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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513] 중국인은 소양이 낮은가?

글/ 헤이룽장성 치치하얼 대법제자

[밍후이왕] 현재 중국인의 낮은 소양이 열렬하게 토론하는 주제가 되고 있다. 중국인의 소양을 제기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자연히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떠들거나 아무 곳에나 가래를 뱉고 쓰레기를 막 버리며 줄을 서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 또 각종 짝퉁상품, 유독식품, 서로 속고 속이며 더욱 심한 것은 누가 넘어지면 부축해주는 사람이 없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쓸까 봐 두렵기 때문이라는 등등 이유가 있다.

사람마다 많은 사례를 제기하며 자신이 겪은 경험을 말한다. 그러나 해결책을 제시하라면 누구나 절망한다. 설사 100년이 더 지나도 외국인의 문명 정도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이민을 선택했다.

문명고국(文明古國), 예의지국(禮儀之邦)이었던 중국이 정말로 희망이 없단 말인가? 아니다. 나는 내 경험으로 짧은 몇 년 동안 중국인이 자신의 도덕성을 재건했고 세계가 새로운 눈으로 보게 했다고 알려주었다.

그것은 1993년 당시의 일이다. 당시 나는 겨우 20여세였고 치치하얼의 보통 경찰이었다. 그때 중국에는 기공 붐이 일어났다. 기공과 특이공능에 흥미가 있었던 나는 매일 아침 공원에 가서 각종 공법을 접촉했다. 간혹 그들을 따라 연공도 했다. 전국의 많은 유명한 기공사가 우리 지방에 와서 학습반을 열면 나는 모두 참가했다. 그러나 늘 많은 것을 똑똑히 알지 못했다. 많은 문제는 설령 시 기공협회 사람이라 해도 나에게 해답하지 못했다.

한 우연한 기회에 나는 운 좋게 파룬따파(法輪大法)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의 설법을 들었다. 나는 그제야 일생 중의 많고 많은 풀지 못한 문제를 전부 명백히 알았다. 흥분된 심정은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부님의 ‘연공(煉功)은 德(더)를 중시해야 하고’[1], ‘心性(씬씽)이 수련되지 않으면 공이 자라지 않는다.’[1]란 법리가 내 민감한 신경을 건드렸다.

학교 다닐 때 나는 정치이론 과목을 싫어했다. 업무에 참여한 후 단상 위에서 하는 일이나 단상 아래에서 하는 학습, 보고, 태도표시에 더욱 반감을 가졌다. 중국 기공과학연구회 비서장이 리(李) 선생님을 치치하얼로 모시고 온 것을 보고 나는 즉시 이것 또한 공산당이 만든 일련의 정신문명 건설이라고 오해하고 자신도 모르게 아주 강한 거부심리가 나타나 며칠만 배우고 더 이상 연공장에 가지 않았다.

어느 날, 처음 함께 공을 배운 친구가 나에게 파룬궁 수련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업무가 바빠 잘 하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그는 말했다. “우리 연공장 사람들은 연공 효과가 매우 좋아 병이 심한 많은 사람이 연공한 후 다 나았고 심지어 암도 나아 직장의 많은 의료비를 절약하고 또 업무의 핵심이 되었어요. 고생을 겁내지 않고 가정이 화목하고 이웃과도 사이가 좋아졌어요. 여러 사람들은 비학비수(比學比修: 배움을 비기고 수련을 비김)하고 있어요. 며칠 후 다칭(大慶)에서 심득교류회를 하니 당신도 가서 보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사람들의 변화가 이렇게 큰 것을 믿지 못해 즉시 다칭에 가서 보겠다고 대답했다.

당시 다칭은 차량 운행 횟수가 적어 차표가 이미 다 팔렸다. 사람들은 차에 오른 후 표를 살 수밖에 없었다. 기차에서 내린 후 버스를 탈 때 표 값이 대략 30전이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몇 위안을 꺼내 이 몇 사람의 표를 내가 다 사겠다고 말했다. 여러 사람은 모두 싫다고 하면서 모두 나에게 몇 십전을 건넸다. 누구도 공짜를 바라지 않았는데 그들은 정말 사회 일반인들과 달랐다.

