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고소장 발송하다 납치당한 경위
글/ 헤이룽장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2015년 7월 22일 오전 9시경 헤이룽장성 자무쓰 기차역 우측에 있는 우체국에 장쩌민 고소장을 발송하러 갔다. 우체국 접수 직원이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기에 우편물을 부친다고 했다. 무슨 우편물 인지 묻기에 나는 그냥 자료라고 했다. 그는 어떤 물건은 발송하지 못하게 하니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장쩌민 고소장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한 쪽 접수대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저쪽으로 가보세요. 거기서 발송합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우편물 송장을 작성하고 있을 때 문 밖에 3,4명 남자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사복차림이었는데 그중에는 검은 안경을 쓴 사람도 있었고 가방을 어깨에 가로 메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송장을 작성한 후 문을 나서자 한 사람이 손을 내밀어 갑자기 나를 끌어당겨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태우려 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뒤로 빼면서 “누구냐? 어쩌자는 거냐?”라고 큰소리로 물으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도 따라 들어왔다. 내가 다시 “왜 그러는 거죠?뭘 어쩌자는 겁니까? 당신들 신분이 뭐죠?”라고 물었다. “나는 지금 장쩌민 고소장을 발송 중에 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계속해 이런 행패를 부린다면 다음번 피고소인은 곧 당신들일 겁니다”라고 정중히 말했다. 그들은 “우리를 따라 오시오, 어느 곳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라고 말했다. 나는 “절대로 당신들을 따라가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한 후 신문 판매대 뒤에 서서 그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급히 수련생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우체국에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나를 납치하려 해요”라고 연락했다.
전화를 끝낸 후 얼른 전화 수신자를 삭제하고 전화카드도 구겨버렸다. 그들은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4,5명이 합세해 나를 들어 차량에 밀어 넣은 후 자무쓰 전진 공안국 1층 심문실로 끌고 갔는데 그들은 즉시 내가 지니고 있던 배낭을 빼앗아 안에 있던 신분증, 설법 책, 장쩌민 고소장 원본이 수록된 USB 메모리 칩, 진상지폐 1천 위안, 상용 핸드폰 3대, MP3 1대 등을 수색했다. 나는 “절대로 나쁜 짓을 하지 말고 빠져나갈 수 있는 퇴로를 남기세요. 선악에는 반드시 업보가 따르기 마련인데 이는 하늘의 이치입니다. 런창샤(任長霞)가 바로 그 실례입니다. 그녀는 가장 안전한 위치에 앉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사했는데 그녀만 혼자 죽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업보가 미쳐 남편은 그녀가 사망한지 1년 후에 뇌출혈로 사망해 그녀 아들만 외롭게 남았지요”라고 진상을 알려줬다.
한 경찰관이 “우리도 늘 ‘밍후이왕’에 접속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밍후이왕을 보았다니 하는 말인데 그곳에 공안, 검찰, 법원 계통의 많은 사람이 업보를 당한 사례들을 보지 않았나요?”라고 말하자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말없이 밖으로 나갔고 심문실 안 사람들도 모두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다. 그 때 책임자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그들 말로는 ‘국장’이라고 했다. 내가 “국장님, 안녕하세요, 만약 내일 당장 장쩌민을 심판대로 보낸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반드시 자신이 빠져나갈 퇴로를 남겨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내내 진상을 알려주며 발정념을 하고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장쩌민에게 박해를 당해 가정이 완전히 파괴됐습니다. 현지 610은 거짓 증거자료로 나를 3년형을 받도록 했지요. 남편은 내가 두 번씩이나 불법적으로 체포 수감되는 바람에 생활을 유지할 능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각 방면으로부터 받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내가 수감돼 있는 감옥을 찾아와 이혼수속을 밟았지요.” “남편이 이혼한 후 다른 여자와 동거하게 되자 아들만 홀로 집에 남게 됐고어머니는 내가 장기간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식조차 없자 수심에 쌓여앓다가 그리움과 슬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신들에게도 부모형제자매, 아내와 자식이 있을 겁니다. 만약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해보세요. 당신들이 1, 2년씩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당신들 부모들은 과연 어떨까요?!” 이 때 심문실 안에 있던 그들 3,4명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계속해서 말했다. “이 모든 일들은 단지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장쩌민이 박해의 원흉인데 말해보세요! 내가 그를 고소해야 하겠는지, 하지 말아야 하겠는지!”
