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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베이징의 1만여 건 건강조사보고의 역사

글/ 베이징 파룬궁 수련생

[밍후이왕] 1998년 9월, 그 해 6월 초 막 ‘베이징 방송국 사건’이 발생했다. 방송국의 파룬궁에 대한 거짓보도 때문에 파룬궁 수련생이 방송국에 가서 진상을 알린 사건은 크게 대법을 홍보하는 효과를 일으켜 연공장에 공법을 배우러 온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그 때 북경 시내에는 도처에 연공장이 있었고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

당시 나는 베이징 협화의대에서 교사로 있었다. 어느 날, 동료 샤오린 선생님이 나를 찾아와 국가체육위원회에서 모든 기공조직이 신고등록을 하라고 했는데 등록을 해야만 합법적이라고 말했다. 수련생을 위해 합법적인 수련환경을 쟁취하려고 파룬따파연구회는 등록신고를 준비했는데 이렇게 하려면 병을 제거하고 신체가 건강해진 자료가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체육총회에 물었다.

나와 그는 당시 선농단(先農壇) 체육관 내에 있는 국가체육총국으로 찾아가 신고등록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지도자와 스탭을 만났다. 스탭은 우리에게 신고하는 건 복잡하지 않는데 단지 해당 기공을 통해 병을 치료하고 몸을 건강하게 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제공해주면 된다고 했다. 기공으로 병을 치료한 효과적인 병 사례를 제공해주어야 하는데 병 사례는 30개보다 적어서는 안 되고 물론 많을수록 더 좋았다.

말하자면 1992년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기 시작해서부터 1998년까지, 특히 후 몇 년 동안 파룬궁을 배우러 온 사람이 아주 빨리 증가했다.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다보면 공원, 광장과 거리, 큰 백화점 앞이나 옆 공터에 몇 사람이 연공했는데 며칠 지나서 보면 그곳에 사람들로 꽉 차고 정연했다. 늘 누군가 들어가고 또 누군가 동공을 연마하고 나면 급히 출근하러 갔다. 늦게 온 사람은 조용히 대오 뒤에서 따라 연마하다가 끝나면 각자 흩어졌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비록 같은 곳에서 연공하지만 서로 몰랐고 낯이 익으면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몇 해 동안 이런 정황이 아주 많았다. 연공장도 아주 특색이 있었는데 파룬따파에 관한 소개를 노란 천에 걸어놓았다. 두세 명이 밖으로 걸어 다니면서 수련생의 동작을 바로 잡아주거나 혹은 새로운 사람들에게 공법을 소개해주고 그들에게 동작을 가르쳐주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보면 이런 경치는 도시의 아름다운 풍경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연공하기에 파룬궁이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한 효과적인 병 사례를 수집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샤오린 선생님은 젊고 부지런하여 많은 일들을 도맡아했다. 그는 남방 시골에서 왔다. 열심히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협화의대 연구생에 합격했고 전공이 분자생물학으로 당시에 상당히 인기 있고, 희망적인 분야였다. 그는 기연(機緣)이 아주 좋아 1994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가 소박하고 착실하며 일도 열심히 했기에 지도교수는 그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고 아주 전도가 있는 젊은이라고 여기면서 직접 박사학위를 전공하게 했다. 석사에서 박사로 넘어갈 때 지도교수는 그에게 실험 하나를 하게 했는데 몇 백 마리 흰 쥐를 죽여야 했다. 샤오린은 당시 법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것을 살생이라 여겨 지도교수한테 이 실험을 하지 않고 다른 실험으로 바꾸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지도 교수는 그의 생각을 부정하면서 그에게 만약 이 실험을 하지 않는다면 졸업할 수 없고 학교에 남아 선생님이 될 수도 없으며 남방 고향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샤오린은 재삼 고려한 후 지도교수한테 편지 한 통을 썼고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도 다 했다. 결과 지도교수는 생각을 바꾸었고 그는 순조롭게 졸업해 학교에 남아 선생님이 됐다.

