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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께서 산둥 린칭에서 법을 전하시던 나날을 회상하며

글/ 산둥 린칭(臨淸) 대법제자

[밍후이왕] 1993년 5월 7일부터 17일까지는 우리 린칭 대법제자, 린칭 중생이 영원히 잊지 못할 나날들이다. 우리의 비할 바 없이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는 고생도 마다하시고 우리 여기에 오시어 우주의 가장 귀중한, 값으로는 따질 수 없는 가장 소중한 파룬따파를 친히 우리에게 전해 주셨고, 우리 린칭 대법제자에게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를 주셨으며, 우리를 희망 없는 미혹 속에서 깨워주셨고, 우리를 반본귀진(返本歸眞) 회귀의 길로 이끌어 주셨다. 비록 이젠 20여 년이 흘러갔지만, 사부님의 우람한 체구, 자비로우신 미소는 여전히 눈앞에 생생하고 우리 마음속 깊이깊이 새겨져 있다.

1993년 5월 7일, 사부님께서 린칭에 오신 후 주최 측의 준비 부족으로 홍보가 따라가지 못했기에 학습반 입장권이 매우 적게 나가 모두 몹시 조급해했다. 사부님께서 이 상황을 아신 후 주최자에게 당일 저녁에 보고회를 열겠으니 이 소식을 전해 사람을 불러오기만 하면 되고 다른 일은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관계자들이 도처에 포스터를 붙이면서 관련 소식은 린칭시에서 빠르게 퍼졌다. 당일 저녁, 사부님께서는 여정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린칭시 호텔 회의장에서 보고회를 개최하셨는데 시 당 위원회, 시 인민대표대회, 시 노동자협회, 과학기술협회 일부 고위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천목이 열린 수련생들은 당시 회의장 단상에 매우 큰 부처가 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보고회가 끝난 후 사람들은 앞다퉈 관계자들을 찾아가 입장권을 받아갔는데 참가 인원이 230여 명에 이르렀다.

기공을 연마한 적이 있는 몇몇 수련생은 당시 비교적 명성이 있는 기공사를 접촉해 봤으나 늘 진정한 것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얼마간 연마해 봤지만, 제고가 없자 늘 유명한 사부를 만나 제고하고 싶었다. 그들은 사부님의 공을 지닌 보고회를 들은 후 매우 흥분해서 말했다. “자기 집 문 앞에서 진정한 사부님을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들 몇 사람은 모두 학습반에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줄곧 지금까지 걸어왔다.

학습반을 열기 전에 사부님께서는 여정의 피로도 마다하시고 린칭의 몇몇 실무자의 배동(陪同) 하에 우리 시의 일부 명소를 청리하셨는데 명소는 시 구역 사방에 있었다. 이를테면 린칭 사리보탑, 오양송, 헐마정, 대녕사, 청진사 등인데 이런 명소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으셨다. 이번의 법 전파를 위해, 린칭 대법제자의 수련을 위해, 린칭의 미래를 위해 장애를 쓸어버리고 좋은 환경을 창조해 주셨다. 또 사부님께서는 친히 린칭 공원에 오셔서 연공 장소를 선정해 주시기도 했다.

학습반을 여는 여가에 사부님께서는 또 시 공회에 가셔서 질병을 조리하는 것을 상담해주셨다. 하루는 한 중환자가 가족에게 업혀서 시 공회 2층 상담실로 들어왔다. 사부님께서는 그를 조절해 주신 후 그에게 걸어보라고 말씀하셨다. 결과적으로 이 사람은 정말로 스스로 2층에서 걸어 내려왔다. 또 한 환자는 사시(斜視)였는데 사부님의 조절을 거친 후 정상으로 회복됐다. 당시 밖에는 많은 사람이 구경하고 있었는데 모두 신기하고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했다.

한 여 수련생은 병원 검사에서 유방암 진단이 나왔는데 며칠간 학습반을 거치고 나서 암이 보이지 않았고 몸이 정상이 됐다. 그녀는 학습반에서의 체험을 말할 때 격동해 그저 엉엉 울기만 하면서 몇 마디 못했다.

