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주 수련생
[밍후이왕]
위대하고 자비로운 사존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지난 2년간, 내가 어머니 구출에 나선 것은 정부와 언론에 진상을 알리는 계기가 됐고 그 과정에서 정부와 언론에 진상을 알리는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래 나의 경험을 수련생과 함께 나누겠다.
1. 어머니를 구출하며 정부와 언론에 진상을 시작하다
2012년 어머니가 또 다시 중국에서 불법적인 박해를 받았다. 나는 속이 타들어 갔지만 어떻게 구출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낙담하고 괴롭고 원망하는 마음이 한꺼번에 나왔다. 수련생들과 교류하면서 사악의 추행을 끊임없이 폭로하는 것만이 어머니를 구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고,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려 구출함으로써 더욱 많은 세인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법리에서 깨달은 후 나는 우선 인터넷에서 우리 지방의 의원, 언론 매체, 교회의 전화와 우편주소를 수집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박해받은 과정을 편지로 발송해 지지와 도움을 요청했다. 일부 답장을 받은 후 나는 그들과 연락을 하면서 어머니의 근황을 제때에 알렸다. 일부는 답장이 없었지만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답장은 하지 않아도 내용을 봤다면 파룬궁 박해 진상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 선거구 연방의원들을 찾아가 어머니의 박해 사실을 알리고 호주 정부의 도움을 요청했다. 연방의원들이 당시 외교부장에게 편지를 보낸 후 외교부 아시아 극동부 책임자가 중국외교부에 연락해 신앙 박해는 인권 유린이라고 비난하며 어머니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을 계기로 나는 의원들과 지속적으로 왕래하면서 성탄절마다 찾아가 감사를 드렸다. 나는 또 우리 지역 언론매체의 보도 내용을 의원들에게 보내줬다. 이유는 지역사회가 그들이 한 일을 주목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자발적으로 지역 신문사에 연락해 어머니가 신앙으로 박해 받은 진상을 알려 그들의 정의와 양심을 깨우려 했다. 신문사는 나를 동정하고 지지했다. 이것은 지역 주민의 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보도할 책임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신문사는 내가 어머니 구출에 나선 6개월 동안 5번에 거쳐 어머니의 박해 사건 진행상황을 신속하게 보도했다. 호주 주요 신문의 하나인 데일리 텔레그래프도 어머니의 박해 사건을 두차례 다뤄 사악을 두렵게 하는데 큰 작용을 일으켰다. 나는 또 호주 주류 방송국과 신문사와 연락해 어머니의 소식을 알렸다. 피드백은 받지 못했지만 대법제자가 박해 받은 진상을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머니가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소에 6개월 감금돼 있는 동안, 나는 수시로 사람 마음이 올라와 어머니가 박해를 감당하지 못할까봐 걱정했고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됐다’거나 ‘위독하다’는 등의 통보를 받을까봐 걱정했는데 생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과 서둘러 목적을 달성하려는 일 하는 마음이 밀려왔다. 나는 매일 3,4시간 밖에 잠을 자지 않았다. 학교도 가야하고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는데다 어머니를 구해야 하며 법공부도 해야 한다. 때로는 졸려서 법공부를 하지 못하면 억지로 일어서서 읽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왜 돌아올 수 없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 낙담하고 실망했고 성공적으로 구출되어 호주에서 자유롭게 법공부와 연공을 하는 다른 노인 수련생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수련생들과 교류한 후 나는 깨달았다. 만약 내가 정에 이끌려 사람 마음이 움직이면 다른 공간의 부정적 물질은 교도소에 있는 어머니의 상태에 영향을 주며 사악이 더 심하게 어머니를 박해할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정이 매우 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모녀 관계는 법에서 함께 정진하는 수련생 사이의 관계로 승화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시간을 내어 법공부를 더 많이 해서 법으로 자신을 충실히 하고 정념을 강화하면서 어머니와의 육친정을 담담히 내려놓았고 사악을 폭로하는데 더 큰 힘을 쏟았다.