그때서야 내가 ‘장쩌민 고소장을 발송하기 위해 우체국에 속달로 의뢰한 그 우편물이 그들 손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국민에게는 통신자유가 있으므로 법률로 보호를 받는데, 당신들은 내 우편물을 무단 압수해 뜯어내 이곳으로 가져왔는데 이는 법을 집행하면서도 법을 위반한 것이 아닌가요?” 그들은 내말에 머리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그들은 나를 심문하면서 자무쓰에 온지 며칠 됐고 누가복사한 편지를 주었으며 글자가 찍힌 돈은 어디서 온 것인지 등등을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런 것을 모두 알려줄 수 없습니다. 내가 알려주면 당신은 또 가서 그들을 박해할게 아닙니까? 나쁜 일은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선악에는 반드시 업보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한다면 당신들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러자 한 경찰관이 내말에 이어서 “사람이 하는 일을 하늘이 보고 있지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이지요”라고 말했다.
당일 오후 3시 경, 그들은 나를 강제로 병원으로 끌고 가서 신체검사를 시킨 후 검사료는 내가 지불하라고 했다. 오후 4시 경 나는 자무쓰 구치소로 압송됐다. 구치소로 가는 중에 내가 쓴 고소장을 읽어본 경찰관이 말했다. “당신은 마땅히 고소해야 하고 나와서도 계속 고소하십시오.”
나는 구치소에 수감된 후 스스로를 반성해 보았다. ‘장쩌민을 고소했는데 왜 내가 수감됐는가? 장쩌민을 고소하는 것은 잘못이 없지만 그 과정에서 뭔가 누락이 있어서 사악이 틈을 탄 것이 아닌가? 나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 바로잡아야 한다.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일련의 일들을 묵묵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나는 아직도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단식으로 항의하리라 결심했다. 단식 3일 째 되는 날, 같은 감방 사람이 경찰관에게 내가 단식한다는 상황을 알렸다. 4일째 날 구치소 의사가 와서 혈압을 쟀다. 나는 당일 오후 3시 지나서 자비로운 사존의 가호로 정정당당하게 구치소 문을 나섰다.
당시 나는 구치소 문을 나왔지만 한 푼도 없었다. 집은 외지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난감했다. 그때 20대 한 젊은 경찰관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2백 위안을 꺼내 주었다. 나는 돈을 받으며 “압수된 배낭을 받을 때 돌려줄게요”라고 했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다수 경찰관들은 다만 직업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어서 빨리 진상을 알게 되어 하루속히 중국공산당 조직에서 탈퇴하고 선량함을 선택해 자신과 가족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남겨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 배낭은 전진 분국 국보대대에 압수돼 영치돼 있었다. 집에 돌아온 후 가족들은 배낭과 그 안에 들어 있는 물품들을 찾아오기로 결정했다. 7월 28일 오전 10시 35분, 가족은 전진 분국 국보대대에 가서 배낭을 돌려달라고 하자 15분 후 경찰대장 왕씨는 한참 생각하더니 “835위안의 진상지폐, 설법녹음 메모리 등 진상관련 물품들은 반환할 수 없고 파룬궁과 관계없는물품은 아무 쓸모가 없으니 전부 돌려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이해해주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가족에게 서명하라고 한 후 왕 대장은 서명하지 않은 채 즉시 배낭을 열었다. 그런데 확인 결과 발송하려던 속달우편물인 고소장이 없는 등 물품이 온전하지 않았다. 그 때 누군가가 들어와서 하는 말이 “아직도 500위안은 구치소에 있어요”라고 했다. 물품 점검결과 사부님 설법이 녹음된 MP3, 핸드폰 3개 등 다른 물품들은 그대로 있었다.
오후 1시 30분에 가족이 구치소를 방문해 영치된 500위안 반환을 요구하자 돈을 내주면서 “그 중 300위안은 구치기간의 식비조로 제하고 나머지만 돌려드립니다”라고 했다. 수련생들의 협조와 정념으로 1시 40분에 가족은 순조롭게 구치소를 떠날 수 있었다.
문장발표: 2015년 8월 1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8/12/3140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