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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법광이 우리 집을 비추다

글/ 랴오닝 대법제자 정심

[밍후이왕] 1998년 겨울에, 날마다 연공장에 가서 연공하고 법공부를 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파룬궁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 당시 나는 19살이었다.

비록 병을 치료하기 위해 법을 배운 건 아니지만, 법을 배우고 연공한지 며칠 되지 않아 줄곧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불면증이 나았다. 또 온몸이 나른해서 몇 가지 옷을 빨아도 중간에 쉬어야 했고, 그렇게 다 하고 난 뒤에는 힘이 들어서 헐떡거렸던 내가 수련을 한 후부터는 두툼한 겨울옷 몇 가지를 빨아도 힘들지 않았고, 온몸에 힘이 솟구쳤으며, 길을 걸어도 가벼워서 날아갈 것 같았다. 건강이 좋아지니 마음이 유쾌하고, 나쁜 성격도 적지 않게 고쳐졌다. 나 자신에게 늘 대법의 요구대로 하고 어디에서나 좋은 사람이 되라고 일깨워 주었다. 이 대법을 얻은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기에 날마다 기갈이 든 사람처럼 법공부 했고 날마다 ‘전법륜’ 세 강을 보았으며, 후에는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루에 세 페이지를 외우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고, 기억력이 갈수록 좋아졌다.

내가 바로 법을 얻은 희열에 빠져있을 때, 장쩌민은 질투심으로 파룬궁 박해를 광적으로 시작했다. 하늘땅을 모두 뒤덮듯 거짓말로 대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두 독하게 세뇌해 우리의 수련 환경을 앗아갔다. 그 당시 나는 정말이지 몹시 풀이 죽었다. 10대 후반에 갓 법을 얻었던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밤에 사람이 없을 때 살고 있던 유치원에서 책을 들고 한참씩 보곤 했다.

매일같이 법 공부를 하지 못한데다가 주변 수련생들과의 교류도 끊기자 나는 점차 또다시 속인 중에 미혹되어 날마다 먹고 마시며 놀았다. 하지만 마음은 몹시 공허했고 늘 예전에 다 함께 법 공부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결혼 후 나는 다시 대법을 수련하고 싶었지만, 거짓말에 독해 된 남편은 진상을 듣지 않았다. 책을 주면서 보라고 해도 보지 않았고, 내가 책을 보기만 해도 화를 냈다. 간혹 남편이 집에 없을 때 두어 번 보아도 돌아와서 빼앗았고 아침 연공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무척 고민되었고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첫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두 번째 임신했을 때 모든 친척이 출산을 반대했다. 당시 우리의 생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인데, 임대주택도 가장 싼 곳이었고, 남편의 일자리도 고정적이지 않고 수입이 불안정해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살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대법의 법리를 알았기에 둘째의 출산을 고집했다. 그리하여 딸을 낳았더니 남편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런데 아이가 첫돌이 지난 후 늘 감기증세가 나타났다. 병원에 갔더니 아이의 심장에서 잡음이 난다며 선천성심장병 같다고 진단했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주 건강했던 아이가 왜 갑자기 이런 병을 앓는단 말인가? 하지만 감기증세가 지속되어 여러 병원에서 검사한 결과 모두 ‘선천성심장병’이라고 했다. 후에 감기의 합병증으로 폐렴이 되었고 치료할수록 증상이 악화되었다. 링거를 맞지 않으면 괜찮다가도 링거를 놓기만 하면 고열이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40도까지 오를 때도 있었다. 몇 가지 약으로 바꾸어도 효과가 없어 병원장마저 영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지역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병원에 갔다. 우리는 그 병원을 오가는 데 모든 시간을 쏟아서 의사와 간호사 모두 우리를 알았다. 한 번은 내가 심문하듯이 딸아이 심장이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자라날 가능성은 있는가요? 라고 물었다. 의사가 말했다. “틈새가 이렇게 큰데 어떻게 성장할 수 있겠어요, 만약 정말로 성장한다면 그건 기적이지요!” 나는 그만 가슴이 얼어들었다.