오늘날 세상에서는 인터넷의 힘이 매우 크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사이트를 개설하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전 세계에 전했으며 대대적으로 사악을 폭로했다. 사이트를 만든 후 어머니의 박해 소식은 전 공산국가 슬로바키아에까지 전해졌다. 그곳 세인트 엘리자베스대학 건강사회과학학과 교장은 파룬궁수련생들의 확고한 신앙심과 강권의 박해에 굴하지 않는 정신에 감동해 어머니에게 ‘인권과 신앙 수호상’ 금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대학 측은 베이징 창핑(昌平) 구치소에 초청장을 보냈는데 그때 어머니는 이미 비밀리에 노동교양소로 이송된 상태였다. 어머니는 초청장을 받지 못했지만 그곳의 사악한 자들은 편지를 보고 두려워했을 것이고 그들의 악행이 이미 전 세계 각 지역에 전해졌다는 사실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시상식 날짜는 다가오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감금돼 있었다. 결국 나는 어머니를 대신 이 상을 받으러 슬로바키아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 상은 단순히 어머니 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지지와 선양이기 때문이다. 먼 나라 슬로바키아에 도착한 후 나는 오전에 현지 의원들을 만나 어머니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공산당에 대한 의혹들을 풀어주었다. 오후 시상식은 수백 명이 모인 강당에서 열렸는데 교장은 그 자리에 있는 학생과 그들의 가족, 친구, 각국에서 온 교수들에게 어머니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리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진상을 알게 됐고 대법에 호감을 갖게 됐으며 어머니의 처지에 동정과 지지를 표했다. 나는 또 어머니의 소식을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리고 인터넷에서 서명을 받았는데 일정한 양이 되자 서명을 모아 중국정부와 호주외교부에 발송했다. 당시 나는 서명 양을 추구하지 않고 사악을 폭로하겠다는 목적만 가졌다. 이밖에 나는 또 국제엠네스티와 연락했고 영국 총부 책임자에게도 연락했다. 그들은 인력 부족으로 어머니 구명 운동을 전개하지 못했지만 나는 낙심하지 않고 또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어머니 구출의 성공 여부에 상관없이 나는 대법 진상, 대법제자의 박해 진상을 세인에게 알리고 사악의 거짓말을 철저히 폭로하고 진상이 온 세상에 폭로되게 하려고 했다.나는 또 밍후이 중문과 영문 사이트에 수시로 어머니의 근황을 알렸다. 사실 나는 작문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 박해 폭로 문장도 사실 위주로 서술했을 뿐 화려한 단어가 없었다. 그 때 나는 늘 작은 노트를 갖고 다니며 좋은 생각이 있거나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기록했는데 휴식할 때면 사부님께서는 어떤 상황을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지 머릿속에 넣어주셨다. 그러면 나는 즉시 노트에 기록했다. 이는 밍후이왕에 제때에 더욱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리하여 나의 투고는 매번 밍후이왕에 발표되어 사악을 폭로할 수 있었는데 사악은 정말로 두려워했다. 그때 구치소 심사원은 자신의 이름이 악인 명단에 오른 것을 보고 어머니에게 “나를 악인 명단에 올리면 당신네 온 가족을 모두 체포해 여기서 설을 쇠게 할거야”라고 위협했다. 사실 그들은 정말로 매우 두려워했다.
