해야 하는 표준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수련하는 시간의 긴박감, 중생을 구도하는 긴박감을 느껴야 한다. 수련은 엄격한 표준이 있는 것이고 극히 엄숙한 것인데 어찌 사람의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대할 수 있겠는가?! 장쩌민을 고소하기 전과 후 여러 사람 마음이 있는 수련생은 빨리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 진정으로 사부님의 정법 노정을 따라가길 바란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지역 다수 수련생, 자신도 포함해 보편적으로 안일하고 게을렀다. 법을 대조하고 어디에 큰 누락이 있고 어디에 부족이 존재하면 제때에 바로 잡아야 하고 아직 어떤 중생을 구하지 않았으면 바싹 사부님의 정법 노정을 따라가고 자신을 잘 연마하고 더욱 많은 중생을 구해야만 근본이다.

우리가 대법을 위해 무엇을 했든 설령 생명을 잃더라도(물론 우리의 생명은 조사정법을 위해 온 것임) 우리가 대법을 위해 무엇을 감당한 것이 아니며, 반대로 사부님의 호탕한 보호 속에서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사부님께서 우리의 향상하려는 마음을 보시어 우리에게 성취를 주시는 것이고 신 우주의 미래를 성사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스승으로 삼고 유명인을 숭배하다

사람을 따라 배우고 법을 배우지 않으며 어떤 ‘유명인’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런 현상은 각지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명인’에 대한 숭배가 얼마나 크면 의존심이 그만큼 크고 상응하게 기대와 요구가 그만큼 크다. 일단 그 요구를 만족할 수 없다면 실망과 원망도 그만큼 클 것이다. 많은 수련생의 의존심은 상응하게 협조인, ‘유명인’에게 매우 큰 마난을 가져다 줘 잇따라 그들은 심한 박해를 받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한다. 반대로 그 ‘유명인’들도 일부 수련생이 성숙으로 걸어가는 길을 방해하기도 한다. 의존하는 것과 의존 받는 것은 모두 대법의 대도무형의 길을 빗나간 것이고 구세력의 수련형식에 빠져 자체로 소모하고 마난도 많아진다.

어느 지역에 집을 떠나 유랑하는 ‘전임’ 협조인이 있는데 몇 년간 구세력의 배치를 타파하고 자신의 수련의 길을 바로잡지 못했으면서도 자신이 대법을 위해, 정체를 위해 집을 떠나 유랑한다고 생각한다. 장기적으로 각지 시, 현에서 ‘지도’하는 일을 했고 몇 년간 지속해서 100명이 넘는 ‘법회’를 개최했으며 장기적으로 개인 수련의 기점에서 문제를 인식했고 매우 많은 큰 원칙상 문제, 심지어 난법 현상에 대해서도 법리가 똑똑하지 않았다. 잘못 이끌어 얼마나 큰 사건이 일어나고 정체에게 얼마나 큰 손실을 가져다줬어도 교훈을 정리하지 않았고 미안한 마음은 더욱 없었으며 높이 앉아 내려다보고 ‘정체’를 틀어쥐었고 수련생이 엄중하게 경고하면 중한 것을 피하고 경한 것을 취하며 자기 고집대로 했다. 그리하여 몇 년간 성(省) 내 정체 형세를 ‘개인숭배’ 형식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사부님께서 “그렇다면 부처도 오직 사람의 마음만 볼 것이고 사람이 지키는 이 형식을 보지 않을 것이다. 지키는 자체도 모두 집착이고 모두 속인이 내려놓지 못하는 것일 뿐 진정한 부처수련이 아니다.” [2], 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또 우리에게 “물론 당신은, 나의 마음은 아주 경건하다고 말하지만, 당신이 경건한 것은 종교와 당신이 표현한 그런 종류의 유위적(有爲的) 형식에 대해서이지 수련하는 것이 아닌바 그것은 다른 별개의 것이다.” [3], 라고 말씀하셨다.

맹목적으로 숭배하면 믿는 것이 사부님과 법인가? 정법하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사부님과 법뿐이다. 자신이 법에서 성숙하고 법에서 인식해야만 구세력이 만들어낸 천변만화한 어지러운 상황에서 정사를 분별하고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대법제자는 정법시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단순한 개인수련이 아니다. 오랫동안 정도를 빗나간 정체를 대면하고 무시하고 방관해서는 안 된다. 중생을 위해 자신의 수련을 위해 심지어 ‘유명인’을 위해서도 책임져야 한다. 사부님의 평어문 ‘금부처(金佛)’ 중 작가가 보도소 유명인에 대한 논술- ‘그중 어떤 사람들은 바로 구세력이 배치한 것인데 목적은 속인의 마음이 매우 중한 그런 수련생들을 고험하고 도태시키려는데 있었으며, 어떤 이들은 심지어 관건적인 시각에 이르러 부정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인데 꼭 심성이 다른 사람보다 더 좋다고 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부님께서는 일체중생을 구도하려고 하시기에 많은 일은 상대방의 책략을 역이용해 그러한 배치 중에서 일의 본질을 개변하고 구세력의 배치를 타파하셨다’라는 것은 우리가 돌이켜 볼 가치가 있다.

구체적인 정법 수련의 실천 중 중대한 문제의 선택 중 대법제자는 먼저 법에 협력해야 하고 협조인을 협력해서는 안 되며 협조인을 대할 때 법을 스승으로 삼으며, 협력하기 위해 협력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협조하는 일을 부정하라는 것인가? 아니다. 협조는 필요한 것이지만 중국에서 협조는 전임이 아니다. 정체에 문제가 나타났을 때 수련생이 제출한 어떤 건의이든 법과 정체, 중생에게 유리하면 수련생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조건 없이 협력해야 하고 자각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현 단계에서의 인식이고 부족한 곳은 지적해 주시기 간곡히 부탁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경고하는 말(警言)’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싱가포르 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창춘(長春)보도원법회설법’

문장발표: 2015년 10월 10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0/10/31735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