그 후부터 딸아이의 병세는 갈수록 심해졌다. 감기 증세가 조금만 있어도 숨쉬기 힘들어해서 뒷날 병원에 가야 했는데, 갈 때마다 적어도 일주일은 입원해야 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열흘도 안 되어 또 병원에 입원하러 가야 하는 걸 반복했다. 남편은 일할 수 없었고 나도 종일 마음을 졸이다 보니 우리는 날마다 우거지상이었는데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의사는 아이가 천식이 있으니 음식 알레르기라며 그 원인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1천 위안(약 18만원)을 들여 검사한 결과 달걀과 쌀 알레르기라고 했다. 나는 그야말로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이 쌀과 달걀은 아기의 주식인데 이것조차 먹일 수 없다니 그럼 뭘 먹인단 말인가? 일반적인 과자에도 모두 달걀이 들어갔으니 말이다. 할 수 없이 나는 그저 칼국수를 끓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기는 유달리 가루음식을 먹기 싫어해 두어 입 먹고는 먹지 않았다. 눈을 뻔히 뜬 채 매일 아이가 말라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아기가 반복해서 천식을 일으키는 것은 면역력이 낮아서 그렇다는 말을 듣고 나는 인터넷에서 면역력을 키우는 식물을 찾아서 매일 칼로 다져 모양을 바꾸어 아이에게 먹였다. 그리고 아이에게 맞는 집안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전기밥솥을 사서 온종일 물을 끓여 수증기를 배출시켰다. 정오에는 햇볕을 쬐었지만, 여전히 효과가 없이 며칠 만에 헐떡였고 갈수록 심해졌다. 밤에는 5분만 잠들었다가 또 깨어났고, 안아서 달래다 잠들면 내려놓자마자 또 깨어났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밤새도록 잠들 수 없었고 겨우 날 밝을 때까지 버티고는 또 얼른 병원으로 달려가곤 했다

한 번은 또 병원에 가서 줄을 섰을 때였다. 아이가 숨이 답답한지 내 어깨를 꽉 틀어잡았는데 이미 호흡이 곤란한 상태였다. 다급해서 의사한테 달려갔더니 아이의 상황이 아주 위급하다며 좀 더 숨이 막히면 심장쇠약 증세가 나타난다며 즉각 중환자실로 보냈다. 첫날 응급치료에 1만 위안(약 179만원)이 들고, 그 다음부터는 매일 몇 천 위안씩 든다고 했다. 우리는 남은 돈이 얼마가 들든 모두 치료하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9일 동안 입원했다. 중환자실에서는 간호할 수 없어서 날마다 CCTV로 2, 3분씩만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매일 동영상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딸아이는 두 손발이 다 묶인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왜 앉히지 않고 눕혀 놓았는지, 왜 누워서도 또 묶여 있는지 물었다. 남편은 아이가 앉을 수 없어서 눕힌 것이고, 묶은 것은 아이가 떨어질까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런 딸아이를 보는 나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파룬따파와 사부님이 생각났다. 그래서 중환자실 문에 기대어 딸에게 “파룬따파하오! 쩐싼런 하오!”를 염해 주면서 사부님께 딸아이를 구해줄 것을 빌었다. 8일째 되던 날, 의사의 지시에 따라 딸아이를 안고 검사하러 오가면서 주사를 맞아서 잠이 든 딸아이의 귀에 대고 “파룬따파 하오! 쩐싼런 하오!”를 염해 주었다. 이튿날 의사는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기라고 통보했다.

딸아이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말라서 쩍쩍 갈라졌으며 온몸은 피골이 상접했다. 머리를 들지 못할 정도로 쇠약했고, 온몸에는 주사 바늘을 찌를 만한 곳은 모두 주사 바늘 자국이었다. 딸아이가 9일 동안 얼마나 큰 고생을 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다시 링거를 놓으려 해도 주사 바늘을 찌를만한 혈관을 찾을 수 없었다. 아침에 두 간호사가 와서 세 번 찔러도 놓을 수 없었고, 점심시간에는 간호원 실에 안고 가 간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네 군데를 찔러도 여전히 놓을 수 없었다. 딸아이는 울고 나도 울고 간호사는 그래도 또 주사 바늘을 찌르려 했다. 그래서 나는 주사를 거부했더니 간호사들은 안 맞으면 번거로울 거라고 했지만, 나는 고집을 부려 딸아이를 안고 병실로 돌아왔다.

이튿날 담당 의사들이 와서 1천 위안을 내어 딸아이의 심장 수술을 해야 하니 수술준비를 하여 기다리라고 헸다. 우리는 융자를 끼고 갓 집을 사서 아직 내부 장식도 못 한 채 딸을 입원시킨 것이다. 지금 아무런 치료도 못 한 채 벌써 5만여 위안(약 893만원)을 썼다. 우리가 또 어디에서 돈을 빌려 수술을 하겠는가? 게다가 딸아이는 중환자실에서 갓 나왔고, 그렇게나 허약하고 조그마한 아이에게 수술한다는 건 위험한 것이다!