‘프리 차이나’ 영화를 홍보할 때였다. 내가 현지 언론사들과 이미 자주 접촉했기에 그들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이 영화와 연결시켜 영화 개봉 소식을 보도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진상을 알게 하자는 나의 제의에 흔쾌히 대답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신문 외 TV방송국과는 접촉하지 못했다. 수련생들은 교류에서 현지 TV방송국에 연락해 영화소개 혹은 지역 방송을 할 것을 제안했다. 나는 법공부를 잘하고 잡념이 없으며 구하는 집착심이 없는 상태에서 처음 TV방송국을 찾아가 진상을 알렸는데, 그들은 기뻐하며 지역 뉴스 시간에 영화 상영 소식을 넣어주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고무되어 다음에는 ABC방송국을 찾아갔다. 일은 뜻밖에 매우 순조로웠다. 내가 찾아온 뜻을 밝히자 그들은 다음날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는 ‘프리 차이나’의 감독 마이클 펄만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영화를 소개하도록 하겠다고 대답했다. 인터뷰가 방송된 지 일주일 후 그들은 또 어머니의 박해 사건에 대해 생방송 인터뷰를 진행했다. 우리 현지 TV방송국의 문은 이렇게 순조롭게 열렸다. 이것은 나의 능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진상을 알리고 대법을 알리며 순정한 마음과 법을 위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사부님은 지혜를 열어주시고 가지해 주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 홍보 활동은 기말시험 기간과 겹쳐서 시간이 매우 부족했다. 당시 나는 이 항목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면서 나중에 시간이 날 때 할까 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 항목은 단지 한번 밖에 없고 내가 여기에서 살게 된 것도 기연이므로 나는 이곳 중생을 구도할 책임이 있었다. 법을 실증하는 항목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기회는 놓쳐버리면 안 되고 일체는 사부님의 배치다. 그리하여 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했다. 활동이 끝난 후 나의 성적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2. 생체 장기적출 문제로 정부, 언론사에 진상을 깊이 알려
나는 원래 언론매체와 연결하고 정부 의원들을 만나는데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어머니 구출을 통해 점차 나에게 맞는 진상 알리는 방식을 모색해 냈다. 어머니를 구출할 때 언론사와 의원들을 접촉했기에 올해 7월 우리 지역에서 ‘강제장기적출 반대’ 서명 활동을 할 때 언론사 홍보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현지 신문과 TV방송국은 이번 활동에 대해 사전 보도를 한데 이어 현장 인터뷰와 후기 추적 보도까지 했다. 활동 당일 우리는 두 명의 연방의원을 만나고 ABC방송과 인터뷰했는데 진행자는 어머니를 직접 만나자 깜짝 놀랐다. 2년 전 인터뷰 당시 어머니는 아직 베이징 노동교양소에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이 나간 후 나는 방송국에 찾아가 감사를 표했다. 그들은 기뻐하며 우리에게 그 프로그램에 대한 많은 네티즌의 호응에 큰 격려를 받았다고 말했다. 내가 우리의 연공장이 생겼다고 알려주자 그들은 적당한 시간을 찾아 보도하겠다고 말했다. 다른 두 신문도 후속 보도를 했다. 연공장에 공법을 배우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연공장에 대한 신문 보도를 보고 배우러 왔다.
이번 활동에서 다른 하나의 제고는 사부님께서 나를 도와 나쁜 물질을 제거해 주신 것이다. 활동 당일 나와 수련생들은 활동 계획을 놓고 다툼이 생겼는데 나는 그녀의 태도에 놀라 심성을 지키지 못했고 수련인의 참음을 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문제가 엄중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부모에 대한 태도도 무례했는데 황당하게도 생리주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찾았다.
사건은 계속 일어났다. 하루는 내가 성질을 부린 후 아버지께서 나의 화를 내는 문제를 엄하게 지적해 주셨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구절마다내 머리를 때렸다. 그래도 나는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억울하다고 느꼈고 안을 향해 찾지 못했다. 그 이튿날 부모님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나를 잘 대해주셨다. 어머니 수련생은 교류하며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 네 아버지의 입으로 너를 점화해 주시는 거란다. 요즘 네가 하는 것 좀 봐. 생리주기는 속인의 일이고 너는 수련인이다. 대법제자의 풍모를 체현해야 해. 너는 참지도 못하는데 어찌 대법제자라고 할 수 있니?” 어머니의 말씀은 나를 일깨워 주었고 전날 아버지의 엄한 지적을 듣고 화나게 했던 물질이 몸에서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으며 성격도 이전보다 좋아졌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엇이 대인지심인가? 한 연공인(煉功人)으로서 우선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먹어도 대꾸하지 않으며, 참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을 어찌 연공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 참음은 해내기가 너무나도 어렵고, 나는 성격이 좋지 않다. 성격이 좋지 않으면 고쳐야 하지 않는가. 연공인은 반드시 참아야 한다. ”[1]
나는 깨달았다. 이번에 화를 낸 일은 나의 이기심을 폭로했고 독선적이며 다른 사람이 지적하는걸 싫어하는 마음을 폭로했다. 이는 개인 수련 제고에서 엄중한 부족점이 폭로된 것이다. 나는 진상을 알리고 사람들을 구하는 기회와 지혜를 주시고 동시에 수련제고의 기회를 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린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허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제9강’
문장발표: 2015년 9월 2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해외법회원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9/21/3160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