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힘든 길에서 신념이 강해지다

글/ 치치하얼 대법제자 후이톈(回天)

[밍후이왕] 내가 만약 강제로 퇴학당하지 않았다면, 나는 올해 대학교 2학년 2학기여야 한다.

작년 이맘때는 내가 대학 1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어느 하루 학교 입구에 택배를 받으러 갔다. 나는 택배기사에게 파룬따파(法輪大法) 진상 자료를 주려고 가지고 갔다. 나는 택배를 받고 진상 자료를 넘겨주면서 진상을 알면 평안을 보장받는다고 알려주었다.

이틀이 지나 나는 숙소에서 모르는 사람의 전화를 받았는데 상대방은 중년 남자 목소리였다. 상대방은 나에게 모모냐고 물어서 내가 아니라고 하자 조금 놀란 듯이 “그럼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다. 통상 잘못 걸려온 전화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끊는데, 오히려 누구냐고 물으니 이상했다. 당시 다른 일이 있어 그냥 “당신은 잘못 걸었어요.”라고 말하고 끊었다.

몇 시간 후 다시 그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가 다시 잘못 걸었다고 하자 그는 모모의 삼촌인데 나의 이름을 물었다. 하루에 두 번이나 이런 전화를 받자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서로 모르는 사이니 이름을 말해도 모른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수업시간에 또다시 전화가 왔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우리와 같은 또래였다. 그는 자기 선생님께서 이 전화번호의 주인이 누구이고 어느 학교에 다니는가를 알아보라고 해서 전화한다고 했다. 나는 같은 학교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을 다시 생각하지 않았다.

삼 일째 되는 날 오전, 택배 기사라고 자칭하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학교 경비실에 물건을 두었으니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택배 올 데가 없는데 다른 사람이 나한테 보냈나?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같은 기숙사에 있는 친구가 밖에 있어서 전화해서 물건을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구가 물건을 받으러 갔지만, 그곳에서 본인 외에는 안 된다고 하면서 엉뚱한 말로 둘러대는 바람에 나는 오후에 찾으러 가겠다고 했다. 그때 점심 12시가 거의 다 되어 발정념을 해야 했다. (나는 숙소에서 발정념을 한다. 숙소에 이미 진상을 알렸음)

12시에 발정념을 하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선생님이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서 있었는데, 정치보안과 모모 선생이 할 말이 있으니 사무실에 가보라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그의 사무실에 가니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 모모 학생이냐고 물어서 내가 맞다고 하자 자료 한 부를 꺼내면서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에 택배 기사한테 넘겨준 자료였다. 거기에는 나의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나는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 택배 기사가 신고한 것이다. 그 후 내가 받은 몇 통의 전화는 나의 신분을 알아내려고 여러 사람이 번갈아가며 꾸민 일이었다. 오전에 걸려온 전화도 속임수였다. 내가 직접 가지 않았지만, 그들은 친구로부터 나의 정보를 알아냈던 것이었다. 나는 그 자료는 택배 기사한테 넘겨준 자료라고 말했다.

이후의 일은 말을 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며칠 동안 내가 만난 고위급 간부들은 1년 동안 내가 학교에서 만난 것보다 더 많았다. 7~8명의 학교 간부와 대학원 간부들이 회의실에서 나를 에워싸고 마치 큰 적과 마주하듯 진을 쳤다. 그들은 나에게 한 무더기나 되는 정치 모자를 씌우고 나에게 시비를 가릴 기회도 주지 않고는 상세한 설명서를 쓰라고 했다. 실은 ‘회개서’였다. 그리고 내가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에 따라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한다고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러면 그 형식적인 ‘회개서’만 쓰고 넘어가면 될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공산당이 다년간 국민들을 박해한 정치운동을 보면 많은 사람이 죄가 없는데도 소위 ‘잘못’을 승인한 후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씩 보고하고 마음을 졸이면서 생활했으며 인권과 인신 자유가 잔혹하게 유린당했다. 내가 그 택배 기사한테 진상을 알리고 그의 알 권리를 수호해주는 것이 무슨 죄가 있는가?