당시 협화의대에는 몇몇 교직원과 학생들이 파룬궁을 연마했다. 모두들 함께 모여 어떻게 하고 무엇을 할 지 궁리하면서 많은 아이디어를 냈다. 마지막에 베이징 연공인 중에서 역학조사와 정황분석을 하기로 결정했다. 조사받은 연공인의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후의 신체건강상황, 체질상황, 정신상황 변화를 관찰하기로 했다. 참가 인원수를 제한하지 않았고 조사받는 사람의 상황도 제한하지 않았다. 시간이 제한돼 있기에 주요하게 몇 개 베이징 시내 지역 연공장 수련생을 위주로 했다. 어떤 베이징 교외 수련생들도 소식을 듣고 참가했다. 협화병원 박사생 샤오린은 재빨리 움직여 이튿날에 설문지 초고를 가져왔고 수정한 후 학교 내 역학 교수에게 의견을 물어봤다. 교수님은 이 설문지로 조사하면 된다고 알려주면서 비록 설문지 항목은 간단하지만 만약 조사 사례 수량이 많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데 역학 조사의 어려움은 사례 수집에 있다. 수량이 너무 적으면 진실하게 조사항목 내재 요소의 작용과 외재 요소의 영향을 피드백 할 수 없었다. 즉 사례 수량이 많을수록 이 조사보고의 분석결과는 더욱 믿을만했다. 이 교수님은 또 만약 매 사례마다 연공 전후의 각종 화학 실험 등 검사가 있으면 더욱 좋다고 일깨워주었다.

우리는 이 건의를 채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임상 의학에서도 의학지표는 종래로 질병정황을 판단하는 주요한 임상학 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의는 4진(四診, 환자의 병세를 보고, 듣고, 묻고, 맥을 짚어 진찰하는 것)을 통해 완전히 질병의 발생과 발전을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환자가 약을 복용한 후의 임상 지표변화를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수련생들이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후 신체의 전반적인 변화를 보려고 했다. 주요하게 세 방면에서 조사받은 자의 정황을 관찰하려 했다. 1. 수련 전후 신체건강상황 2. 수련 전후 체질 상황 3. 수련 전후 정신상황. 그러므로 조사받은 자의 수련 전후의 신체상황만 파악하면 된다. 수련 후 신체의 변화에 대한 인식은 사실 수련생 자신의 법에 대한 인식과 관계있기 때문에 어떠한 규정적인 요구도 없이 오직 사실대로 자신의 신체 감수를 피드백하면 된다. 그러므로 어떻게 이 설문지를 적는가 하는 것은 적는 자가 자신의 수련 전후 신체에 대한 관찰 및 인식과 관계가 있었다. 이 점 역시 사실대로 수련생이 수련한 후의 심성 변화와 반영해 나오는 신체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에 아주 진실했다.

박해가 시작된 후 어떤 사람은 화학 실험 등 각종 지표가 없으면 조사받은 자의 신체변화정황을 실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조사보고를 비난하면서 의학지표가 없으면 완쾌됐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고 여겼다. 우리가 수집한 만여 개 사례 중에서 50% 이상의 사람들이 연공하기 전에 3개 이상 질병이 있었고 90% 이상이 병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걸린 병은 현대의학으로 말하면 난치병이거나 불치병이었지만 연공장에 들어온 후 며칠이면 다 나았다. 이때 설사 이런 사람들이 모든 검사를 다 해도 얻어낸 검사결과는 그들 신체의 전반 상태가 좋고 나쁨을 반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이 세 가지 관찰은 가히 한 사람의 전반 상태를 반영해 낼 수 있었다.

밍후이왕에서 보도한 대량의 사례에 근거하면 많은 사람들이 수련한 후 온 몸이 홀가분한 상태에 도달했고 많은 사람들이 십여 년이 지났지만 병이 없고 약 한 알도 먹지 않았다. 마중보(馬忠波)라고 하는 수련생이 있었는데 양측 엉덩이 뼈 관절 괴사(雙側股骨頭壞死)였고 CT 검사로도 증명됐다. 오직 땅에서 기어 다니고 다른 질병도 있어 거의 죽기 직전이었지만 대법을 수련한 후 3일 뒤에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고 정상적으로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정황을 알게 된 후 의사는 그녀의 엉덩이 뼈 관절이 정상으로 회복됐는가를 알아보려고 CT검사를 했지만 결과 변화가 없었다. 이상한가? 이상하지 않다. 다른 의사는 그녀에게 골격 밀도 검사를 해주었는데 엉덩이뼈의 관절 골격 밀도가 아주 높아 그녀가 이미 정상으로 회복됐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엉덩이뼈 겉은 여전히 썩은 뼈여서 이 문제를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의학지표는 진실한 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온몸이 괴롭지만 의학지표에는 정상이고 어떤 사람은 검사지표가 정상적이지 않지만 아무 문제도 없다. 이는 임상학에서 흔히 보는 일들이다.