학습반에서 수련생들의 심성 제고는 아주 빨랐다. 여러 수련생은 날마다 비교적 일찍 갔는데 학습반을 연이틀 동안 이 몇몇 수련생들은 매번 모두 첫 줄에 앉았고 게다가 친척 친구에게 자리를 맡아 주었다. 세 번째 날 강의를 들은 후, 그들은 아무리 일찍 가도 앞에 가서 앉지 않았으며 몰래 뒤에 가서 앉았는데 학습반이 끝날 때까지 줄곧 그러했다.

학습반을 진행한 기간에 교란 또한 아주 컸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한창 강의 하고 계시는데 갑자기 확성기에서 잡음이 나오자 사부님께서 즉시 그것들을 청리해 버리셨다. 하지만 잠시 후 또 교란이 나타나자 수련생들이 강의를 듣는데 영향 주지 않기 위해 사부님께서는 실무자에게 확성기를 끄라고 하시고는 여러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우리 오늘은 그것을 쓰지 말고 오늘 저녁에 다시 그것들을 처리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말을 뒤쪽 사람들은 들립니까?” 사부님께서는 대답을 들으신 후 다시 강의를 시작하셨다.

1993년 전국 각지에는 이미 기공 붐이 일어 각종 기공 문파들이 잇달아 각지에서 학습반을 열었다. 그러나 공통된 특징이 있었는데 비용은 아주 비쌌지만, 사람에게 주는 것은 적고도 적었다. 사부님께서 린칭에서 전하시는 공은 오히려 반대로서 전국에서 비용이 가장 낮았으며, 게다가 여러 사람에게 주는 것은 가장 많고, 가장 진귀했으며, 값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는 또 무상으로 ‘파룬궁’ 책 백 권을 증정하신 동시에 또 린칭 수련생들에게 비교적 고급 녹음기 한 대를 증정해 수련생들의 단체 연공에 쓰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 대법 수련생에게 파룬 비단 깃발 한 폭을 주셔서 수련생들이 홍법하는데 편리하게 하셨다. 이는 우리 린칭 수련생에 대한 사부님의 애호, 관심과 기대였다.

사부님께서는 아주 고생하셨지만 늘 국수 한 사발로 끼니를 때우셨다. 사부님께서는 매번 강의에 모두 제때에 도착하셨고 지각하신 적이 없다. 매번 강의에 모두 자그마한 쪽지 한 장을 지니셨는데 위에는 강의 내용을 적은 개요가 있었을 뿐인데 말씀을 시작하시면 한두 시간씩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공개 장소마다 모두 옷차림이 정결하셨는데 위에는 짙은 청색 양복이고 안에는 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매셨고 발에는 검은 구두를 신으셨다. 그때 사부님은 이미 40여 세였으나 보기에는 20세를 갓 넘은 것처럼 젊고 인자하시고 선량하며 친절하셨으며 겸손한 가운데 위엄이 비쳤다.

학습반이 종결될 때 ‘린칭시 과학협회’는 여러 사람을 대표해 사부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현하는 비단 깃발을 사부님께 증정했는데 위에는 ‘활불재세(活佛在世)’란 몇 개 큰 글자가 금빛을 뿌렸다.

사부님께서 린칭에 법을 전한 소소한 일을 회상하노라면 오늘까지도 격동을 금할 수 없다. 더욱이 20년의 수련을 경과하면서 역사 이래 수련인에 대한 가장 사악하고 가장 잔혹한 박해를 겪었다. 사부님 정법은 이미 막바지에 이르렀고 신기원이 곧 시작되고 진상이 곧 크게 나타날 것이다. 이 최후의 시각에 우리는 더욱더 사부님이 그립다. 우리는 최후의 시각에 계속하여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자신 수련을 잘하며, 사람을 더 많이 구하여 자신의 사전 대원(史前大願)을 꼭 완수할 것이다.

문장발표: 2015년 5월 7일
문장분류: 사부님 은혜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5/7/2746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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