고대 공자가 숙손무숙(叔孫武叔)의 비방을 받을 때 자공(子貢, 공자의 제자)은 이에 당당하게 맞서 스승의 위신을 지켰고, 위나라 공손조(公孫朝)가 “중니는 어디서 배웠는가(仲尼焉學)”라고 말하며 공자의 사상을 의심하자 자공이 나서서 스승을 위해 변호한 이야기가 있다. 현재 나는 한 명의 파룬궁 제자로서 파룬따파에서 심신의 이익을 받았는데, 사부님께서 가르치신 ‘진(眞), 선(善), 인(忍)’의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 공산당이 함부로 하는데 굴복하여 ‘회개서’를 쓸 수 없다. 그러면 사람 되는 표준과 원칙에 부합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파룬따파에 억울한 누명을 씌우게 되고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더욱 제멋대로 대법에 대하여 죄를 범하도록 하게 된다.

나는 그들이 요구한 ‘회개서’ 대신 내가 법을 얻고 수련의 길을 걸어오면서 이익을 얻은 경험과 사람들이 알지 못한 파룬궁진상을 적었다. 선을 권하는 마음에서 그들도 진상을 명백히 알고 파룬궁에 대하여 죄를 범하지 말기를 바라면서 적은 것이다.

한 통의 메일로 대법수련의 길에 들어서다

이것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이다. 나는 초등학교 5~6학년 때부터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있었다. 가끔 며칠에 한 번씩 가슴이 아플 때는 경련이 이는 듯했고 호흡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가끔 발생했기에 중시하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여름방학에 북경에 있는 친척 집에 갔는데 병이 자주 발생했다. 친척 집에서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보이려고 했지만 여러 가지 원인으로 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모든 것이 일찍 암암리에 배치되어 있는 것 같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나는 고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했다. 하루는 인터넷에 접속했는데 자주 쓰지 않던 Outlook 메일함에서 낯선 주소의 메일을 발견했다. 그날이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것은 파룬궁 진상을 알리는 메일이었다.

나는 혼자 사고하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때는 파룬궁에 대하여 이해가 깊지 못해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도 학교 사상정치 교과서에서 본 것이 전부였고 실제 상황이 어떤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터넷 봉쇄를 뚫는 일에 흥미가 있었다. 나는 메일의 내용대로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방화벽을 뚫고 진정한 네트워크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았다.

그곳에서 나는 ‘분신자살’, ‘만 명이 중남해를 공격하다’에 관한 비디오 자료를 보았다. 비디오 속의 상황에서 많은 허점을 발견했고 이 모든 것이 공산당이 파룬궁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중해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사이트에도 접속하여 CCTV에서 보도한 자료를 찾았다. 그 당시 TV에서 여러 차례 보도한 자료들은 이상하게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분신자살’에 관한 것은 없고 모두 혼잣말로 떠들어대는 인터뷰였다. 이것이 공산당이 말하는 그 죄의 증거를 모두 조작하는 일로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후부터 나는 점차 파룬궁의 진상을 진일보 알게 되었다. 파룬궁의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하는 효과와 박해하기 전에 TV, 신문에서 정면 보도한 기사들을 알게 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국가 일급 배우이자 유명 테너 관구이민(關貴敏), 국가대표 수영선수이자 현재 한국국가대표 감독을 맡은 황샤오민(黃曉敏), 99년 인기드라마 의 배우 장광위(薑光宇), ‘샤오쥐안과 산골 주민(小娟&山穀裏的居民)’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한 위위(於宙) (2008년 박해로 사망) 등 많은 유명 인사들이 모두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파룬궁에 대한 나의 깊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밍후이왕에서 파룬궁 서적을 찾아서 단숨에 많이 다운받았다. ‘전법륜(轉法輪)’을 보고 나서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계층의 1억이나 되는 사람이 파룬궁을 연마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본래 유신론자다. 실증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사실들을 과학계에서 피하는 것을 많이 이해했고 나로서 이해가 안 되었지만, 줄곧 경솔히 판단하지 않았다. 나의 견해는 신이 존재한다 해도 당신이 신을 비방한다 하여 업을 빚는 것이 아니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손해도 없다는 것이었다.) ‘전법륜’을 다 보고 나서 나는 어떻게 자신의 경지를 제고하고 심성을 수련하여 층차를 제고하는 도리를 알게 되었고, 예전에 신학에서 많고 많은 의문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답을 모두 찾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파룬궁을 배우기 시작했고 대법제자가 되었다. 여기서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당시 나에게 진상 메일을 보낸 수련생께도 감사드립니다. 만약 그들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봉쇄돌파 프로그램을 전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도 아마 부식되어 공산당의 대오에 서서 고난 중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진상을 알리는 선량한 사람들을 적대시했을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는 파룬궁을 배운 후부터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나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 당시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면 모두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수술을 받아야만 나을 수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법을 얻은 지 이미 4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재발하지 않았다.