우리는 설문지 양식을 대법연구회 베이징 보도소에 보낸 후 다시 각 연공장으로 보냈다. 보도원이 복사한 후 수련생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수련생들은 자신의 당시 신체정황에 근거해 사실대로 설문지의 문항에 답을 작성했다. 작성한 후 거두어서 여기에 가져왔다. 설문지를 각 연공장으로 보낼 때 좋은 연공환경을 얻기 위해 신청, 등록을 위한 조사를 한다는 말을 듣고 수련생들은 모두 아주 기뻐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연공장에는 나이 드신 할머니들이 많고 글씨를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이것 역시 그들을 막지 못했다. 보도원의 협조 하에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부탁하거나 혹은 가족을 찾아 써달라고 해서 아주 빨리 작성했다. 한 주일 후에 우리는 만여 부의 설문지를 받았다. 어떤 수련생은 설문자의 질문내용에 대한 답변만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설문지 뒤에 사부님께 감사를 드리고 대법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마음의 말들을 많이 적었다.

설문지를 회수한 후 선별하기 시작했고 데이터를 입력하고 분석한 후 문장을 만들었다. 선별과 데이터 입력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컴퓨터에 입력할 때 항목이 완전하지 않은 설문지를 빼내면 됐다.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도 한 가지 큰일로서 당시 개인 컴퓨터를 갖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직장의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만 많았기에 요구를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좋은 소식이 하나 들려왔다. 다른 직장의 한 수련생이 직장에서 컴퓨터방 열쇠를 빌려와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그야말로 굉장히 좋은 일로서 신이 도운 것이다. 저녁에만 작업을 할 수있었고, 시간은 급했기 때문에 각 연공장의 기술자들을 찾았다. 약 30여 명이 왔는데 3일 저녁(밤새 내내)과 일요일 온 하루를 해서야 월요일 새벽 5시에 만 4천여 부의 설문지를 전부 완성했다. 많은 사람들이 저녁에는 컴퓨터에 입력하고 낮에는 정상으로 출근했다. 이런 수련생들은 대부분 서로 알지 못했는데 대법에서 그들을 필요로 할 때 나타나 조용히 할 일을 했고 그 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지만 우주의 역사 중에는 기재돼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자료 입력이 끝나자 데이터 분석을 진행했다. 일부분 수련생들의 설문지는 완전하게 작성하지 못했고 항목이 부족해 빼낼 수밖에 없었다. 정리해낸 12,731부 유효조사 설문지에 대해 분석을 진행했다. 이 부분 일은 주로 샤오린이 완성했는데 이 분야에는 능력자가 많아 모두의 의견을 모아서 더욱 완벽하게 했다. 과정 중 사람마다 모두 아주 좋은 의견을 제기했다. 며칠 동안 밤새며 일한 후(낮에는 정상 출근) 샤오린은 마침내 조사보고의 초고를 완성했다. 보도소에서는 몇 명 의학전문가 및 교수를 청해 이 조사보고서를 심의해 모두의 개선 의견을 반영해서 마침내 최종 보고서를 완성됐다.

이 한 단락 과정은 이미 역사가 됐다. 장쩌민 집단의 파룬궁 박해로 인해 그 일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공직에서 면직됐다. 그때의 엘리트, 인재들은 이 몇 해 동안 잔혹한 박해를 받았는데 어떤 사람은 붙잡히고 어떤 사람은 두들겨 맞거나 노동교양 혹은 판결을 당했다. 어떤 사람은 고통에 시달리다 불구가 됐고 어떤 사람은 정신적으로 크나큰 충격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심지어 지금까지도 사처(四處)로 떠돌아다니고 있고 어떤 사람은 집이 있어도 돌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이렇다하더라도 그 어떤 것도 개변하지는 못한다. 대법제자의 우주 진리에 대한 신앙은 어떠한 생명도 개변할 수 없는 것이다.

문장발표: 2015년 9월 2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9/22/31595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