나는 갑자기 내가 왜 다시 사부님께 빌지 않았는지 생각했다. 나는 사부님께 여쭈었다. 사부님, 어찌 되었든지 막론하고 저는 꼭 아이를 데리고 법공부 하겠으니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수술할지 안 할지 사부님의 안배에 따르겠습니다.

이튿날 아침 6시 30분, 두 간호사가 큰 주사 바늘 4개가 달린 관을 들고 와서 딸의 피를 뽑았다. 딸아이는 중환자실에서 나오고부터 물을 많이 마시지 못하게 했고, 끼니마다 60ml의 우유(이는 한 영아의 양이다)를 마시게 했는데, 심장쇠약을 통제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렇게 많은 고통을 당하고도 또 배불리 먹이지 않는데 어디에 피가 있어 뽑을 수 있겠는가! 간호사들은 아무리 애써도 뽑을 수 없었다. 딸아이는 무섭고 아파서 마구 울어댔고 나도 울었다. 아기야, 엄마가 너를 대신해 아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간호사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결국 네 개 관을 다 채우지 못한 피를 억지로 뽑았다.

피도 다 뽑았으니 수술을해야 할 것같았다. 8시에 수술 담당의사가 와서 나에게 의논해 왔다. 나는 수술할 생각이 없고 우리 집에 가서 치료하겠다고 했다. 의사도 뜻밖에 흔쾌히 동의했고 게다가 우리를 도와 퇴원절차를 밟아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격동되었고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만약 사부님의 안배가 아니라면 이런 상황에서 퇴원은 불가능한 것이고, 수술이란 재난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집에 돌아오자 나는 시간을 틀어잡고 딸아이에게 사부님 설법을 들려주고 발정념을 했으며, ‘파룬따파 하오, 쩐싼런 하오!“를 염했다. 남편은 아무런 대책이 없자 내가 무엇을 하든 반대하지 않고 무엇이든 내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온 그 날 저녁부터 딸은 토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는 사부님께서 딸아이의 몸을 정화해 주시고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딸아이가 토한 뒤에는 더욱 심하게 헐떡거렸으나, 이번에는 토하고 난 뒤 조용히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날마다 딸아이와 함께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고, ‘파룬따파 하오’를 가르쳐 주었다. 딸의 상태도 날마다 더 좋아졌다. 남편도 그런 상황을 보고 병원에서 사 온 몇 천 위안의 약을 죄다 버렸고, 게다가 예전처럼 딸아이에게 달걀과 쌀밥을 지어 주었다. 우유와 물은 마실 수 있는 만큼 마시게 했고 좀처럼 제한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딸아이가 놀랄까 봐 말도 크게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얼마나 높게 말하든지 무서워하지 않았다.

지금 딸아이는 만3세에 접어들었다. 날마다 뛰어다니고 있고 살이 포동포동 올랐고, 얼굴은 희고도 핏기가 있어서 무척 귀엽다. 그리고 아주 총명하여 무엇이든 당장 습득한다. 이젠 백여 개 글자를 익혔고 또, 파룬따파 ‘홍음’ 중의 시가를 외울 줄 안다.

오늘 우리는 기다렸던 새집에 들어갔다. 이전에 둘째의 출산을 반대하던 친척친우들이 지금은 모두 우리를 부러워한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도 딸아이의 사건을 안 후 역시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집에 가지고 가서 들었다.

남편은 딸아이와 함께 수련하는 우리를 지지하며, 또, 사부님 법상을 모시는 틀을 만들어 주었다. 딸아이는 사부님을 특별히 존경하는데 사부님 법상을 보기만 하면 앞에서 “엄마, 저는 사부님께 감사드릴 거예요!”라고 말하고는 사부님께 절을 올린다.

그때부터 우리는 더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다른 집 아이들은 감기를 앓아도 우리 집 애들은 모두 아무 탈이 없었다. 남편도 이전보다 일이 많아졌고 이제는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법광은 우리 집을 밝게 비춰 주었고, 우리 집은 이전의 즐거움을 되찾게 되었다.

사부님께 큰 절 올립니다. 저는 반드시 더욱 더 정진하여 사부님의 자비하신 구도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 세계 파룬따파의 날을 축하합니다! 사부님 생신을 축하합니다!

문장발표 : 2015년 5월9일
문장분류 : 【경축 513】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5/9/3085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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