핍박에 못 이겨 퇴학

학교간부들은 내가 적은 글을 보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몇백 킬로미터 밖에 계시는 아버지를 불러왔다. 그들은 나를 강제로 퇴학시키려고 아버지에게 서명하라고 했다. 게다가 퇴학하지 않으면 공안에 신고한다고 협박했다.

이렇게 나는 교육받을 권리를 잃었다. 아버지는 나를 욕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했다. 아버지는 비록 파룬궁을 연마하지 않지만 공산당의 사악함을 명백히 알고 있었고, 내가 연공하여 얻은 좋은 점을 다 보았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공산당이야말로 없는 일을 날조하여 모함하고 파룬궁 제자를 박해하여 법에 위배되는 일을 하였다.

퇴학당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날 저녁, 우리 반장은 교외 식당에서 자리를 잡고 학생들과 함께 나를 위해 송별회를 마련했다. 나는 매우 감동되었다. 식당주인은 나에게 “네가 학교를 그만둔다고 친구들이 너를 위해 송별회를 해주는 거지?”라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넌 인기가 참 좋아, 이 몇 년 동안 이런 일을 몇 번 겪었는데 이처럼 사람이 많기는 처음이야. 제일 많아야 20여 명이었는데.”라고 했다. 우리 반에는 학생이 63명인데 40여 명이 왔던 것이었다. 나는 인생에서 하나의 힘든 시기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창밖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후의 길은 어떻게 가야 하는가?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대학시험에서 전공을 선택할 때도 뚜렷한 목표가 없었는데 인터넷사이트에서 이 전공을 찾아보고 마음대로 적었다. 대학 다닐 때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미래에 대하여 생각 없이 한발 한발 다가가는 심태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창밖의 화면도 끊임없이 반짝이면서 부단히 바뀌고 있었다. 아마 내 생에 처음으로 앞으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어떻게 자립할지, 어떤 일을 할지 이 문제를 이처럼 장시간 철저히 생각했다.

내가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설계사였다. 그 순간 전신의 세포들이 이 세 글자의 정보를 받기라도 한 듯 흥분되었다. 이건 되겠구나. 나는 어릴 적부터 작은 물건을 설계하고 소품 만들기를 좋아했다. 예를 들면 치약 박스로 작은 트럭을 만들기도 하고, 사용하지 않을 때는 수납통으로 썼다. 그리고 미술에 소질이 있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게시판은 종종 내가 꾸몄다. 이 때문에 나는 갑자기 생각난 이 ‘설계사’에 신심이 가득 찼다. 본래는 멀고도 지루한 여정이었지만 이렇게 잠깐 사이 도착했다. 그때부터 나는 인생에서 큰 방향이 있게 되었고 (파룬따파의 지도) 여기서 한 갈래 적합한 길을 찾았다.