회의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잇따라 하얼빈 등지에서 온 수련생들이 도착했다. 외지 수련생이 많이 왔고 예상보다 많이 와서 접대하는 수련생들이 매우 큰 압력을 받았다. 여러 사람은 질서 있게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입장할 때 이미 자리가 없었다. 이때 한 다칭 수련생이 “다칭 수련생들은 일어나 자리를 외지 수련생에게 양보합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다칭 수련생들은 모두 즉시 일어났고 앞 땅바닥에 앉았다. 불평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앉은 후에도 많은 사람이 아직 자리가 없었다. 주최 측은 강당 책임자와 협상했고 책임자는 모든 수련생이 입장해 강당 통로에 서있는데 동의했다. 아마 그도 이 사람들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대회는 정상적으로 시작됐다. 각지에서 온 수련생은 강단에 올라 자신의 수련심득을 공유했다. 아래 수련생은 조용히 들었다. 담배를 피우거나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더욱이 먹을 것을 먹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도 없었다. 융단 옆의 몇몇 실무자는 소곤소곤 속삭였다. “다른 회의와 비교해보세요. 우리는 한 번도 이렇게 한가로운 적이 없었죠.”

정오에 한 시간 휴식했다. 사회자는 외지 수련생에게 옆 식당에 가서 식사하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속으로 ‘오늘은 밥은 먹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했다. 학교 다닐 때 수 백 명이 줄을 서서 밥을 살 때 붐비던 장면이 즉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늘은 천 명도 넘는다! 식당에 가 보니 대문이 전부 열려 있었고 여러 사람은 순서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문 입구에서 한 수련생이 여러 사람에게 “10명이 한 상에 앉고 스스로 빈자리를 찾아 앉으세요. 매 사람마다 6위안이고 식사를 다하면 돈을 상에 놓으세요”라고 알려주었다. 홀에는 이미 상을 가득 배치해 놓았고 의자는 없었다. 매 상에 쌀밥 한 대야에 반찬 네 가지가 있었다. 여러 사람은 10명이 되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후 사람들은 6위안을 놓고 조용히 떠났다. 30분 만에 천여 명이 식사를 다하고 떠났다.

오후 회의가 원만히 끝난 후 각지 수련생은 잇달아 떠났다. 나와 몇몇 치치하얼 수련생은 우리가 타고 온 차가 떠나려면 두 시간 정도 있었기에 강당에 좀 있었다. 강당 업무자들은 홀가분하게 청소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청소할 쓰레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다칭의 한 조직자도 우리와 함께 한담했다. 우리는 그에게 온종일 바쁘게 보냈기에 빨리 돌아가 휴식하라고 말했다. 그녀는 힘들지 않으며 교류회가 이렇게 순리로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유일한 걱정은 식당과의 결산이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돈을 갖고 가서 식당 관리인에게 가서 돈이 부족하지 않는지 물었다. 식당 관리원은 웃으며 “안심하세요. 한 푼도 부족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가정주부였다. 기타 몇몇 대회 조직자도 이렇게 큰 대형 활동을 조직한 경험이 없었다. 며칠 전 그들은 불안해 열이 나서 잠도 자지 못했다. 그들은 활동에 문제가 생길까 봐 두려워했지만 이외로 사람들의 소양이 이렇게 높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람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아 대회가 매우 원만하게 끝났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매번 나는 그 당시 광경을 생각하면 아직도 감동이 물결친다. 대법은 짧디 짧은 2년 만에 신주대지(神州大地)에 이렇게 소양이 높은 많은 사람을 만들어냈고 얻기 어려운 정토를 만들었다. 오직 진정으로 대법을 수련하면 공직자는 탐내지 않고 상인은 속이지 않으며 시민들은 규율과 법을 지킨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 기하학적인 속도로 증가하고 중국사회의 도덕성이 끊임 없이 다시 향상하는 것을 이끌 때, 1999년 한바탕 후안무치한 탄압이 이 일체를 망가뜨렸고 중화민족이 가장 얻기 어려운, 한차례 도덕성이 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망치게 했다. ‘진선인(眞善忍)’을 믿는 이러한 수련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은 일체 흉악한 세력을 지원하고 동원해 현 사회가 혼란이 속출하게 했다. 도덕성이 하루에 천리나 미끄러져 모든 양심 있는 중국인을 가슴 아프게 하고 있다.

중국인의 소양이 낮은가? 아니다! 이 일체를 해결할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자에게 연공할 자유를 주고 중국인이 좋은 사람이 될 권리를 돌려주면 되는 것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문장발표: 2015년 5월 13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신수련생마당>더욱 많은 수련체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5/13/3085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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