대법제자의 풍채

다른 한 가지 이야기는 이번 설 전에 새로 개업한 보석점에서 내가 물건을 팔면서 설계를 배울 때의 일이다. 나와 함께 들어온 두 동료(남, 여)가 있었는데 두 사람 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점장은 관리상에서 너그럽지 못했는데 동료들이 늘 뒤에서 원망했다. 한 번은 내가 우리 가게에서 할 활동에 대하여 제안했다. 점장은 네가 점장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다른 동료들이 보기에 억울함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았지만 나는 모두 진(眞), 선(善), 인(忍)에 따라 자신을 요구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나의 인내력과 심성을 제고하는 기회로 삼았다. 나중에 한 달이 지나자 그 여자 동료는 다른 지점으로 갔고 남자 동료도 사직했다. 그는 점장과 매니저에게 말도 없이 사라졌는데 점장과 나만 남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외할머니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점장에게 사직을 신청했다. 점장은 혼자서는 일하기 어려우므로 나에게 신입이 와서 업무에 익숙해진 뒤 사직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나는 부탁을 들어주었고 보름 정도 더 일했다. (그 사이 점장에게 파룬궁 진상을 이야기하여 점장도 인정하고 나에 대한 태도가 좋아짐) 나는 3명의 신입에게 업무를 숙지시킨 후에야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집에 오기 전에 점장은 실적표를 제출했는데 실적을 전부 나에게 올려 월급이 1,500 위안(약 27만 원)이나 더 많아졌다. 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예전에 많은 선배가 말하기를 사람은 약아야 한다, 사람이 강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 좋은 사람이 되려 하고 정직하면 업신여김을 받는다고 했다. 그때는 그들이 말한 것이 도리가 없었지만 어떻게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 일을 통해 나는 알았다. 내가 ‘회개서’를 쓰지 않고 자퇴한 것도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 되려면 어쩌면 손해를 보고 업신여김을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복을 받는다.

올해 우리 가족은 고향에 가서 설을 보냈다. 고향에서 한 대법제자를 찾았는데 그는 우리에게 그녀의 집에 핀 우담바라 꽃을 보여주었다. 나는 아주 기운이 솟았고 대법제자가 된 것을 더 없는 영광으로 느꼈다. 우담바라 꽃은 선계의 꽃으로서 꽃줄기가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모양이 종과 같으며 또 눈처럼 희고 청백함이 비교할 데가 없다. 인간세상의 영양분을 섭취할 필요가 없고 각종 물질에서 필수 있으며 3천년에 한번 피는 진귀한 불가의 꽃이다. ‘법화문구(法華文句)’중에서 ‘우담바라는 3천년에 한번 피는 영험한 꽃으로서 이 꽃이 필 때 금륜성왕이 출현한다(優曇花者, 此言靈瑞. 三千年一現, 現則金輪王出)’고 적혀있다. ‘혜림음의(慧琳音義)’ 중에는 ‘우담바라는 상서롭고 영기를 담은 하늘의 꽃으로서 세간에 없는 것이다. 우담바라의 출현은 여래가 세상에 태어나듯 금륜성왕이 출현하면 세상이 큰 복과 덕을 받음을 뜻한다.’라고 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만약에 불경에서 말한 것이 정말이라면 우담바라가 피고 금륜성왕이 내려와 중생을 구도할 때 사람들은 모두 이 법을 접할 기회가 있지 않겠는가? 그럼 지금 이 시기 어떤 불가법문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고 있는가? 중생이라면 다 알고 있지 않는가? 바라건대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에 속지 말고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자신과 가족친구들이 정확한 선택을 하여 미래의 아름다운 신기원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여기서 사존님의 자비로운 고도(苦度)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문장발표: 2015년 6월 2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신수련마당>대법과의 연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6/26/310626.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